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무고집멸도 無苦集滅道 (사제법 四諦法)
    《고집멸도도 없다.》

오! 괴로움(苦)의 진리도 없고
이 괴로움의 원인(集)도 없으며
이 괴로움의 소멸(滅)도 없고
이 괴로움을 벗어나는 수행방법(道)까지도 없다.

(無 苦 集 滅 道)

  일반 범부에게는 괴로움도, 그 원인도, 그 원인을 소멸함도, 그 소멸하는 방법도 없다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본다. 그러나 앞 장에서 오온, 십이처, 십팔계, 십이인연이 있는 듯이 없음을 논하였다. 십이인연이 없음은 무명(無明)이 없음이다. 무명(無明)이 없으면 밝음이요, 밝음은 지혜 있음을 의미하므로 괴로움이 있을 리 없다. 괴로움이 없으므로 공(空)가운데는 사성제(四聖諦)가 없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또 한편 사성제(四聖諦)에 대한 고정관념이나 집착을 깨어버림으로서 진정한 사성제의 본래 참뜻을 살리고자 하는 의도로 사성제를 부정 할 수 도  있다고 본다.

가.  사성제의 중요성

경구절에 보이는 사성제의 중요성
① 모든 동물의 발자국 중에서 코끼리의 발자국이 가장 커 다른 모든 발자국을 섭수 하므로 제일이라고 하듯이 사제(四諦)는 모든 선법(善法)을 다 섭수 하므로 일체법중의 제일이다.1)
② 만일 세상에 해와 달이 출현하지 않으면 주야 사철 등의 구분도 없이 세상은 항상 어두워 암흑의 고통만이 계속되듯이 여래께서 세상에 출현하여 사제(四諦)를 말씀하시지 않았다면 세상은 마찬가지로 생사의 기나긴 밤의 어둠만이 계속할 것이다. 그러나 여래께서 세상에 출현하시어 사제를 말씀하셨으므로 기나긴 밤에 순일(純一)한 지혜가 밝게 비추고 있는 것이다.2)
③ 대의왕(大醫王)이 1)병(病)의 상태를 잘 알고 2)병의 원인을 잘 규명하여 3)병을 치료하되 4)다시는 재발하지 않도록 하는 사덕(四德)을 구비하여 환자를 치료하듯이 여래는 이 사성제를 사덕으로 삼아 대의왕으로서 생사의 모든 고(苦)를 치료한다.3)
④ 사제법(四諦法)을 여실히 모르면 생사에 윤회하여 종래 해탈을 얻지 못하나 만약 이 사제를 깨달아 완연히 알면 생사의 뿌리를 뽑아 다시는 윤회에 안 떨어진다.4)
⑤「내가 이 사성제(四聖諦) 삼전십이행(三轉十二行)5)을 닦지 않아 여실히 몰랐다면 나는 지금 위없이 바르고 참된 도 (無上正眞道)를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를 여실히 알아 무상정진도(無上正眞道)를 성취하였으며 아무런 의심도 남지 않게 되었다」6)
⑥「한 때 부처님께서 바라내국 선인주처(仙人住處)인 녹야원중에 계실 때 비구들에게 사성제를 평등하게 정각(正覺)한 것을 여래의 응등정각(應等正覺)이라 한다고 말씀하셨다.」7)

  위 ⑤와 ⑥항에서 사성제가 석존의 정각(正覺)의 내용으로 나와 있다. 십이연기를 설할 때는 십이연기가 석존의 깨달음의 내용이라고 하였다.   중복되는 느낌을 주지만 그 관계는 다음과 같다.

  연기법은 저 보리수 아래에서 샛별을 보신 후 부처님이 스스로의 이해(理解)나 실증(實證)을 위하여 관찰하신 내증(內證)의 사상체계(思想體系)가 연기법칙이며 이것은 타인에게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사성제(四聖諦)는 실증(實證)한 깨달음의 도리, 연기의 도리를 중생에게 이해시키기 위한 이론 체계를 갖춘 실천적 외향적(外向的) 체계가 고집멸도인 사성제인 것이다. 아래 ⑦-⑩항을 참조하기 바란다.

⑦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열어 신 후, 조용히 삼매에 드시어 법열(法悅)에 이렛동안 잠기시었다. 어느 날 갑자기 스스로 깨달은 이 연기(緣起)의 법이 심심미묘(甚深微妙)하여 중생들에게 설하여도 아마 이해시키지 못한 채 헛수고로 끝날 것이라고 생각하여 법을 설하는 것을 단념하고 그대로 세상을 떠나려고 하였다.8)

고생 끝에 겨우 겨우 얻은 이것을
어이 또 중생에게 설해야 될까?
오, 갈애(渴愛)와 노여움에 불타는 그들에게
이 법을 알리기란 쉽지 않으리

세상의 상식을 뒤엎은 그것
심심미묘(甚深微妙)하니 어찌 알리요
격정에 매이고 무명(無明)에 덮인 자(者)
그 어찌, 이 법을 깨달으리9)

⑧ 이 때 범천(梵天10))이 나타나 법을 세상 중생들에게 설하여 고(苦)의 불길로 불타는 불쌍한 중생을 제도해 주도록 간청하였다.

세존이시여, 청원하건대 법을 설하여 주시옵소서. 이 세상에는 마음이 티끌로 가볍게 가려진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은 법을 듣지 못한다면 더욱 고뇌의 삶으로 빠져들지 않겠습니까? 그들은 법을 듣는다면 필히 깨달음에 이름이 있을 것입니다.

⑨ 이렇게 간절한 청원을 들은 부처님은 세간을 살피고 중생들을 점검하여 보았다.
  중생들의 근기가 마치 연못 속에 온갖 색깔로 핀 연꽃과 같이 어떤 꽃은 흙탕물에 잠겨 있기도 하고, 또 어떤 것은 반쯤 물 속에 잠겨 있기도 하지만, 그러나 어떤 꽃은 완전히 흙탕물에 물들지 않은 채, 수면 밖에서 맑고 아름다운 연꽃을 피우고 있음을 살피신 부처님은 드디어 중생제도를 결심하게 된다.

