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 (십이연기 十二緣起)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무명도 없고 또한 무명이 다함도 없으며 내지 늙고 죽음도 없고 또한 늙고 죽음이 다함까지도 없다.》

  위 구절에선 “공 가운데에는”이 위에서 계속 연결되어 있다고 봐야 한다. 그리고 〈내지(乃至)〉라는 말이 뜻하는 부분을 모두 기록하면 아래와 같이 된다.

(공 가운데에는)
무무명 역무무명진 무행 역무행진 무식 역무식진 무명색 역무명색진
無無明 亦無無明盡 無行 亦無行盡 無識 亦無識盡 無明色 亦無名色盡

무육입 역무육입진 무촉 역무촉진 무수 역무수진 무애 역무애진
無六入 亦無六入盡 無觸 亦無觸盡 無受 亦無受盡 無愛 亦無愛盡

무취 역무취진  무유 역무유진 무생 역무생진 무노사 역무노사진
無取 亦無取盡  無有 亦無有盡 無生 亦無生盡 無老死 亦無老死盡

(공가운데에는)
무명(無明)이 없고 무명이 다함도 없으며,
행(行)이 없고 행이 다함도 없고,
식(識)이 없고 식이 다함도 없다.
명색(名色)이 없고 명색이 다함도 없으며,
육입(六入)이 없고 육입이 다함도 없고,
촉(觸)이 없고 촉이 다함도 없다.
수(受)가 없고 수가 다함도 없으며,
애(愛)가 없고 애가 다함도 없고,
취(取)가 없고 취가 다함도 없다.
유(有)가 없고 유가 다함도 없으며,
생(生)이 없고 생이 다함도 없고,
노사(老死)가 없고 노사가 다함도 없다.

가. 십이연기의 이해

연기설의 가장 대표적인 것은 십이연기설이다. 십이연기설이란「세존은 보리수 아래에서 처음 정각을 이루신 후 보리수 아래에서 7일간을 결가부좌(結跏趺坐)한 채 해탈의 즐거움을 받고 있었다. 그 때 세존은 그 초야(初夜)에 연기의 이치를 순차(順次)로 또 역차(逆次)로 마음속에서 기억하려고 수많은 회수 되풀이하여 관하였다.1)」

이 관법을 대개 네 가지로 설명한다. 설명적 순관(順觀)[유전연기(流轉緣起)라고도 함], 설명적 역관(逆觀)[환멸연기(還滅緣起)라고도 함], 추리적(推理的) 순관, 추리적 역관 [환멸연기(還滅緣起)라고도 함] 등 네 가지이다.  이들은 아래와 같이 관하는 수행법이다.

 이 수행법으로 깨달음을 얻은 사람을 연각(緣覺), 독각(獨覺), 또는 벽지불(辟支佛)이라고 칭한다.

 십이연기는 연속적이며 상호 상의적이어서 마치 열두 알의 단주와 같아서 서로 서로 얽혀 있는 것이 특징이다.

유전연기(流轉緣起)                   환멸연기(還滅緣起)
[설명적 순관(順觀)]                  [설명적 역관(逆觀)]

무명無明에 연하여 행이 있고      무명無明이 멸하므로 행이 멸하고,
행行에 연하여 식이 있고,           행行이 멸하므로 식이 멸하고,
식識에 연하여 명색이 있고,        식識이 멸하므로 명색이 멸하고,
명색名色에 연하여 육입이 있고,  명색名色이 멸하므로 육입이 멸하고,
육입六入에 연하여 촉이 있고,     육입六入이 멸하므로 촉이 멸하고,
촉觸에 연하여 수(受)가 있고,      촉觸이 멸하므로 수가 멸하고,
수受에 연하여 애가 있고,           수受가 멸하므로 애가 멸하고,
애愛에 연하여 취가 있고,           애愛가 멸하므로 취가 멸하고,
취取에 연하여 유가 있고,           취取가 멸하므로 유가 멸하고,
유有에 연하여 생이 있고,           유有가 멸하므로 생이 멸하고,
생生에 연하여 노사老死가 있다.  생生이 멸하므로 노사가 멸한다.  

〈유전연기〉는 삶이 흐르는대로 전전하며 살아가는 것으로 육도 윤회의 과정이 현상적으로 보더라도 삶의 가치가 악화되는 흐름임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  

〈환멸연기〉는 무명의 원인을 멸함으로서 필경 노사(老死)가 멸함을 알게 하기 위한 수행이므로 점차 현상이 순화되고 업이 정화되어 육도 윤회의 과정에서 삶의 가치가 향상되어 가게 된다.

〈추리적 순관(推理的 順觀)〉

무엇이 있으므로 노사老死가 있는가, 생(生)이 있으므로 노사(老死)가 있다.
무엇이 있으므로 생(生)이 있는가, 유(有, 업)가 있으므로 생이 있다.
무엇이 있으므로 유(有, 업)가 있는가, 취(取)가 있으므로 유가 있다.
무엇이 있으므로 취(取)가 있는가, 애(愛)가 있으므로 취가 있다.
무엇이 있으므로 애(愛)가 있는가, 수(受)가 있으므로 애가 있다.
무엇이 있으므로 수(受)가 있는가, 촉(觸)이 있으므로 수가 있다.
무엇이 있으므로 촉(觸)이 있는가, 육입(六入)이 있으므로 촉이 있다.
무엇이 있으므로 육입(六入))이 있는가, 명색(名色)이 있으므로 육입이 있다.
무엇이 있으므로 명색(名色)이 있는가, 식(識)이 있으므로 명색이 있다.
무엇이 있으므로 식(識)이 있는가, 행(行, 업)이 있으므로 식이 있다.
무엇이 있으므로 행(行, 업)이 있는가, 무명이 있으므로 행(行, 업)이 있다.
무엇이 있으므로 무명(無明)이 있는가, 진리인 연기법을 모르는 탓이다.

