(3)불생불멸(不生不滅), 불구부정(不垢不淨), 부증불감(不增不減)

  모든 법의 공한 모양은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다는 뜻은 본체(本體)를 의미하는 동시에「중도」를 의미하는 것이다.

앞의 강의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인식의 주체 ‘나’도 공하였고, 인식의 대상 ‘오온(五蘊)’도 공하였고, 인식의 활동 자체 ‘식(識)’도 공하였다. 그러나 공은 공이 아니므로 허무는 아니다. 주체, 대상, 식이 서로 맞물리는 연기적 활동 상이 있기 때문에 가유(假有)가 있다.

  주체, 대상, 식이 공으로 가는 수행을 지행(止行)이라고 하고, 공(空)과 가유(假有)의 대립을 초월하는 것을 가제(假諦)라고 하고 가제의 공이 진공묘유로 작용하여 실용의 세계에 진입하는 것을 중도(中道) 혹은 중제(中諦)라고 한다. 그리고 이 중도에 이르기 위한 수행을 관행(觀行)이라고 한다. 지관쌍수(止觀雙修)하여 중도(中道)를 성취한 입장에서 보면 법의 공한 모양은 「불생불멸(不生不滅) 불구부정(不垢不淨) 부증불감(不增不減)」이라는 뜻이다.

① 중도의 입장에서 해석함

불생불멸: 생겨남도 아니고 없어짐도 아니라는 것은 중도를 성취하지 못한 범부는 여기서 죽고 저기서 태어나 영겁을 나고 죽음의 윤회를 하게 되지만 중도를 성취한 지위에 있는 사람은 참으로 공한 존재의 본질을 체득하였으므로 생명의 상(相)과 용(用)은 변하여도 그 체(體)는 시작한 바가 없으므로 멸할 것이 없고, 멸하는 것이 아니므로 생함도 없이 항상 여여(如如)하게 존재한다는 것이다. 생과 멸에 치우치지 않으므로 중도이다.

불구부정: 일반 범부들의 느낌은 현상에 의하여 작용함으로 더러움과 깨끗함이 있다. 그러나 중도를 성취한 사람은 더러움 속에서 깨끗함을 구현해간다. 더러움은 깨끗함에서 깨끗함은 더러움에서 나오므로 깨끗함과 더러움은 둘이면서도 둘이 아니므로 더러운 것도 아니고 깨끗한 것도 아니라고 느끼는 것이다. 더러운 것에도 깨끗한 것에도 집착하지 않으므로 중도이다.

부증불감: 일반 범부들은 현상을 보고 늘어났다 줄어들었다고 하지만 중도를 체득한 사람은 현상은 체(體) 즉, 공(空)의 변화의 모습에 불과하므로 공(空)자체는 늘고 줄어듬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붓다가 설사 질곡과 고통을 끝내고 해탈과 열반을 얻었지만 질곡과 고통은 원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줄어듦이 아니요 늘어남도 아니다. 줄어들거나 늘어남에서 초월한 경지이므로 중도이다.

② 존재의 실상 자체에서 해석함

불생불멸(不生不滅):  색(色)을 여의고 공(空)을 성취하였다고 하는 것은 자기가 종사하는 일에 전념을 할 수 있게 되면 생멸하는 모든 번뇌를 여의고 일념으로 하는 일에 집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념으로 하는 일에 오로지 전념할 수 있을 때 번뇌가 생멸하지 않으므로 불생불멸(不生不滅)이 이루어진 공(空)의 도리에 진입하게 되는 것이다.

이 공(空)은 모든 존재의 본체이고, 이를 또 실상이라고 하는데 이 실상의 입장에서는 생과 멸(生滅)이 없는 것이다. 이 실상을 불생불멸이라고 한다. 지구상에 물과 흙이 현상으로서는 끊임없는 변화를 일으키는 생멸이 상속하지만 실상으로서의 물과 흙은 분명히 불생불멸인 것과 같다.

고정적인 것이 있다면 공(空)은 아니지만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모해 가는 유동적이기 때문에 ‘어떤 것이 있다’라고 말할 수 없다. 그리고 ‘없다’라고도 말할 수 없다. 이 현상에서의 유(有)와 무(無)를 초월한 것으로 존재를 이해하는 것이 존재를 공(空)의 입장에서 보는 것이고, 이를 실상(實相)이라고 하였으며, 이는 우리들의 마음에 있다.

따라서, 실상(實相)에서의 생(生)이란 본래 없는 것이고, 본래 태어남이 없기 때문에 죽음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즉 태어남이 없음이 바로 죽음이 없음이다. 이것이 바로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다’는 것이고, 여기에서 공(空)이 가지는 영원성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들은 우리들의 본성이 본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영원하고 무한한 것임을 알게 된다.  