내 이제 감로(甘露)의 문을 여나니
귀 있는 자(者)는 들어라, 낡은 믿음 버리고

⑩ 보리수 아래에서 부처님께서는 삼매에 드시어 중생제도의 방법을 고찰하기 위하여 몇 주 동안 계셨다. 그렇게 하여 구체화되고 체계화된 것이〈네 가지 고귀한 진리〉곧 사성제(四聖諦)이다. 즉, 타인에게 설하기 위한 연기설, 사성제가 준비된 것이다.
⑪ 근본경전을 통하여 초전법윤(初轉法輪)이 굴리어지기까지 연기(緣起)를 간단히 살펴본다.

  제일 먼저 선택되어졌던 사람은 부처님의 옛 스승이었던 아라라 카라마(ĀLāra-Kālāma)와 웃다카 라마풋타(Uddaka-Rāmaputta) 선인(仙人)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죽었음을 알게 되었다.

  다음에 선택되어진 사람은 부처님이 6년 동안의 고행을 하던 시기에 봉사해 주었던 다섯 비구들이었다. 그들은 베나레스의 녹야원(鹿野苑)에서 수도하고 있었다. 그들은 부처님이 오는 것을 보자 수도를 포기하고 타락한 자가 온다고 하여 「인사를 받아 주지 말며, 의발(衣鉢)도 받아주지 말자. 그러나 자리는 내어주자. 앉기를 원하면 앉게는 해야지」하고 서로 의견을 맞추었으나 막상 부처가 오자, 마중도 해주었고, 의발도 받아주었으며 발을 씻을 물도 떠 주었다고 팔리 율장 대품수계편에 기록되어 있다.

  그 중 한 명이 부처님을 부르기를 「벗, 고타마여」하며 친구에게 쓰는 호칭을 사용하자, 나는 이제 깨달음을 열고 부처가 되었으니 여래(如來)라 불러야 한다고 주의를 주며 다섯 비구를 향해 여래소설(如來所說)이라 불리는 첫 대기설법(對機說法)이 펼쳐지는 것이었다. 한역 아함경에는 전법윤경(轉法輪經)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초전법윤(初轉法輪)이다.

⑫ 초전법윤(初轉法輪)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고행(苦行)에 의해 깨달음을 얻고자 할지 모르지만, 몸을 괴롭히는 고행에 전심하는 것은 욕락(欲樂)의 생활에 빠짐과 같나니, 본래의 수행이나 깨달음에 하등의 도움도 되지 않는다. 올바른 깨달음의 길은 고행이나 욕망, 두 극단을 버리고 신심(身心)의 조화를 이루는 중도(中道)의 방법에 의하는 것만이 가능하다. 나는 이 두 가지 극단(極端)을 버리고 중도를 깨달았으니, 진실로 동요하지 않는 경지에 도달한 부처가 되었다. 중도(中道), 이것은 눈을 뜨게 하고 지혜를 생기게 하며, 적정(寂靜)과 증지(證智)와 등각(等覺)과 열반(涅槃)을 돕는다.11)」
⑬ 이와 같이 말씀하신 후 곧 사성제(四聖諦)의 가르침을 펴시었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고(苦)의 성제(聖諦)이다. 마땅히 알아라. 생(生)은 고(苦)다. 노(老)는 고(苦)다. 병(病)은 고(苦)다. 사(死)도 고(苦)다. 또 미워하는 자와 만나는 것도 고(苦)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도 고(苦)이고, 구(求)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고(苦)이고 또한 심신(心身)이 조화를 이루지 못함도 고(苦)이니 이 삶은 고(苦) 아닌 것이 없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고(苦)의 원인(原因)의 성제(聖諦)이다. 마땅히 들어라. 즉, 갈애(渴愛)를 따르기 때문에 또한 즐기는 성품이 있게 되어 자신이 좋아하고 탐심(貪心)하는데 따라 이곳 저곳 환희(歡喜)하는 집착(執着)이 그것이니, 그것에 욕애(欲愛), 색애(色愛), 무색애(無色愛)가 있다.」
  「 비구들이여, 이것이 고(苦)의 멸진(滅盡)의 성제(聖諦)이다. 마땅히 들어라. 이것은 갈애(渴愛)를 남김없이 소멸하고, 그것을 버리며 거기에서부터 벗어나고, 그것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고(苦)의 멸진(滅盡)에 이르는 길의 성제(聖諦)이다. 마땅히 들어라. 성스러운 여덟 가지의 도(道)가 그것이니, 정견,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正見, 正思惟, 正語, 正業, 正命, 正精進, 正念, 正定)이다.」12)

  위의 부처님 친설(親說)에도 드러나듯이 고성제, 고집성제, 고멸성제, 고멸도성제(苦聖諦, 苦集聖諦, 苦滅聖諦, 苦滅道聖諦)를 〈네 가지 고귀한 진리〉즉, 사성제(四聖諦)라 불러지고있다.

이상으로서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어 신 후 사성제(四聖諦)를 친히 말씀하실 때까지의 과정을 적은 초기 경전을 열람하였다. 우리들은 이 열람을 통하여 사성제의 중요성을 파악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중도와 사성제가 부처님의 첫 법문이라는 것만으로도 사성제의 가장 중요한 의의(意義)를 찾아 느낄 수 있다. 이제 사성제 하나 하나의 뜻을 해설하고자 한다.

나. 사성제(四聖諦)의 해설

가) 고성제(苦聖諦): 경에는:
  「비구들이여, 이것이 고(苦)의 성제(聖諦)이다. 마땅히 알아라. 생(生)은 고(苦)다. 노(老)는 고(苦)다. 병(病)은 고(苦)다. 사(死)도 고(苦)다. 또 미워하는 자와 만나는 것도 고(苦)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도 고(苦)이고, 구(求)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고(苦)이고 또한 심신(心身)이 조화를 이루지 못함도 고(苦)이니 이 삶은 고(苦) 아닌 것이 없다.」

라고 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사고(四苦), 팔고(八苦)로 알려진 우리 중생의 고통의 대표적인 것이고 부처님께서 출가하신 목적이 이들을 해결하기 위함 이였다.