〈추리적 역관(推理的 逆觀)〉[환멸연기(還滅緣起)]

무엇이 멸하면 노사老死가 멸하는가, 생(生)이 멸하면 노사(老死)가 멸한다.   
무엇이 멸하면 생(生)이 멸하는가, 유(有, 업)가 멸하면 생이 멸한다.
무엇이 멸하면 유(有, 업)가 멸하는가, 취(取)가 멸하면 유가 멸한다.
무엇이 멸하면 취(取)가 멸하는가, 애(愛)가 멸하면 취가 멸한다.
무엇이 멸하면 애(愛)가 멸하는가, 수(受)가 멸하면 애가 멸한다.
무엇이 멸하면 수(受)가 멸하는가, 촉(觸)이 멸하면 수가 멸한다.
무엇이 멸하면 촉(觸)이 멸하는가, 육입(六入)이 멸하면 촉이 멸한다.
무엇이 멸하면 육입(六入)이 멸하는가, 명색(名色)이 멸하면 육입이 멸한다.
무엇이 멸하면 명색(名色)이 멸하는가, 식(識)이 멸하면 명색이 멸한다.
무엇이 멸하면 식(識)이 멸하는가, 행(行, 업)이 멸하면 식이 멸한다.
무엇이 멸하면 행(行, 업)이 멸하는가, 무명이 멸하면 행(行, 업)이 멸한다.
무엇이 멸하면 무명(無明)이 멸하는가, 어리석음이 멸하면 무명이 멸한다.

이상에서 우리들은 다음과 같이 몇 가지 십이연기의 의미를 찾아 볼 수 있다.

〈무명 내지 노사〉라고 하면 무명에서 시작하여 노사에서 끝난다는 뜻이므로 십이연기를 의미한다.

 십이인연이라 함은 범부가 살아있는 유정(有情)으로서의 삶을 구성하는 열두 단계의 요소이다. 그 요소는 무명(無明), 행(行), 식(識), 명색(名色), 육입(六入), 촉(觸), 수(受), 애(愛), 취(取), 유(有), 생(生), 노사(老死)이다. 즉 십이인연의 가운데 부분이 생략된 표현이다.

십이연기가 의미하는 바는
①인(因)과 연(緣)으로 상호의존적으로 성립된 이들은 무상(無常)이며 고(苦)며 무아(無我)라는 것이다. 이것을 삼법인(三法印)이라고 한다.
②범부중생의 고(苦)된 생존은 어떻게 하여 성립되었고, 그것은 어떻게 제거시켜서 열반, 바라밀 본지(本地)로 돌아갈 수 있는가 하는 생존가치의 의의(意義)에 역점을 두고 있다.

십이인연을 해석하는 두 가지 관점
① 무명 내지 노사를 금생일세(今生一世)로 보고 해석하는 관점이다. 이 관점에서는 무명 및 갈애(渴愛)가 주요 원인이 되어, 그것에 의해 그릇된 경험이 점차 쌓이고 거기에서부터 그릇된 맹목적 욕구나 행위가 일어나 만족스러운 참 삶, 진실과 안과 밖이 없는 내외명철(內外明徹)한 삶이 얻어지지 못하고 불안, 고민, 초조가 발생함을 설명한다.
②삼세양중인과설(三世兩重因果說)이다.
무명에서 노사까지를 전생, 현세, 내세 즉, 삼세에 배대하여 설명한 태생학적(胎生學的)인 소승불교의 전통적 해석법이 지금에도 성행하고 있다. 인과가 십이연기중 두 번 반복된다하여 양중인과라고 한다.

● 전생(過去世)
①무명(無明 Avidyā): 무명은 애(愛) 취(取)와 동격으로 무한히 계속되어 오고 있는 미혹(迷惑)이다. 현세에 과보를 준 과거세의 인(因 무명과 행)중 첫 원인이다. 과거세의 인(因)이라고 함은 사(死) 이전에 애(愛)∙취(取)로 말미암아 집(集)이 된 유(有)를 의미한다.
②행(行 Samskāra): 무명(無明)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선악(善惡)의 행업(行業)에 의한 잠재적인 충동 및 앙금이기도하다. 현세에 과보를 준 과거세의 유혹(誘惑)으로 말미암아 행(行)한 업(業)이다.