번뇌와 죄와 업장의 생멸이 있지만 이들은 현상으로 써 생멸하는  것이다. 이들은 실상(實相)에 뿌리를 둔 근본은 아니므로 단멸(斷滅)될 수 있는 대상이다. 공(空)의 의미로서의 실상은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다.

불구부정(不垢不淨):  인간의 본성이 가지고 있는 질(質)의 문제이다. 존재의 현상적으로는 더러운 것이 있고 깨끗한 것이 있지만 더러운 곳에 살면서도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현상적으로 생활의 장애가 있어 장애를 받기도 하지만 장애로 방해를 받지도 않는 실상이 있다. 이 실상의 입장에서는 더러워지는 것도 없고 깨끗해 는 것도 없다. 법(法)에는 깨끗함과 더러움을 초월하여 깨끗함과 더러움이 물들 수 없는 것이 있다. 이것을 공이라고 표현하는 실상이다. 공(空)한 참모습을 항상 유지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이 청정하다는 것은 더럽고 깨끗하다고 하는 상대적인 입장에 선 청정함이 아니다. 인간의 본성은 영원한 청정자임으로 때묻을 수 없고 물들 수 없으며 더러워질 수 없다. 그리고 다시 깨끗해질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이를 법(法)이라고도 한다.

우리들이 사람을 판단할 때,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인품이라든가 학력이라든가 재산이라든가 혹은 가문으로 평가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사람의 가치를 출신 성분이나 사회적 신분으로 규정하였던 양반이나 상민의 구별이나 인종 차별이나 성별의 차별로 박해하는 사회도 있었다.

이렇게 인종에 대한 차별이나 계급에 의한 차별의 관념이 생기는 직접적인 원인은 사람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청정하다든가 태어나면서부터 더럽다든가 하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견해가 많은 세대에 걸쳐서 승인되어 왔으면 근거 없는 편견이라도 실체가 있는 것처럼 느껴져 그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청정하고 태어나면서부터 더렵혀져 있다고 하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더럽지도 않다’라는 말은 ‘태어나면서부터 더럽혀져 있다’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자신은 최상의 혈통을 지닌 가문이고 다른 가문은 열등하다고 하여 경멸하는 것은 계급적 편견이라고 하여 이를 부정하는 것이 ‘더럽지도 않다’이다. 따라서, 이 ‘더럽지도 않다’는 것 가운데는 ‘깨끗하지도 않다’ 즉 태어나면서부터 남보다 청정하지도 않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이것이야말로 영원한 인간 무죄의 선언이다. 인간 본분, 진실 면목은 실로 죄지을래야 죄지을 수 없는 청정자이다. 규정할 자가 없는 자존자(自存者)이다. 그는 영원한 자유자재자이다. 이 청정자재자가 인간의 본래면목이다. 이것을 깨달으면 일체의 고뇌에서 벗어난다.

다음으로 ‘깨끗하지도 않다’는 산스크리트 본에서는 “더러움을 여의고 있는 것도 아니다”라고 하여 단순히 청정을 부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더러움을 여의고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는 의미는 어떠한 악이나 죄를 행해도 죄에 더렵혀질 수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부처님 당시 일부의 바라문은 출생에 의해서 청정하기 때문에 어떤 악을 행해도 죄에 더렵혀지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여기에 대해서 부처님은 어떠한 종성의 출생이라도 생명을 죽이고 도적질을 하며 사음을 하고 거짓말을 하는 등의 악행을 행하면 계급 여하에 상관없이 죄로 더렵혀진다고 설하여, 바라문은 죄에 더렵혀지지 않는다고 보던 당시의 편견을 타파했다.

《숫타니파타》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출생에 의해 천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고, 출생에 의해 바라문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 행위에 의해서 천한 사람도 되고 바라문도 되는 것이다.<136>

출생에 의해 바라문이 되는 것이 아니다. 출생에 의해 바라문이 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행위로 인해 바라문이 되고, 행위로 인해 바라문이 안 되기도 하는 것이다.<650>