사고(四苦): 태어남이 극락왕생이라면 문제는 다르겠지만 무명(無明)등의 업인(業因)으로 육도(六道)의 윤회 중에 태어났으니 고(苦)가 아닐 수 없는 것이며(生苦), 그러나 청춘을 하늘 높이 받들면서 즐겁게 살려고 하나 이 몸은 어느 덧 늙어감에 괴롭지 않을 리 없으며(老苦), 그러는 중에도 단순히 늙어 가는 것만이 아니라 때를 불문하고 병마(病魔)가 찾아와 심신(心身)을 괴롭히니 이 또한 괴로움이 아닐 수 없으며(病苦) 그리하여 결국은 한 많은 인생을 끝내게 되니 이 어찌 괴로움이 아니랴(死苦).

  팔고(八苦): 그러는 중에도 또한 원수지고 미워하는 자와는 만나게 되니 이도 괴로움이요(怨憎會苦), 좋아하고 사랑하는 자와는 헤어지게 되니 이도 괴로움이요(愛別離苦), 구하려고 하나 얻지를 못하니 이도 괴로움이다(求不得苦), 몸과 마음의 조화를 이루고자 하나 몸과 수상행식(精神)이 각기 치성하게 놀므로 조화가 깨지니 이도 괴로움이다(五陰盛苦).

  이것은 우리가 중생으로서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늘 경험하고 체험하고 있는, 누구에게나 공통된 현실의 양상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고통의 진리라 하여 고성제(苦聖諦)라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하루라도 빨리 이 괴로운 중생으로서의 탈을 벗으려면 의사가 병을 고치려면 병의 양상을 정확히 알아야 하듯이 우리들 각자의 구체적인 고(苦)의 현실 상을 올바르게 알아야만 할 것이다.

  이것을 연기설(緣起說)에 대하여 본다면 고(苦)란 무명(無明) 등의 업인(業因)에 따른 현실적인 과보(果報)이니 고성제(苦聖諦)란 십이연기설의 순관(順觀)에 입각해 있는 상태이며 삼법인설(三法印說)로 본다면 일체개고(一切皆苦)에 해당하는 것이다.

나) 고집성제(苦集聖諦): 경에는:
  「비구들이여, 이것이 고(苦)의 원인(原因)의 성제(聖諦)이다. 마땅히 들어라. 즉, 갈애(渴愛)를 따르기 때문에 또한 즐기는 성품이 있게 되어 자신이 좋아하고 탐심(貪心)하는데 따라 이곳 저곳 환희(歡喜)하는 집착(執着)이 그것이니, 그것에 욕애(欲愛), 색애(色愛), 무색애(無色愛)가 있다.」라고 되어있다.

괴로움이 있으면 그 괴로움에 대한〈원인〉을 알고자함이다. 의사가 병인을 정확히 알아내어야 정확한 처방을 할 수 있듯이 우리도 그 고(苦)의 원인을 각자가 정확하게 알아내어야 한다. 우리는 그 원인을 인과법에 의하여 찾아내고자 한다. 어떠한 고(苦)의 현상에도 반듯이 그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이 괴로움이 있음은 반드시 저 원인이 있으므로 있는 것이고 이 괴로움이 일어난 것은 반드시 저 원인들이 연기하였으므로 일어난 것이다. 이 괴로움은 저 원인에 의한 필연적 결과이므로  그 원인을 정확하게 규명하여야 한다는 진리를 고집성제(苦集聖諦)라고 한다. 이 괴로움의 원인은 어떠한 업에서, 그 업은 어떠한 집착에서, 그 집착은 어떠한 갈애에서, … 어떠한 육체와 정신에서, 그 육체와 정신은 어떠한 식에서, 그 식은 어떠한 전생의 업과 무명이 원인이다. 그리고 그 괴로움이 어떠한 욕애(欲愛), 색애(色愛), 무색애(無色愛)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 욕애(欲愛)에 대해 경에는:

「중생은 실로 애욕의 내육처(內六處)가 있다. 안처, 이처, 비처, 설처, 신처, 의처(眼處, 耳處, 鼻處, 舌處, 身處, 意處)가 그것이다. 이 중에 애욕이 있고 때가 있고 물듬이 있고 집착이 있으면 이를 집(集)이라고 한다.」라고 되어 있다.    

눈, 귀, 코, 혀, 몸, 뜻의 여섯 가지 감각 기관이 빛깔, 소리, 냄새, 맛, 접촉, 법에 접하였을 때,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이 일어나 접촉하고 오온(五蘊) 즉, 색(色)에 대한 수, 상, 행, 식(受想行識)의 작용이 애욕의 때가 묻어 집착하므로 인하여 괴로움이 있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 근본을 따지면 전생에 지은 업(業)이고 전생에 지은 업은 무명(無明)에서 기인(起因)하는 것이다. 원인은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연기설의 범위 안에 있음을 알게 된다. (12연기설 참조). 무명이란 제행무상(諸行無常)과 제법무아(諸法無我)의 도리를 알지 못하여 오욕낙(五欲樂)과 사견(邪見)을 절제하지 못하고 좋하여 집착하는 업을 짓는 어리석음이다.  

  고집성제(苦集聖諦)는 현실고(現實苦)의 원인을 규명한 것이다. 십이연기설로 본다면 순관(順觀)의 원리에 해당하고, 삼법인설(三法印說)로 본다면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일체개고(一切皆苦)의 도리를 아직 여실히 모르는 것이라 하겠다.