● 현세상(現世)
③식(識 Vijnāna): 과거세 업에 의해서 금세에 태어나고자 하는 일념, 곧 모태에 수태하고자 하는 마음이다. 또 이 식은 인식판단의 의식작용과 인식판단의 주체를 말한다. 식(識)을 비롯하여 식, 명색, 육처, 촉, 수 등 다섯 기능을 통하여 과거의 유혹과 업의 소행으로 생긴 과보를 금생에 치루어야 할 고(苦)로서 받게 된다.
④명색(名色 nāma-rūpa): 태중(胎中)의 마음과 몸. 곧 태중의 오온(五蘊)이다. 명(名)은 태아의 마음 작용, 색(色)은 태아의 몸뚱이이다. 명색도 과거로 인하여 금생에 이(名色)를 통하여 받아야 할 고(苦)이다.
⑤육입(육처, 육근六根 sad-āyatana): 태중에 육근(눈, 귀, 코, 혀, 몸, 뜻)이 자리잡고, 식(주체)과 명색(대경)과 육근이 상호 작용하므로 인식판단 할 수 있는 기능을 갖춘다. 곧 18계가 성립한다. 육처(六處)도 과거의 혹과 업의 소행으로 금생에 다섯 가지를 통하여 치루어야 할 고(苦)중 하나이다. 이 다섯가지는 식, 명색, 육처, 촉, 수이다.
⑥촉(觸 sprsâs): 육근, 육경, 육식이 상호 필연의 관계가 성립되어 접촉을 시작함을 말한다. 곧 세가지 화합에 의해 촉이 일어난다.
촉(觸)도 위의 식, 명색, 육처와 같이 과거의 무명으로 인하여 유혹을 당하여 일어킨 업으로 말미암아 금생에 촉을 통하여 받는 고(苦)이다.
⑦수(受 Vedanā): 육경을 대상으로 하여 육근을 통하여 접촉에서 생기는 느낌이다. 좋다 나쁘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수(受)도 위의 식, 명색, 육처, 촉과 같이 과거의 무명으로 인하여 유혹을 당하여 일어킨 업으로 금생에 수(受)를 통하여 받는 고(苦)이다.
“행(行)”은 그 전생의 유(有)에 의하여 지배당하고 금생의 식, 명색, 육처, 촉, 수는 완전히 전생의 “행(行)”의 지배를 받는 다는 의미이다. 즉 아(我)의 의지 작용이 미칠 수 있는 영역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식이 청정하고 탁하고, 명색이 아름답고 추하고, 육입이 잘 생기고 못 생기고, 촉과 수가 있는 그대로 접촉하고 있는 그대로 느끼거나 못하거나 등은 완전히 유(有)에 지배당하는 영역이다.
⑧애(愛 trsnā): 즐거움을 추구하는 근본욕망, 즉 갈애(渴愛)이다. 번뇌가 일어나는 근본원인은 무명이지만 고(苦)의 직접적인 원인은 갈애이다. 갈애(渴愛)와 집착(執着)은 내생에 받을 과보를 짓는 금생에 일으키는 유혹이다. 과거의 업과 현재의 의지작용에 의하여 결정된다.
⑨취(取 Upādāna): 자기가 탐애하는 것에 집착하여 성취하려고 하는 마음이다. 이것도 내생의 과보를 짓는 요인인 금생에 당하는 유혹이다. 금생의 애(愛)와 취(取)는 과거세의 행(行)이 절대적인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그 영향을 아(我)가 자율적 의지 작용에 의하여 절제(節制)하고 나아가 극복할 수도 있고 절제를 하지 못하여 유전(流轉)할 수도 있는 것은 애와 취의 단계에서 일어난다.
금생의 애(愛)와 취(取)의 단계에서 자율적인 의지작용으로 참회하고 선업(善業)을 지어 전생의 행(行)이 가지고 있는 업장 소멸을 하고, 자아 발견을 위한 발심의 의지작용 등을 행사하여 미래를 위한 업유(業有)를 짓는다.  
⑩유(有 bhava): 업유(業有). 갈애하고 집착함으로서 갖가지 업을 만들어 미래의 결과를 만드는 의식(意識)의 활동. 곧 삶이다. 존재(存在)를 유지하기 위한 활동이다. 활동의 원인이 유혹인 애취(愛取)인 경우 곧 내세에 받을 과보의 원인인 업(業) 혹은 유(有)라고 한다.

● 내세상(來世)
⑪생(生 jati): 미래의 생(生)은 금생에 지은 선악의 업에 따라 육도사생(六道四生)2)의 어디엔가 태어난다. 이 생은 죽은 후에 오는 내세의 생이라 할 수 있고, 또 시시각각 나타나는 그 사람의 존재 발생이다.
현생에 지언 업의 결과로 미래의 고(苦)가 생, 노사 두 가지를 통하여 일어난다. 생(生)은 십이연기 중 식(識)에 해당하기도 한다.
⑫노사(老死 jara-marana): 내세(來世)에 늙어서 일생을 마침. 오온(五蘊)으로 이루어진 존재는 필멸하는 유위법(有爲法)이므로 노사(老死)는 필연과(必然果)이다. 금생에 지언 업의 과보를 내생에 노사를 통하여 받아야 하므로 노사는 고이다.
생(生)에서 시작하여 사(死)에 이르기까지 고(苦)가 연속되지만 노사(老死)에서 오는 고통이 한 인생에서 가장 심한 고(苦)이기 때문에 한 인생의 고(苦)를 대표하는 고(苦)라고 해석된다.
그리고 금생의 사(死)는 곧 내생의 생(生)이고 금생(今生)의 생(生)은 곧 전생(前生)의 사(死)라고 해석된다. 그러므로 사(死) 무명(無明) 행(行) 식(識)까지는 전생의 사(死)에서 금생의 생(生)까지의 전생(前生)의 단계를 분단(分段)한 것이라고 해석된다.  