행위에 의해 농부가 되고 행위에 의해 기능인이 되며, 행위에 의해 장사치가 되고 행위에 의해 고용인이 된다.<651>

행위에 의해 도둑이 되고 행위에 의해 무사가 되며, 행위에 의해 제관이 되고 행위에 의해 왕이 된다.<651>

부처님은 인간은 출생에 의해서 더렵혀지는 것이 아니라 더러운 행위에 의해서 더렵혀지고, 청정한 행위에 의해서 정화되는 것이라고 설하고 있다. 따라서 ‘더러워지는 것도 아니고 깨끗해지는 것도 아니다’란 선(善)에도 물들지 않고 악(惡)에도 물들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태어나는 신분에서부터 더럽혀져 있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어떠한 사람도 선(善)을 행함에 의해서 청정해질 수 있고, 청정함이 태어나는 신분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떠한 사람도 악을 행하면 죄에 더렵혀짐을 면할 수 없음을 의미하고 있다. 여기에서 인연에 의해서 선(善)이 되기도 하고 인연에 의해서 악(惡)이 되기도 한다는 공(空)의 사상이 보인다. 어떠한 신분에 의하여 선악(善惡)이 제약을 받는 고정관념은 공(空)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증불감(不增不減):  부증불감은 인간의 본성이 지니고 있는 양에 관한 문제이다. 양적으로 상대적인 개념을 초월한 무한을 말하고 있다. 참된 공한 모습에서는 해탈을 성취하여 장애가 다했지만 장애가 줄어듦도 아니고 해탈을 성취하여 만 가지 덕을 원만히 했지만 덕이 늘어남도 아님을 말한다. 해탈과 장애의 상(相)과 용(用) 즉 현상적인 측면에서는 해탈과 장애의 증감이 있지만 참된 공한 모습인 체(體), 실상(實相)의 입장에서는 늘고 줆이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질적으로 좋고 훌륭한 것을 선호하듯이 양적으로 좀더 많은 것을 바란다. 우선 물질적으로 재산이나 돈의 많고 적음을 구별하고, 그것에 관하여 우리들은 증가했다든가 줄었다든가 말하며 기뻐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한다. 다음으로 정신적으로 복덕이 많다거나 적다고 할 때도 마찬가지 상황이 일어난다. 거기에는 언제나 어떤 기준을 나름대로 설정해 두고 많고 적음을 판단하여 부러워하기도 하고 안타까워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많고 적음은 언제나 상대적이다. 거기에는 그 사람만의 기준이 있을 뿐 절대적인 기준은 있을 수 없다. 가령 일억 원이라는 돈은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큰 돈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 일억 원을 그렇게 많지 않은 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틀림없이 있다. 일억 원은 수량의 면에서는 누구에게도 마찬가지지만, 그러나 감정으로서는 사람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우리들은 복덕에 실체가 없고, 나아가 재산이나 돈에 실체가 없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들 중에는 재산을 지나치게 아끼는 사람, 지나치게 돈에 집착하는 사람이 있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은 고통의 원인이 된다. 인간은 사치를 하면 한이 없지만 일생 동안 입는 옷이나 먹는 음식물에는 스스로 한도가 있다. 절도(節度) 있는 생활을 하면 알맞은 재산으로 곤란하지 않는 생활을 할 수가 있고, 열심히 일하는 가운데서는 재산의 증감에 마음을 기울이지 않을 수도 있다.

이러한 사람은 가령 얼마 안 되는 재산을 가지고 있어도 마음은 부자인 셈이고, 세상의 재산가를 능가하고 있을 수도 있다. 물론 현실에 재산이 있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재산으로 마음이 풍부한 생활을 하는 것이다. 재산이 아무리 있어도 수전노(守錢奴)라면 재산이 아까워서 사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마음의 차원에서는 재산가라고 말할 수 없다. 이렇게 보면 재산의 증감에 마음을 번거롭게 하지 않는 것이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다’의 의미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이처럼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다’란 말은 인간의 욕망에 관한 것이다. 인간은 간단히 ‘욕망이 바로 자신이다’라고 생각해 버리지만, 그러나 욕망과 자기는 다르다. 이 점을 확실히 알 필요가 있다. 가령 어떤 아름다운 보석을  보고서 욕망은 그것을 가지고 싶다고 하지만, 우리들의 이성은 그것이 타인의 것임을 생각하여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욕망을 억제한다. 즉 자제력으로 욕망을 억제하고 절제 있는 생활을 유지하는 것이다. 여기서 욕망과 자기가 별개임을 알 수 있다.

만약 우리들이 욕망대로 행동하면 몸의 파멸이 오게 된다. 왜냐하면 욕망에는 한이 없고, 따라서 욕망대로 생활하고 있다면 만족할 때는 없기 때문이다. 마음에 만족이 없으면 행복은 없다. 사람은 만족에 의해서 행복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는 ‘욕망의 만족이 행복이다’라고 생각하지만, 한 번쯤 욕망을 만족시키고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지만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 더 큰 욕망이 생기게 됨으로 번뇌도 그 만큼 크지게 되지게 된다.