다) 고멸성제(苦滅聖諦): 경에는:
   「비구들이여, 이것이 고(苦)의 멸진(滅盡)의 성제(聖諦)이다. 마땅히 들어라. 이것은 갈애(渴愛)를 남김없이 소멸하고, 그것을 버리며 거기에서부터 벗어나고, 그것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이라 하였다.

고(苦)의 원인을 알았으면 그 원인을 멸하였을 때의 진리가 고멸성제이다. 이 원인이 멸하였을 때의 구체적인 경의 말씀은:

  「중생은 실로 내육처(內六處가 있다. 안처, 이처, 비처, 설처, 신처, 의처(眼處, 耳處, 鼻處, 舌處, 身處, 意處)가 그것이다. 해탈하여 물들지 않고 끊어버리어 애욕을 없애면 이를 고멸이라고 한다.」라고 되어있다.

  우리는 한시라도 빨리 고(苦)의 근원을 뽑아 없애 육근(六根)을 청정히 하여 해탈의 삶, 열반의 삶을 길이 누리도록 해야겠다. 멸성제는 곧, 열반의 삶, 이상(理想)을 향한 노력의 과보(果報)이다. 십이연기설(十二緣起說)로 본다면 환멸연기(還滅緣起)인 역관(逆觀)의 결과에 해당하고 삼법인설(三法印說)로 본다면 열반적정(涅槃寂靜)에 해당한다.

라) 고멸도성제(苦滅道聖諦): 경에는:
   「비구들이여, 이것이 고(苦)의 멸진(滅盡)에 이르는 길의 성제(聖諦)이다. 마땅히 들어라. 성스러운 여덟 가지의 도(道)가 그것이니, 정견,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正見, 正思惟, 正語, 正業, 正命, 正精進, 正念, 正定)이다.」라고 하였다.

  위의 가.⑫항 초전법윤(初轉法輪)에서 부처님이 중도를 설하신 후 이차(二次) 설법에서 ⑬항의 사성제를 펴셨다고 하였다. 초전법윤에서 인연법이 중도이고 그 중도행(中道行)이 팔정도임을 설하셨고, 이차(二次) 설법에서 사성제의 고멸도행(苦滅道行)으로서 팔정도를 설하였다. 그러므로 팔정도(八正道)의 수행법은 연기법의 중도를 성취하는 수행법인 동시에  고(苦)의 멸진(滅盡)에 이르는 길인 고멸도성제(苦滅道聖諦)의 수행 법이다. 연기법이 부처님의 깨달음의 내적(內的) 표현이라면 사성제는 그 깨달음을 논리적으로 체계화하여 외적으로 표현하여 교화하기 위한 실천 행이기 때문에 동질의 것이 다르게 표현된 것에 불과하다. ⑫, ⑬항을 참조하기 바란다. 팔정도가 의미하는 바를 하나하나 알아보기로 한다.

  팔정도(八正道)의 팔(八)은 여덟 가지라는 뜻이고, 정(正)은 중정(中正), 진정(眞正), 중도(中道)의 완전한 수행 법이라는 뜻이고, 도(道)는 성인(聖人)이 되는 도(道)라는 뜻에서 쓴 것이다.

팔정도(八正道)가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팔정도는 정견, 정사,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이라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대답이다. 이렇게 대답하면 팔정도와 나와의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 팔정도는 내가 바로 사는 여덟가지 덕목이다. 혹은 내가 행복하게 사는 여덟가지 덕목이다라고 알면 나와 가장 깊은 관계가 성립한다. 행복하게 살기[정명(正命)] 위해서는 바로 보고[정견(正見)] 바로 살 수 있는 직업[정명(正命)]을 가져야 한다. 바로 보기 위해서는 바로 생각하고 바로 말하고 바로 행하여야 한다. 바로 생각하고 바로 말하고 바로 행하기 위해서는 보시, 지계, 인욕, 정진 바라밀이 따라 주어야 한다. 바른 직업을 갖기 위해서는 자기 생명의 방향 감각을 세우는 내세관이 명석하여야 하고(正命), 그 내세관(正命)을 직업을 통하여 성취하기 위하여 바른 직업을 선택하여(正命), 정정진 정념 정정하여야 한다. 이와 같이 할 때 괴로움이 없는 현세를 이루어 행복하게 살다가 내세관에 따라 내세(來世)를 임(正命)할 수 있게 될 것이다.

① 정견(正見): 바르게 보는 지혜이다.  우리 중생들은 이 세상의 이치를 바르게 보지 못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은 이런 것이다, 아니 저런 것이다. 세상은 이런 것이다, 아니 저런 것이다 하며 각자의 그릇된 견해를 내세워 반목 질시하고 또 그에 따라 그 나름대로의 그릇된 행동을 함으로써 생사에 윤회하는 고해를 지어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괴로운 존재의 위치에서 벗어나 열반의 세계에 이르고자하는 의욕이 있다면 우선 우주 인생의 진리를 진리 그대로 바르게 보고 바르게 아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성제의 고, 집, 멸, 도를 바르게 아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이 지혜가 정견(正見)이다. 정견(正見)에는 반드시 긍정적으로 볼 줄 아는 지혜가 따라야 한다.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있어서도 가정에서나, 사회생활에서나, 직장에서나, 사업상에서나 모든 일과 그 이치를 바로 볼 줄 아는 지혜가 가장 우선적으로 필요한 요건이라 하겠다. 지혜인 정견이 있기 위해서는 오온(五蘊) 중 수∙상(受想)이 청정하여야 하고 수상이 청정하기 위해서는 전생에서 가져 온 업이 청정하여야 한다. 이것을 우리는 청정한 마음이라고 한다. 청정한 마음을 가지기 위해서는 무명(無明)을 소멸하여 식(識)을 맑게 하여야한다. 식을 맑게 하기 위해서는 정사(正思), 정어(正語), 정업(正業)을 하여야 하고, 정사(正思), 정어(正語), 정업(正業)을 하기 위해서는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바라밀을 간단없이 행하여야 한다. 정견(正見)은 육바라밀의 지혜에 해당한다.