나.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무명도 없고 또한 무명이 다함도 없으며 내지 늙고 죽음도 없고 또한 늙고 죽음이 다함까지도 없다.》

가) 무명과 본성과의 관계
 불교는 일종의 성선설적(性善說的)이라고 본다. 우리의 근본은 청정하나 습 또는 업에 의하여 물들어 졌다고 한다.

마명(馬鳴)보살 저(著) 대승기신론에 의하면
마음의 본성(本性)은 항상 망념(妄念)과 망상(妄想)을 떠나 있어 이름을 청정하고 변함이 없다 함이다. 하나인 진리(一法界)를 잘 알 지 못하므로 어느덧 그릇된 생각이 일어난다.  이 홀연히 일어난 생각을 이름하여 무명(無明)이라 한다.

 마명보살은 우리의 본성은 원래 청정하나 진리를 잘 모르는 탓으로 그릇된 생각이 일어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수행을 바르게 하면 다음과 같은 덕을 본다.

나) 수행을 통하여 진리에 통달하게 되면:
(공(空)가운데에서는)
무무명 無無明: 밝음을 그릇되게 보는 잠재적인 충동(無明)도 없으며
역무무명진 亦無無明盡: 무명이 다하여 밝음을 밝게 보았다는 생각마저 없으므로
내지 무노사 乃至 無老死: 드디어 늙음도 없고 죽음도 없으며
역무노사진亦無老死盡: 늙음과 죽음이 모두 없어졌다는 생각조차 없다.

  이 말씀은 십이인연법을 공부하고, 수행하고, 실천하여 얻어지는 참 이치[공공(空空)]를 밝힌 것이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연기의 정의와 그 의의를 알아보자.

다) 유전문(流轉門)과 환멸문(還滅門)
“무명도 없고 나아가 늙고 죽음도 없다”는 말은 바로 ‘무명에 연하여 행이 있다’고 하는 유전문(流轉門)의 이치도 없다는 것을 설하고 있다. 유전문(流轉門)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고통의 원인을 밝힘에 그 목적이 있으나 십이인연을 설함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고통의 원인을 밝힘에 그 목적이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문제는 현실적으로 있는 고뇌를 없애는 데 있다. 바로 십이인연을 뒤집어 고찰함에 의해서 자연히 깨달음의 세계를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반야심경』에서는 “무명이 다함도 없고 내지 늙고 죽음이 다함까지도 없다”라고 하여 ‘생이 없으면 늙고 죽음이 없다’고 하는 환멸문(還滅門)의 도리도 없다고 설한다.

『반야심경』에서 공(空) 가운데서는 십이인연도 본래 없다고 하는 이치를 알아 보고자 한다.

노사(老死)
《불본행집경》제12권에서는 부처님의 어린 시절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어느 때 고타마 싯달타 태자는 부왕과 함께 봄에 들녁에 나가 농부들이 밭갈이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한 농부들이 힘들어 하면서 소에 보습을 매어 밭을 가는데, 소가 가는 것이 늦어지면 때때로 고삐를 후려치기도 하는 것이었다. 그 사이에 농부도 소도 헐떡거리고 땀을 흘리며 괴로워했다. 그리고 보습에 흙이 파헤쳐지자 벌레들이 나왔으며, 뭇 새들이 다투어 날아와 그 벌레들을 쪼아먹었다. 이러한 현상을 본 태자는 모든 중생들에게 이런 일이 있음을 생각하고 신음하며 이렇게 말했다.

  “아아. 세간의 중생들은 극심한 괴로움을 받나니 곧 나고 늙고 병들고 죽음이며, 겸하여 가지가지 고뇌를 받으면서 그 가운데 전전하여 떠나지 못하는구나, 어찌하여 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하지 않고, 어찌해서 괴로움을 싫어하고 고요한 지혜를 구하지 않으며, 어찌해서 나고 늙고 병들고 죽음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기를 생각하지 않는가.”  

라고 한다. 우리는 이 『경』에서 싯달타 태자가 출가하는 최초의 원인을 발견하게 된다. 즉 자신을 포함한 일체 중생이 괴로움에 처해 있다는 사실과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의 모색이 출가를 단행하게 한 것이다. 고통 가운데 가장 큰 괴로움이 늙음과 죽음이기 때문에 다른 모든 괴로움도 이 늙음과 죽음의 괴로움에 포함되어 있다고 넓은 의미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죽음이 모든 것의 종말인 것 같지만 우리는 윤회하는 중생이라 생을 바꾸어 다시 똑같은 괴로움을 언제까지나 반복한다. 그렇다면 이 고통, 즉 늙음과 죽음을 일으키는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을 추구해서 얻은 부처님의 결론이 ‘태어남 생(生)’이다.

늙음과 죽음을 일으키는 원인은 물론 많겠지만, 그러한 가운데서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 태어나는 것이다. 만약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늙어 죽는 일은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생으로 말미암아 늙고 죽음이 있다’는 유전문(流轉門)이 설하여 지고, 늙고 죽는 고통을 없애는 방법이 태어남을 없애면 죽음은 저절로 없어진다는 환멸문(還滅門)이다.