이와 같이 욕망에 한이 없다고하면 만족을 욕망으로부터 단절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즉 물질이 풍부하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인간이 행복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주어진 물질에 만족하는가 아닌가에 따라서 행∙불행이 정해지는 것이다. 우리들 각자는 문화 생활에 필요한 적당한 수입과 지출을 정하고 그 이상의 수입에 대하여는 전혀 상관하지 않고 본인이 종사하는 업무에 전념하고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완성을 위하여 일념으로 정진할 수 있다. 누구나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수입의 증감이 무관하게 됨으로 부증부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일념으로 정진하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느낌도 없고 행복하지 않다는 느낌도 없는 행복한 중도를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다’는 것은 양적인 것에 대하여 공성(空性)을 보여 준다. 공(空)이란 본래 완성이고 스스로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이 생각할 수 있는 일체 모든 것을 전부 내포하고 있는 것이 공이다. 따라서 온갖 법이 공에 의해서 창출되는 것이다. 우리의 본성은 공이다. 우리의 본성이 공이기 때문에 공이 가지고 있는 온갖 덕성을 가지게 된다. 여기서 인간의 본성이 지니고 있는 원만구족성(圓滿具足性)을 발견하게 된다.

《육조단경(六祖檀經)》〈오법전의(悟法傳衣)〉제1은 혜능(慧能)조사가 오조홍인(五祖弘忍) 대사에게서 《금강경》의 강설을 듣고 깨달음을 얻어 그 징표인 의발(衣鉢)을 받는 사정을 전하고 있다. 그때 혜능 조사는 《금강경》의 “마땅히 머무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하는 부분에 이르러 대오(大悟)하여 홍인 대사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드린다.

어찌 자성이 본래 스스로 청정함을 알았으며, 어찌 자성이 본래 생멸하지 않는 것임을 알았으며, 어찌 자성이 본래 스스로 구족함을 알았으며, 어찌 자성이 본래 동요가 없음을 알았으며, 어찌 자성이 능히 만법을 냄을 알았겠습니까!

이 언구는 제법이 공한 이 본래의 소식을 잘 설파하고 있다. 자신의 성품이 부처님의 성품, 즉 불성과 다르지 않다. 본래 청정하고 본래 생멸하지 않으며, 본래 모든 덕성을 갖추고 있다. 그래서 능히 일체 만법이 자신의 본성에서 나옴을 철견(徹見)함이 바로 깨달음이라고 한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들은 인간의 본성이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영원한 것이고,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는 청정한 것이며,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 원만구족한 것임을 살펴 왔다. 이것은 또한 우리들의 본성이 다름 아닌 부처님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부처님이 지니신 온갖 선한 덕성은 사실은 우리들 자신의 덕성임이 드러난다. 나의 생명이 부처님의 무량한 공덕생명과 동일함을 알게 된다. 겉으로 보아서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음으로 인한 온갖 번뇌에 휘둘린 범부 중생인 것처럼 생각될지 모르지만, 사실은 부처님의 생명과 조금도 다름없는 공덕이 충만한 생명임을 보게 된다.

이와 같은 생겨남과 없어짐, 더러워짐과 깨끗해짐, 늘어남과 줄어듦의 법들은 바로 함이 있는 법의 모습이다.  대립이 있고 함이 있는 현상법을 뒤집으면 바로 대립이 통일되어 공한 존재의 본질인 실상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립이 대립 아닌 존재의 참모습을 공한 모습이라 한다.

천태선사는 만약 법성과 무명이 결합하여 온갖 법의 여러 영역들이 있게 되면 이것이 곧 속제(俗諦)이고, 온갖 존재의 영역들이 하나인 법계에 들어가면 이것이 곧 진제(眞諦)이다. 진제의 하나가 아니고 속제의 여럿이 여럿 아니면 이것이 곧 중도 제일의제이니, 이처럼 온갖 법을 두루 거치면 온갖 법이 부사의한 삼제(不思議三諦)아님이 없게 된다.

천태는 속제(俗諦)라는 언어를 통해 온갖 존재의 다양한 자기 발전을 승인하고, 진제라는 언어를 통해 하나됨의 초월성과 정체성을 깨뜨리며 하나됨을 다양한 온갖 존재의 상호개방성으로 정립한다. 그러므로 천태의 중도관은 다양한 온갖 존재 서로간의 닫혀진 벽도 부정하고[非一切], 만유를 포괄하는 하나의 독단도 거부함으로써[非一] 나와 너, 이것과 저것, 개인과 역사가 자기 부정을 통해 새로운 자기를 구성 해 가는 공동체적 삶의 자유를 밝혀주고 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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