② 정사(正思): 정사유(正思惟)라고도 한다. 바르게 생각한다는 말이다. 즉 바르게 안 바를 바르게 생각하라는 뜻이다. 바르게 생각하기 위해서는 사혜(思慧)가 있어야 하고 사혜(思慧)가 있으면 자신에게 닥치는 모든 일에 대하여 긍정적 사유(思惟)를 할 수 있다. 정견이나 정사는 선입견이나 편견이 없고 공평 무사하게 보고 생각하라는 것이다. 이 생각(思)은 오온(五蘊)의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중 상(想)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바른 생각을 하기 위해서는 바른 느낌(受)이 있어야 한다. 바른 느낌이 있기 위해서는 맑은 식(識)이 있어야 하고, 맑은 식이 있기 위해서는 전생에서 지은 업이 맑아야 하고, 그 업을 맑게 하기 위해서는 보시, 지계, 인욕 정진을 간단없이 하여야 한다. 신구의(身口意) 삼업중에는 의업(意業)에 해당한다. 의업(意業)에는 탐, 진, 치로 인한 업을 바르지 못한 업으로 본다.  

③ 정어(正語): 바르게 말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마음속의 생각을 밖으로 표현함에 말과 몸으로써 하는데 몸으로써의 행위보다는 말로써의 행위가 앞선다. 바르게 생각한 바를 바르게 말하라는 것이다. 오온, 색, 수, 상, 행, 식에서는 행(行)에 해당하고 삼업중에는 구업(口業)에 해당한다. 거짓말, 비단 같은 말, 이간하는 말, 독한 말이 바르지 못한 구업이다. 정직한 말, 사랑스런 말, 위로하는 말, 두 사람을 화합시키는 말, 부드럽고 다정한 말로 하라는 것이다. 우리들이 이러한 말을 하고자 하여도 잘 되지 않는다. 잘 되지 않는 이유는 앞에서와 같이 전생에서 지은 업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업을 소제하기 위하여 부단히 보시, 지계, 인욕, 정진을 하여야 한다. 오온(五蘊)의 순서로 보면 바르게 느껴야 바른 생각을 하게 되고 바른 생각을 해야 바른 말이 나오므로 바른 느낌(受)이 일어날 수 있는 소지(素地)가 중요하다. 그 소지는 청정한 마음, 때묻지 않은 마음이다.

④ 정업(正業): 바른 행동을 하라는 뜻이다. 원래 업이란 신, 구, 의 삼업을 의미하나 의업과 구업은 이미 위에서 논하였으므로 신업(身業)이라고 하는 것이다.  신업은 몸 혹은 행동으로 짓는 업이다. 살생이나, 도둑질, 음란한 행위가 바르지 못한 몸으로 짓는 업(身業)이다. 전생에 지은 악업(惡業)을 청정하게 하기 위해서는 보시, 지계, 인욕, 정진을 부단히 행하여야 한다. 오온에서는 행에 해당한다. 행에는 말로 하는 행과 몸으로 하는 행이 있다.

⑤ 정명(正命): 바르게 생활한다는 의미로 일반적으로 해석합니다만 생활 보다 명(命)을 유지하기 위하여 필요한 활동, 즉 직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직업은 명(命)을 유지하기 위한 필연적인 업(業)이지만 직업이 곧 명(命)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명(命)은 직업에 비교 될 수 없는 깊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명(命)은 생명 혹은 목숨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이 명(命)은 전생(前生)에서부터 이어온 명(命)입니다. 전생의 몸은 이 몸이 아니지만 명(命)은 전생의 명과 금생의 명이 같은 명이라는 것입니다. 같은 명(命)이기 때문에 전생에 지은 업의 과보를 금생에 받는 것입니다. 전생에 지은 업의 과보 중에서 가장 귀중한 과보가 직업상의 과보가 되겠습니다. 전생에 좋은 직업을 가지고 열심히 살았으면, 금생에도 좋은 직업을 가지고 열심히 살겠지만, 전생에 특별한 직업 없이 전전하던 사람은 금생에도 특별한 직업 없이 전전할 것입니다. 그리고 금생에 특별한 직업이 없으면 내생에도 특별한 직업이 있을 리 없습니다. 아이가 어떤 분야에 소질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어린 시절에 모두 나타난 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합니다.

내생에 고통 없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자기의 소질이 어떤 분야에 있는지를 심사숙고하여 그 분야의 직업을 택하여 정진하여야 합니다. 불교는 차선(次善)에 만족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항상 최상(最上)을 그 목표로 합니다. 부처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셨다는 것만으로도 무상(無上)이 아니면 안됩니다. 다만 무상(無上)한 행복을 꼭 금생에 취하겠다는 욕심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뿐입니다. 꾸준하게 끝임 없이 정진하여 몇 생을 통하여서도 훌륭한 직업을 가지고 구경에 무상한 행복을 성취하고야 말겠다는 서원과 서원에 수순(隨順)하는 행(行)이 있습니다.

전생에도 금생에도, 몸을 받을 때, 자랄 때, 그리고 모든 생명활동을 할 때, 반드시 연(緣)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명(命)의 수∙애∙취(受愛取)는 연(緣)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주어진 연(緣)의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보은(報恩)하는 업(業)은 내생에 좋은 연을 받을 수 있는 복(福)을 짓는 일입니다.

여성(女性)의 경우, 요즈음 남자들과 같이 직업 전선에서 활동하시는 분도 많이 계십니다. 이러한 분들은 위와 같은 직업의식을 가지시면 되겠습니다. 그리고 특별한 직업에 종사하시고 있지 않는 여성(女性)들은 미적(美的) 감각을 정명(正命)을 위한 직업으로 삼아야 합니다. 여성(女性)의 최상(最上)의 무기는 아름다움입니다. 여성(女性)은 자기의 미(美)를 목숨 걸고 개발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아름다움을 사(事)에 비유하면, 아름다움의 리(理)는 심성(心性)입니다. 내 몸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나의 심성을 아름답게 하여야 하고 심성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서는 아름다운 것을 볼줄 알고, 아름답게 생각할 줄 알고, 아름답게 말할 줄 알고, 아름답게 행동할 줄 알아야 합니다.