생(生)
늙고 죽는 고통이 있게 된 원인을 추구해서 얻은 결론이 생(生), 즉 태어남이다. 그렇다면 생(生)이란 무엇인가? 바로 중생이 이 세상에 나오는 것이다. 중생 - 인간 짐승 곤충 등은 전혀 다른 생활을 하는가 하면 인간 가운데서도 남녀가 다르고 잘생기고 못생기고 훌륭한 가문에 태어나기도 하고 천한 가문에 태어나기도 하며, 건강한 신체와 정신을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신체적 결함과 정신병을 동시에 지니고 태어나는 사람도 있다. 스포츠에 남달리 뛰어난 자질을 가진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학문에만 몰두하는 기질의 사람도 있다. 즉 온갖 차별 속에 인간은 생(生)을 받는다. 그 가운데서는 빈부나 인종의 차별처럼 생(生) 그 자체를 고통으로 만드는 것도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생의 차별이 어찌하여 일어나는가? 부처님이 출세하기 전에부터 인도에서는 이 문제에 대하여 존우론(尊祐論) - 존우(尊祐)란 창조신(創造神), 숙명론(宿命論), 우연론(偶然論) 등이 있었다.

부처님은 존우론(尊祐論), 숙명론(宿命論), 우연론(偶然論) 등을 비판하고 연기론(緣起論)을 새롭게 제시하셨다. 이 연기론은 업(業)과 연에 대한 자발적 의지활동에 의하여 생(生)이 있다고 하는 논이다.

유(有)
생(生)이 있는 원인을 밝힌 것이 연기설이다. 십이연기설(十二緣起說)을 업감연기설(業感緣起說)이라고도 한다.

인간은 차별적으로 태어나고 거기에 따른 행∙불행이 있게 마련인데,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추구하여 얻은 결론을 경(經)에서는 ‘유(有)’라 설하고 있다. 즉 “유(有)로 말미암아 생(生)이 있다”고 설한다. 그렇다면 유(有)한 무엇인가?

중생의 생(生)은 단 한 번만의 삶이 아니고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로 연결되어 생(生)을 거듭한다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이것이 윤회사상(輪廻思想)인데, 여기에는 인간의 태어남 역시 창조신의 의지나 우연히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태어날 인연을 지은 결과임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렇게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경우, 그 태어나게 하고 나아가 생존을 존속시키는 힘을 ‘유(有)’라 한다.

이 유(有)를 다른 말로는 ‘업(業)’이라 부르는데, 업(業)이란 산스크리트 어 카르마(Karma, Karman)를 번역한 것으로 ‘행위’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업(業)은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행위와는 그 개념에 차이가 있다. 즉 어떤 행위를 했을 때, 그 행위가 끝난 뒤에 그것이 없어지는 것이 우리들이 생각하는 행위의 특색이지만, 그러나 생각해 보면 모든 행위에는 그것이 없어져도 무엇인가가 남아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남의 물건을 훔치는 행위는 훔치고 나면 없어져 버린다. 그러나 그것으로 도둑질의 행위가 없어져 버리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중요한 약속을 해도 그 약속의 말은 찰나에 사라지고 만다. 그러나 그 말은 보이지 않는 힘을 뒤에 남기고 있기 때문에 약속은 지켜야 하고 그렇지 못했을 때는 추궁을 받게 된다. 이와 같이 모든 행위 - 불교에서는 몸으로 짓고 입으로 짓고 뜻으로 짓는다고 한다 - 에는 보이는 부분[표업(表業)]과 뒤에 남아 보이지 않는 부분[무표업(無表業)]이 있는데, 이 양자를 합한 힘을 불교에서는 ‘업(業)’이라고 말한다.  

업(業)이란 것이 이렇게 중생으로 하여금 생존을 가능케하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유(有)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유(有)가 생(生)으로 혹은 생(生)의 존속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보면 천차만별이다. 사람들이 짓는 일체의 행위, 즉 업은 그것이 행해졌을 때에 반드시 거기에 상응하는 과보(果報)를 끌어당기는 힘을 낳기 때문이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업보(業報)라고 한다. 이 업보에는 일정한 법칙이 있는데, 초기 경전에서도 이것이 잘 표현되어 있다.

공중에 있어도 바다 속에 있어도,
산간의 동굴 속에 들어가도,
이 세상 어느 곳에 있더라도
악업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다.
                                《법구경》127게

그 어떤 업도 없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되돌아와 원래의 임자가 그것을 받는다.
어리석은 자는 죄를 짓고,
다음 세상에서 그 괴로운 과보를 받는다.
                                《숫타니파타》666게

업보에는 두 가지 원칙이 있는데, 첫째는 선(善) 혹은 악(惡)의 업이 행해졌을 경우에는 좋아하는 혹은 좋아하지 않는 과보가 필연적으로 생긴다고 하는 ‘업보의 물리적 필연성’이고, 둘째로 그 과보는 엄격하게 개체적이어서 한 개인의 행위적 주체에 귀착하는 ‘자업자득성(自業自得性)’이다.

이렇게 업보에는 두 가지 법칙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덕행(德行), 즉 이타적인 행위와 도덕적인 행위를 했을 때는 거기에 걸맞은 행복이 과보로서 나타나고, 반대로 악행(惡行)을 저지를 때는 불행의 운명을 맞게 된다. 그것도 철저하게 본인이 받는 것이어서 부모가 지은 업을 자식이 받는다던가 혹은 자식이 지은 업을 부모가 받는 등의 일은 있을 수 없다.

이렇게 보면 불교의 ‘업설(業說)’은 부처님이 배척한 숙명론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생길지 모른다. 그러나 지은 업(業)을 받는다는 면에서는 숙명이라고 할 수 있으나 주어진 업과 연을 어떻게 극복하고 새로운 업과 연을 어떻게 짓느냐는 것은 현재 주체의 자율적인 의지작용에 있다고 설하는 점에서는 숙명이 아니다.  

자기의 업을 개선해 나가는 의미에서도 역시 새로운 업을 짓는 것이므로 다음 세상에 태어나게 하는 힘이 유(有)고, 이 유(有)가 있는한 사람은 가령 죽어도 혹은 자살을 해도 허무에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어딘가에 몸을 바꾸어 태어나게 된다. 생사를 반복하면서 윤회의 세계에 중생을 묶고 가는 힘이 각자의 생존의 근저에 있는 유(有)이다.

유(有)는 업(業)으로 인하여 있기 때문에 업의 과보를 받으면 그것만으로 유는 감소하지만, 그러나 새로운 업을 짓는 것에 의해서 유의 힘은 보급된다. 따라서 업을 짓는 한 유는 소멸되지 않고 언제까지나 생존을 반복해 나가는 것이다.

취(取)
그렇다면 이렇게 생존을 반복해 나가는 원동력인 유(有)는 무엇으로 인하여 형성되는가? 이 유가 있게 된 원인을 탐구하여 발견된 것이 ‘취(取)’다. 여기서 말하는 취란 ‘취착(取着)’ 혹은 ‘집취(執取)’의 의미인데,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에서는 이것이 네 가지로 성립되어 있다고 설한다. 그 네 가지란 욕취(欲取)∙견취(見取)∙계금취(戒禁取)∙아어취(我語取)인데, 바로 이 네 종류의 취(取)로 말마암아 업을 짓고 유(有)가 축적되어 생(生)이 거듭되는 것이다.

욕취(欲取)
욕취(欲取)란 오욕(五欲)을 탐하여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오욕(五欲)이란 색욕(色欲), 성욕(聲欲), 향욕(香欲), 미욕(味欲), 촉욕(觸欲)이다. 이러한 욕망들은 좋은 것만을 추구하고 거슬리는 것은 거부하며, 항상 더 많은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만족할 줄을 모른다.

이 오욕의 근원인 오근(五根) 다섯 가지 감각기관을 제어함이 바로 수행이다.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 다섯 가지 감각기관을 제멋대로 놓아 버리면 인간의 욕망은 우리들의 현실생활에서 구체적으로 활동을 시작한다.

《대명삼장법수(大明三藏法數)》제24에서는 이 구체적인 욕망 활동의 형태를 역시 다섯가지로 나누고 있다. 재욕(財欲), 색욕(色欲), 식욕(食欲), 명욕(明欲), 수면욕(睡眠欲)의 다섯 가지를 말한다.

견취(見取)
견(見)에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견(見)이란 생각이라든지 견해 혹은 사상 종교적 신념이나 정치적 사상적 이데올로기 등이 모두 여기에 해당한다. 또한 죽은 후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고 하는 무견(無見), 자신이 사후에 상주한다고 하는 유견(有見), 인과의 도리는 없다고 하는 사견(邪見), 신체를 자기라고 보는 유신견(有身見) 등에 집착하는 것이 견취이다.

계금취(戒禁取)
올바르지 않은 계율이나 금제등이 열반으로 이끄는 올바른 길이라 생각하여 그것을 받드는 것. 외도(外道)의 계(戒)나 금지(禁止) 사항을 무상(無上)으로 생각하여 열반을 향한 뛰어난 계법이라고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아어취(我語取)
언어로 표현된 자아(自我)에 취착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들은 곧잘 ‘나’라는 말을 한다. 그러나 이 나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신체처럼 명료한 것이 아니다. 단지 우리들은 마음 가운데 어떤 것을 나라고 상정해서 그것을 언어로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언어로 표현된 자아가 그대로 실재한다고 집착하고, 거기에 따른 자기 것에 탐착한다. 여기에서 인간의 번뇌는 시작된다.

중생은 이상의 네 가지 취(取)에 의해서 업을 짓는다. 때문에 취가 있는 한 업은 계속되고, 유는 소멸되지 않는다. 이 까닭에 경에서는 ‘취로 말미암아 유가 있다’고 설하는 것이다.

애(愛)
앞에서 설명한 취가 어떻게 해서 존재하게 되는지를 탐구하여 얻은 것이 ‘애(愛)’다. 취를 소멸하면 생존의 고통은 그것으로 끝낼 수 있지만, 취의 배후에 이것을 지지하는 강력한 힘이 있기 때문에 취를 소멸하는 하는 것이 용이한 일이 아니다. 그 힘을 애라고 한다.

애(愛)에는 욕애(欲愛)∙색애(色愛)∙무색애(無色愛)로 나누는 것과 욕애(欲愛)∙유애(有愛)∙무유애(無有愛)로 나누는 두가지 설이 있다. 앞의 삼애 설은 삼계 중 어느 세계를 갈망하는가 하는 것으로 나눈 애고, 두 번째의 설은 욕망의 세계에서 갈망하는 것을 나눈 애(愛)이다. 욕망의 세계의 욕애(欲愛)는 남녀간의 애정을 비롯하여 재산∙명예∙식욕∙수면 등의 세속적인 모든 욕구를 말한다.