각자가 종사하는 직업에서 성공하여 자유롭고 평화롭고 행복하기 위해서는 직업에 관계된 모든 일 그리고 그의 생명활동에 관계된 모든 일들을 바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바로 볼 줄 알기 위해서는 항상 바로 생각하고 바로 말하고 바로 행동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바로 보고, 바로 생각하고, 바로 말하고, 바로 행동하기 위해서는 항상 보시 지계 인욕 정진 바라밀을 행하여야 합니다.

생명활동 중 가장 중요한 직업 활동은 내생을 위한 직업 수준을 위하여 생명을 걸고 정진하고 정진은 확실한 신념이 있어야 하고 확실한 신념은 정정(正定)을 낳게 됩니다.

이와 같은 정명(正命)의 뜻을 바로 살리기 위해서는 새로운 의미 부여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첫째 신앙적인 생활, 둘째 가정생활, 셋 째 직업상의 생활, 네 째 사회생활 등으로 볼 수 있다.

  생활상에는 바른 신앙생활을 통하여 자기 생명의 바른 방향 감각과 자기의 생활상에서 닥치는 모든 문제에 대한 바른 가치판단의 기준이 확립되어 있어야한다.

  가정생활상에는 〈가정은 가족 각자의 생명력의 소생 처요 모든 가족의 행복의 원천(源泉)이요 연기중도 신앙의 수행 처이다〉라는 가정생활관이 바르게 실천되어야 한다.

  직업상의 생활에서도 직업에 대한 내세관을 명확히 세우고 명(命)을 건 투철한 직업 의식을 가져야 한다. 투철한 직업의식이라 함은 직업을 향한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을 필수로 하는 직업의식이다. 그리고 직업생활과 사회생활은 가정생활의 연장이면서 가정생활에 포용되고 가정에서 다시 확산되는 관계에 바르게 놓여야한다.  

⑥ 정정진(正精進): 바르게 노력한다는 말이다. 정명(正命)의 생활이 내세(來世)를 향하여 끝없이 이어짐을 정정진이라고 한다. 육바라밀의 정진(精進)에 해당한다. 제 1장에서 설명한 〈바라밀다〉는 이 세상의 생사를 뛰어 넘어 열반의 세계에 도달하기 위한 정진이라고 하였다. 정진은 ‘설산 동자 이야기’에서 ①구도(求道)라고 하는 신앙의 목표가 뚜렷이 걸려 있다. ②정진에는 아상(我相)이나 아만(我慢) 등 분별심이 없어야 함을 보이고 있다. ③구(求)하고자 하는 목표를 위하여 자기 명(命)을 받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④항상 상대가 원하는 것을 무엇이고 베풀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⑤신의(信義)를 지켜야 한다. ⑥내세관(來世觀)이 명확하여 쉼 없이 항상 최선을 다하여야 한다. (제 1장의 8쪽 참조)

⑦ 정념(正念): 바르게 일념(一念)으로 전념(專念)한다는 말이다. 자기의 정명(正命)과 관련 된 12연기를 철저하게 염(念)하는 마음이다. 정념(正念)을 하기 위해서는 반야바라밀을 성취할 원이 있어야 한다. 반야바라밀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부처님의 법신이 우주에 충만하므로 나 자신에게도 부처님의 법신이 내재(內在)하고 있음을 알고 믿어야 한다. 이 법신을 믿기 위해서는 불법승(佛法僧) 삼보에 대한 의미를 알고 확신을 가지고 일념으로 정진하여 정명(正命)을 성취하도록 하여야 한다.  초발심의 일념에 전념함으로서 변정각(便正覺)한다고 한다.

⑧ 정정(正定): 정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조금도 마음에 동요가 없이 완전히 안정된 일심삼매(一心三昧)를 말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바르면 마음이 안정되지 않을리가 없다. 마음에 아무런 산란함이 없는 것을 정정이라고 한다. 정념(正念)을 방해하는 모든 번뇌들을 정념으로 평정함으로서 정정(正定)이 가능하다. 정념(正念)에서 잡념(雜念)이 생기는 잘못에 대한 부끄러워하는 마음과 참회하는 마음이 항상하여야 잡념을 제(除)하고 정념을 이룰 수 있다. 정념(正念)의 극(極)에서 선정(禪定)을 이룬다. 육바라밀의 선정(禪定)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정정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정정은 다시 정견(正見)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이 팔정도는 시작과 끝이 따로 없이 입체적으로 수행되어야 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상으로서 우리들은 「바르다」고 표현한 「정 正」자의 바른 내용은 「중도 中道」임을 알아야겠다. 따라서 「중도의 이치로 바로 보는  것이므로 정견(正見)」이요, 「중도로 생각하는 것이므로 정사 正思」요, 「중도로 말하는 것이므로 정어 正語」요, 「중도를 행하는 것이므로 정업 正業」이요, 「중도로 생활하는 것이므로 정명 正命」이요, 「중도의 생활을 계속하자는 것이 정정진 正精進」이요, 「중도만을 일념으로 하자는 것이 정념 正念 」이요, 「중도로 직접 체득하자는 것이 정정 正定」인 것이다. 팔정도의 모든 행은 전부 중도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팔정도를 실천적 중도 행이라 할 수 있다.  

  중도에 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하므로 중도의 원리와 중도의 실천으로 나누어 설명하고자한다.

다. 중도(中道)

가) 중도의 원리

  우리는 위에서 모든 만유는 홀로 존재할 수 없고 모든 요소들이 인연따라 만나고 흩어지는 것이므로 우리는 인연소생이라고 하였다. 인연소생(因緣所生)의 법칙을 연기법이라고 하고 이 법칙의 균형이 바르게 지켜지는 것을 중도라고 부른다. 흔히 중도를 이것과 저것의 중간이나 혹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제삼자를 연상할 지 모르나 결코 그런 것은 아니다.