유애(有愛)의 유(有)란 존재를 말하는데 죽은 후 다음 세상에서는 행복과 쾌락이 많은 천상 등에 태어나고자 하는 욕구를 말한다.

마지막으로 무유애(無有愛)란 존재가 없다는 뜻으로 존재가 없는 허무를 갈망하는 욕구이다.

이렇게 인간에게는 여러 종류의 요망이 있지만 이것을 통틀어 애라고 부른다. 사실 우리들이 이성을 갈망하는 마음은 논리적으로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욕망의 근저에는 불만족성(不滿足性)으로서의 욕구가 도사리고 있다. 일반적인 욕망이나 집착은 충족되면 곧 소멸한다. 재물욕이든 성욕이든 명예욕이든 간에 자기가 처음 원했던 것이 이루어지면 사람은 일단 만족한다. 그러나 얼마 있지 않아 그것에 만족하지 못하게 되고, 나아가 더 큰 재산, 더 높은 지위를 바라는 욕망이 생긴다. 이처럼 인간으로 하여금 현상에 만족하지 못하게 하고 끊임없이 높은 것을 구하게 하는 욕망이 있다. 이 불만족을 느끼게 하는 속성이 불만족성이고 이것이 바로 갈애이다. 우리들의 마음은 이 갈애에 조종되어 움직이고 있다. 그 때문에 생존 자체가 고통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경에서는 ‘애로 말미암아 취가 있다’고 설하는 것이다. 이 말은 갈애를 멸하지 않으면 취는 없어지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러나 갈애를 멸하는 것은 용이하지 않다. 왜냐하면 다른 번뇌는 갈애의 도움을 받아서 일어나지만, 갈애 자신은 다른 번뇌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수(受)
그렇다면 애를 일으키는 원동력은 무엇인가? 이것을 탐구하여 발견한 것이 ‘수(受)’다. 수(受)란 감수작용으로 여기에는 고수(苦受)낙수(樂受)불고불낙수(不苦不樂受)의 세 가지가 있다. 즉 고통을 느끼는 작용, 즐거움을 느끼는 작용, 고통도 아니고 즐거움도 아닌 것을 느끼는 작용이다. 이 수는 비유하자면 잠을 깨우는 자극과 같은 것이다. 애는 번뇌의 상태이긴 하지만 수면과 같은 것이어서 어떤 자극이 없는 한 활동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수의 자극에 의해서 잠들어 있던 애가 그 잠에서 깨어나 활동을 시작한다. 따라서 수는 애가 생기는 계기를 마련하는 원인이라 할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고통의 직접적인 원인이라 할 수 있는 애를 멸하지 않아도 애를 잠에서 깨우는 수(受)가 작용하지 않으면 애는 현실화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수(受)에는 ‘영납(領納)’의 의미가 있다. 외계의 자극을 느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따라서 수(受)에 의해서 마음속의 인식이 일어나는 것이다. 때문에 수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은 비단 갈애만이 아니다.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심리작용이 수로 말미암아 일어난다. 그리고 애(愛)도 그러한 것들 가운데 포함된다. 그 까닭에 경에서는 “수로 말미암아 애가 있다”고 설한다.

촉(觸)
다음으로 이 수(受)는 무엇을 인연으로 하여 촉발되는가 하는 문제를 추구하여 얻은 것이 ‘촉’이다. 촉을 인연으로 해서 수가 생긴다는 의미다. 촉이란 ‘접촉하는 것’의 의미로, 여기에는 안촉(眼觸), 이촉(耳觸), 비촉(鼻觸), 설촉(舌觸), 신촉(身觸), 의촉(意觸)인 여섯 가지 종류가 있다. 이러한 여섯가지 접촉은 육근(六根)과 육경(六境)과 육식(六識)의 화합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다. 즉 처음의 눈의 접촉은 눈과 색깔과 형태와 눈의 인식이 화합에 의해서 생기고,  두 번째의 귀의 접촉은 귀와 소리와 귀의 인식이 화합하는 것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들이 사물을 인식하는 데는 무엇을 느끼는 수(受)보다 먼저 촉(觸)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시간적으로는 이러한 모든 것이 동일시간에 작용한다. 그리고 눈과 색깔과 형태와 눈의 인식의 세 가지가 있어도 촉이 그러한 것을 결합하지 않으면 인식은 일어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촉으로 말미암아 수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육입(六入)
그렇다면 외계와의 접촉은 무엇에 의해서 이루어지는가? 이것을 추구해서 얻은 것이 ‘육입’이다. 육입은 육처라고도 부르는데, 처라는 말이 장소 영역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여섯 가지 영역’이라는 의미가 된다. 안처(眼處), 이처(耳處), 비처(鼻處), 설처(舌處), 신처(身處), 의처(意處)이다. 눈의 영역이란 안구는 물론 시신경을 포함하고, 귀의 영역이란 고막 들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생각의 영역인 마음에는 눈으로 하는 안식을 비롯한 여섯 가지 인식이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육입은 눈 등의 여섯 가지 감각기관과 그 감각기관의 여섯 가지 대상과 여섯 가지 인식이 포함된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앞에서 말한 것처럼, “육입으로 말미암아 촉이 있다”고 설한다.

명색(名色)
그렇다면 이 육입(六入)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해서 있는 것인가? 이것을 물어서 발견한 것이 ‘명색(名色)’이다. 우리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인식론적으로 말하면 육입이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육입에 의한 인식이 가능한 것은 개체로서의 자신이 먼저 존재해야 한다. 즉 우리들이 마음과 육체를 가지고 살아 있다는 것이 육입이 활동하는 조건이다. 마음을 ‘명(名)’으로 표현하고 육체를 ‘색(色)’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경전에서는 “명색으로 말미암아 육입이 있다.”고 설한다.

식(識)
다음으로 명색(名色)은 무엇으로 인연하여 있는지를 탐구하여 얻은 것이 ‘식(識)’이다. 식(識)은 마음과 육체를 합일 시켜 생명을 일으키고 유지한다.

인간이 살아 있다는 것은 호흡을 한다든가 음식을 섭취한다든가 사유하는 등의 생리적 심리적인 영위를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오장육부를 비롯한 육체의 활동이나 심리활동의 밑바탕에는 이러한 잡다한 활동을 통일하고 있는 작용이 있다. 만약 이 통일의 작용이 없다면 우리들의 심신이 정연한 조화를 이루어 활동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가령 호흡이나 심장의 활동 등은 마음이 잠들어 있을 때도 쉬지 않고 계속되는데, 이러한 것은 모두가 인간의 모든 활동을 통일하는 것으로서의 식(識)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식(識)으로 말미암아 명색(名色)이 있다.”고 설하는 것이다.

행(行)
그렇다면 식(識)은 무엇을 인연으로 해서 있는가? 이것을 탐구해서 발견한 것이 ‘행(行)’이다. 행이란 말은 이 12연기설의 항목 외에도 삼법인(三法印)의 하나인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고 할 때의 행(行)과 오온(五蘊)의 하나인 행(行)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이 모두가 범어 상스카라saṇskāra의 역어(譯語)로서 위작(爲作) 조작(造作) 등의 뜻으로 해석한다. 즉 ‘만들어진 것’ 혹은 ‘지어서 만드는 힘’을 행이라고 한 것이다.

이 행(行)에는 신행(身行) 구행(口行) 의행(意行)의 세 종류가 있는데, 이것은 행(行)이라는 말이 업(業)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뜻한다.

위의 식(識)은 인식이나 판단을 하는 힘인데, 그 배후에는 그 사람이 가진 특유의 습관이 있다. 우리들이 식(識)에 의해서 사물을 인식하고 판단하는 것은 완전한 백지의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미 특유의 욕망이나 성격, 소질 등에 채색되어 거기에 움직여 판단한다. 가령 사냥이나 낚시를 하는 행위를 두고 어떤 사람은 살생이라고 죄악시하는가 하면, 또 다른 사람은 건전한 오락이라고 당연시 한다. 무엇 때문에 한 가지 사안을 두고 사람마다 이렇게 가치기준이나 판단이 다른가? 그것은 식(識)을 지배하는 습성(習性), 즉 업(業)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렇게 식(識)을 배후에서 조종하면서 개인적인 것으로 형성하는 힘이 행(行)이다. 그래서 “행(行)으로 말미암아 식(識)이 있다.”고 설하는 것이다.

무명(無明)
마지막으로 행(行), 즉 업(業)은 무엇 때문에 짓게 되는지를 고찰해서 발견한 것이 ‘무명(無明)’이다. 무명(無明)이란 ‘명(明)’이 없다는 의미로서, 여기서 말하는 명(明)은 지혜(智慧)를 뜻한다. 그러니까 지혜가 없는 것을 무명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무명의 보다 구체적인 의미는 단순히 올바른 지혜가 없다는 것뿐만 아니라,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미망(迷妄)에 덮여 있는 상태를 말한다. 이 미망성(迷妄性)은 맹목적이다. 가령 어떤 중생이든 간에 살고자 하는 의욕을 가지고 있는데, 그 살고자 하는 욕망은 어떤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맹목적인 욕구가 바로 무명이다.

우리들이 만약 그 무명심(無明心)을 바로 볼 수만 있다면 행(行)은 저절로 없어지고 생사의 고통도 사라진다. 그러나 무명을 확연히 본다는 것은 그렇게 용이하지 않다. 왜냐하면 무명은 일종의 꿈과 같은 것이어서 꿈을 꾸고 있는 상태에서는 그것이 꿈인 줄 모르기 때문이다. 꿈속에서는 꿈 그 자체가 절대적인 가치를 가지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무명에 의해서 마음이 미혹되어 있는 사이에는 무명의 미망성을 알 수 없다. 미혹되어 있는 상태에서는 무명을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는다.

우리들이 수행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만약 잠을 깨고 나면 꿈인 것을 알 듯이, 우리들이 어떤 수행을 통해서 무명을 발견한 때에는 무명은 없어지고 만다. 결국 무명이라는 것은 앎에 의해서 없어진다. 따라서 무명이 무엇을 인연으로 해서 생기는지를 더 추구할 필요가 없고, 12인연은 무명을 발견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다.  

이제『반야심경』에서 설하는 12인연도 없고 12인연이 다함도 없다는 이유를 설명할 때가 되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12인연은 생사의 고통을 없애기 위해서 그것이 발생하게 된 원인을 추구하여 마침내 무명을 발견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교법체계는 현상적인 인간 육신이 있다는 것을 가정하고 설한 의론이다. 그렇지만 공(空) 가운데는 그러한 어떤 법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조차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공성(空性)과 공상(空相)을 진솔하게 현현시킬 수 있는 중도(中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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