  모든 현상계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난다.〉는 상의성(相依性) 관계에 있기에 어떤 고정된 실체가 있거나 항상 됨이 없이 인연으로 모였다가 인연이 다하면 흩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것도 따로 독립되어 존재할 수는 없다. 제법은 무아(無我)이고 제행은 무상(無常)이다. 무아(無我)이고 무상(無常)이기 때문에 모든 것은 인연생기(因緣生起)할 수 있는 것이다.

  나무도 풀도 사람도 그것은 엄연히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무라는 것, 풀이라는 것, 사람이라는 것도 그것은 결코 독립적이고 영원한 존재는 아니다. 불변의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불변의 실체라고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풀이든지 나무이든지 사람이든지 간에 다른 일체의 도움도 없이 홀로 독립되어 언제까지나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런 것은 어디에도 없다. 모든 것은 끊임없는 인연으로 끊임없이 생멸 변화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무다 풀이다 사람이다 하는 것은 어떠한 인연의 결합상태를 그것과 다른 인연의 결합상태와 구분하여 부르는 명칭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 세계에 있는 모든 존재는 무아(無我)이고 무상(無常)한 것이다.

무아(無我)이고 무상(無常)이면 모든 법(法)은 무(無)에서 끝나버리는 것인가.  모든 현상은 무아(無我)이고 무상(無常)이기 때문에 아무 것도 없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연을 만나 새로운 모습으로 인연생기하며 존재하고 있다. 이 원리를 깨달아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능동적으로 활용하면 좋은 효과를 얻을 것으로 본다. 이 원리를 우리는 비유비무(非有非無), 비상비단(非常非斷)이라고 표현한다. 비유비무(非有非無)란 현실의 있는 물건은 홀로 존재할 수 있는 것(有)은 없다(非). 비유(非有)이면 없는 것(無)이 아니냐? 없는 것(無)은 아니다(非), 새로운 연으로 생하는 것이 있다. 이 과정을 간단히 표현하여 비유비무(非有非無)라고 한다. 비상비단(非常非斷)이란 만물의 어느 현상도 항상 변하지 않는 것(常)은 없다(非). 항상 함이 없다면 끝나는 것(斷)이냐? 아니다 끝나는 것(斷)이 아니라(非) 새로운 연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이 과정을 비상비단(非常非斷)으로 표현한다.  그렇다고 하여 유무(有無)를 떠나서 비유비무(非有非無)를 따로 세우고 상단(常斷)을 떠나서 비상비단(非常非斷)을 따로 세워서도 안 된다. 유(有)와 무(無), 상(常)과 단(斷)은 어디까지나 동시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 비유비무(非有非無), 비상비단(非常非斷)의 도리를 우리는 중도(中道)라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설하는 것을 중도설(中道說)이라고 한다. 이것은 연기로부터 얻어진 결론으로 우주 인생의 실상(實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연기 즉 중도라고 하기도 하는 것이다.

성철스님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고 한 것은 위에서 설한 비유비무(非有非無), 비상비단(非常非斷)과 같고, 색불이공(色不異空) 공불이색(空不異色)과 같이 실상(實相)의 세계를 의미하고, 숭산스님의 “산은 푸르고 물은 흐른다”고 하는 것은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 의미하는 실용(實用)의 세계이다. 이 실용(實用)의 세계가 참다운 중도(中道)하고 하였다.

실상(實相)의 세계도 중도(中道)라고 하고 실용(實用)의 세계도 중도(中道)하고 하면 어느 것을 믿고 따라야 하느냐고 물을 수 있다. 도리(道理)로는 둘다 맞지만, 범부에게는 실용(實用)의 세계가 맞는다. 왜냐하면, 실상(實相)의 세계 비유비무(非有非無), 비상비단(非常非斷)이 중도라고 하는 근거는 실상의 세계 즉 비유비무(非有非無)를 성취하면 반드시 자발광(自發光)이 비추어 스스로 실용(實用)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실용(實用)을 언급하기 않았을 뿐이다. 이것을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금강경에서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이라고 표현하였다. 즉, 실상(實相)에서 자동적으로 실용(實用)을 일으키는 마음이 일어 나게 됨으로 실용(實用)은 언급할 필요 없고, 실상이 중도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상근기(上根機) 중생에게 해당되는 설이라고 생각된다. 하근기(下根機) 중생은 특히 수행 초기에는 의도적으로 자신을 실상(實相)에서 실용(實用)으로 이끌어 가는 공덕을 쌓아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이 공덕을 많이 쌓아 무량공덕장(無量功德藏)을 이룬 후에야 실상(實相)에서 실용(實用)으로 가는 노력 없이도 저절로 자발광(自發光)이 비추어 실용(實用)의 중도가 펼쳐질 것이다. 이 때가 되면 실상(實相)인들 필요할까? 실상(實相)도 필요 없으므로 법계는 공하다고 한다. 그러므로 공(空)한 가운데에서는 아무것도 없어도 실상(實相)이 연기하여 실용의 세계가 자연적으로 펼쳐지고, 이렇게 펼쳐지는 세계가 중도라는 것이다. 즉 인간의 이기적인 마음에서 만들어지는 것은 어떠한 것도 참다운 중도가 아니다.

  우리와 관계된 입장에서 중도설을 설명하면 우리는 세계와의 상의성(相依性) 관계 속에서 나를 찾되 나로서의 개성을 잃지 않고 나의 개성을 잃지 않는다고 하여 세계와의 상의성 관계를 저버리지 않아 나를 온전히 살리고 그리하여 이 모든 우주 인생을 청정하게 장엄해 나가야 할 것이다 (涅槃寂靜). 원시경전에는 이 중도 행이 팔정도로서 나타나 있다. 그러면 중도 행으로서의 팔정도란 어떤 것인지 알아보자.  

나) 중도(中道)의 실천(八正道)

  부처님이 이차(二次) 설법때 사성제를 설하시면서 고(苦)를 멸하는 도성제(道聖諦)로서 팔정도를 설하였음은 위에서 논하였다. 이제 순서는 바뀌었지만 부처님이 초전법윤(初轉法輪)에서 중도를 설하실 때 중도행(中道行)으로서 팔정도를 설하셨음을 소개하고자 한다.

  당시 인도의 사회상을 간략히 살펴본다.

① 당시 인도에는 브라만교가 인도사회를 지배하는 종교였다. 우주에 브라만(범 梵)이 있어 브라만(범)은 일체 현상계의 근본 원리이며 동시에 우주를 창조하고 지배한다. 인간의 생명의 근원과 우주의 근본 원리인 브라만은 그 본질 면에서 같은 것(범아일여 梵我一如)이라고 한다. 우주의 창조자가 존재하고(항상) 있고 ‘나(我)’ 가 있고, 창조주가 사성계급을 창조하였고, 유가(瑜伽 Yoga) 선정(선정 Dhyāna)으로 해탈한다고 믿는 종교이다. 그러므로 범천(梵天)은 유아(有我), 유상(有常)을 종지로 하는 종교이다.
② 일반 사상계에서는 육사외도(六師外道)를 비롯하여 62견(見), 363견(見)이나 되는 많은 사상이 난무하고 있어 사상적으로 혼란한 시기였다. 그 들 중 우세한 것은 적취설(積聚說)이었다. 적취설은 지, 수, 화, 풍의 어떤 실체인 요소들이 합쳐져서 이루어진 것으로 그 요소가 흩어지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는 사상이다. 이는 유물론(唯物論)과 같은 사상이다. 인간의 모든 고통의 원인은 정신보다도 육체에 있다고 하여 육체의 욕구에 순응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강압적으로 고행수행(苦行修行)함으로서 소멸하려 하였다. 적취설은 요소의 실체를 인정하기는 하나 모였던 요소들이 흩어지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고 믿었기 때문에 결국은 극단적인 무아(無我) 무상(無常)에 치우쳐 무견(無見) 단견(斷見)으로 허무에 빠져 방황(彷徨)하는 수행자가 많아지게 되었다.  

  인도사회에 이와 같이 유아(有我)와 유상(有常)을 믿는 종교와 더불어 사상적으로 너무 다양하여 혼란한 시기에 부처님께서 정각(正覺)을 이루시고 연기법에 의한 비일비무(非一非無, 비상비단(非常非斷)의 중도설을 설하셨다. 이것을 부처님의 처음 설법이라고 하여 초전법윤(初轉法輪)이라고 한다. 경에 의하면: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고행(苦行)에 의해 깨달음을 얻고자 할지 모르지만, 몸을 괴롭히는 고행에 전심하는 것은 욕락(欲樂)의 생활에 빠짐과 같나니, 본래의 수행이나 깨달음에 하등의 도움도 되지 않는다. 올바른 깨달음의 길은 고행이나 욕망, 두 극단을 버리고 신심(身心)의 조화를 이루는 중도(中道)의 방법에 의하는 것만이 가능하다. 나는 이 두 가지 극단(極端)을 버리고 중도를 깨달았으니, 진실로 동요하지 않는 경지에 도달한 부처가 되었다. 중도(中道), 이것은 눈을 뜨게 하고 지혜를 생기게 하며, 적정(寂靜)과 증지(證智)와 등각(等覺)과 열반(涅槃)을 돕는다.13)」

  「비구들이여, 무엇을 여래가 증지하고 눈을 뜨게 하고 지혜를 생기게 하며 적정, 요지, 정각, 열반에 이르는 것을 돕는 중도라고 하는가. 이것은 성스러운 여덟 가지의 도(道)라하는 것이니 그것은 곧 정견,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正見, 正思惟, 正語, 正業, 正命, 正精進, 正念, 正定)이다. 이것으로 열반에 이름을 돕는 중도라 하느니라.」고 하셨다.14)

  이상으로서 우리는 부처님께서 정각(正覺)을 이루신 후, 첫 법문에서 중도를 설하셨다. 중도를 성취하는 수행으로서 팔정도를 말씀하셨고, 이차 설법에서 사성제(고집멸도)를 설하셨다. 사성제의 고를 멸하는 도로서 팔정도를 설하셨다. 부처님의 두 법문에서 비친 부처님의 뜻은 우리들의 모든 고통을 소멸하기 위해서는 연기의 중도를 성취하여야 하며 그 중도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팔정도를 수행하여야 함을 우리들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중도를 의미하는 선사(禪師)들의 법어:
〈불사선(不思善) 불사악(不思惡) 할 때 너는?〉

육조 혜능 (六祖慧能)스님의 법어이다. 선과 악을 여의었을 때 너의 진면목인 중도를 정등각(正等覺)할 수 있다는 법문이다. 이것은 실상(實相)의 세계를 의미하고 실용으로 끌어 올리기 위하여, “차나 한잔 하십시요.”라고 대답할 수 있다.

〈말하여도 30봉(棒) 말하지 않아도 삼십봉 때리니 족히 일러라〉
라고 하신 덕산(德山)스님 역시 중도의 실상을 깨치게 하기 위하여 제자들에게 호령하신 것이다. 이 법어(法語)도 위의 것과 같다.

「 불성은 있는 것도 아니며 없는 것도 아니니, 또한 있는 것이며 또한 없는 것이니 있는 것과 없는 것이 합하는 까닭에 중도라 한다.
佛性 非有非無 亦有亦無 有無合故 名爲中道15)」

「이치(理)와 일(事)이 자유로워 걸림이 없으며, 일(事)과 일(事)이 상즉상입(相卽相入)하여 일즉일체(一卽一切)이고 일체즉일(一切卽一)이어서 원융(圓融)하여 걸림이 없는 법계를 이룬다.
理事無碍 事事無碍法界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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