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결과, 소득, 효용)
   無罣礙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일체의 걸림이 없으므로
마음의 두려움이 없으며
마침내 뒤바뀐 꿈같은 세상을 멀리 여의어서
문득, 더 나아갈 수 없는 열반에 든다.

1)  심무가애(心無罣礙)
  첫 째, 마음에 걸림이 없음이 실천을 통하여 이루어[行成]지는 소득    산스크리트어(語)로는 아시타야라나(acittāvarana)이다.
「아 a」는 부정(否定)하는, 없는, 무(無)의 뜻이다.
「시타 citta」는 생각, 사념, 마음, 심(心)이다.
「야라나 avarana」는 덮개, 장애, 구속 등을 의미한다.

한역의 「가掛 혹은 가罣 」는 건다, 거리끼다의 뜻이다.
「애碍 혹은 애礙」는 지장, 장애, 방해한다는 의미이다.
「가애(罣碍 혹은 掛礙)」는 걸림이 있어 지장이 있다는 뜻이다.
「가애(罣碍) 걸림이 있어 지장이 있다」라는 것은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의 이장(二障)으로 말미암아 걸림과 지장이 있다는 의미이다.  

  번뇌장의 번(煩)은 몸이 어지럽고 번다함을 말하고, 뇌(惱)는 마음이 산란함을 말하는데 지혜로운 마음을 덮어 버리고 장애 하는 기능을 한다고 해서 장애(障碍)라는 별명을 갖게 됐다. 이 장애는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번뇌로, 번뇌의 작용은 제7말나식(第七末那識)의 미망(迷妄)으로 인하여 근본번뇌로 작용한다.

  소지장(所知障)이라 하면 아는 것이 우리의 본래 성품을 가로막아 구속함이니, 바로 지적(知的)오염을 의미한다. 사상, 주의, 신앙, 철학, 종교, 학문이 우리의 본래면목을 가리는 것을 가리킨다. 잘못 습이 들었거나 알고 있는 불교가 오히려 장애가 되는 수가 있다. 이러한 것이 소지장에 해당한다.

  「심무가애(心無罣礙)」는 유무(有無), 생사(生死), 선악(善惡) 취사(取捨) 등 대립되는 관념에서 한쪽으로 치우친 변견(邊見)에서 오는 번뇌이므로 망념(妄念)이라고 규정한다. 한쪽으로 치우친 견해는 삶의 구속으로 접어들어 무명을 부르며 생, 노, 병, 사, 우, 비, 고, 뇌(生老病死憂悲苦惱)를 부르고 인간성의 상실로 가는 순서로 된다. 이와 같은 고뇌는 나의 지혜를 밖에서 덮어씌워서 생긴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착각이 자기를 구속하고 덮는 것이다. 이 「마음」, 이 「나」는 밖에서 오는 무엇으로도 구속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밖이라 지칭되는 것은 우리의 관념이지 밖에는 아예 한 물건도 올 것이 없으며 우리 자신, 이 「나」가 밖이고 곧 안이어서 실제 밖이 없다. 그래서 내외명철(內外明徹) 상적상조(常寂常照)하다고 표현한다.

마음에 걸림이 없고 장애가 없으면 육체적인 병고(病苦)의 원인과 외력의 침해를 받을 원인이 소멸된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의 병도 육체적인 병도 없는 자재로운 몸과 마음이 된다.

  실로 우리는 이 자리에 그냥 있지만, 자기를 상실하고, 구속하고 번민하고 할뿐이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의 삶을 속박하고 우리의 본래면목을 가리는데, 이 착각적인 현상에서 「참나」를 찾음이 견성(見性)인 것이다. 상대되는 두 대립을 쌍차(雙遮)후 실상본지(實相本地)에서 살펴보면 모두가 공(空)하여 무소득의 소득을 맛보게 되고 마음이 비사유(非思惟)의 차원에 머물 수밖에 없게 된다.

무수히 일어나는 망념이 저 스스로 일어나고 사라졌을 뿐, 한치도 이 진면목은 떠나 있지 않았고 또한 장애받지 않았음을 문득 깨닫는 것이 돈오(頓悟)라 한다.

  실로 이 자리는 원래 우리의 자리여서 새삼스러이 닦아야 할 것도 없다. 그래서 돈오하면 돈수될 뿐이다.

  돈오란 착각적인 장애 현상에서 바라밀 본지가 오롯이 현전됨을 말한다.

  그러므로 실로 우리의 마음은 가애(罣碍)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애초부터 중생이 아니었다. 이와 같이 「마음에 걸림이 없음」은 능관이익(能觀利益)중 첫 번째 이익으로 서, 보리살타가 반야의 실천을 함으로서 이루어지는 이익이다.

여기에서 “관자재보살 행심 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 개공도일체고액”이 성취되는 것이다.

2)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둘 째, 장애를 끊는(斷障) 소득]
    無罣礙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고 뒤바뀐 헛된 생각 멀리 떠나

   두 번째의 소득으로 장애를 끊음이다. ‘걸림이 없으므로’란 앞의 걸림이 없다는 말을 받아서 뒤의 장애가 끊어진 해탈의 경계를 일으켜 준 것이다. ‘두려움이 없다’는 것은 밖으로 악한 무리 [魔]나 적대세력[寃]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는 것이니, 객관의 잘못된 조건들이 사라짐이다. ‘뒤바뀐 헛된 생각 멀리 떠난다’는 것은 안으로 본질을 전도시키는 허위의식의 장애가 없음이니, 현실을 소외시키는 주체적 요인이 다함이다.

  본질을 전도시키는 허위의식은 존재의 있는 모습이 연기된 것인 줄 모르고 꼭 있는 것으로 집착함으로써 형성된 개념과 의식의 고정화이다. 의식의 고정화가 사물의 실상을 다시 닫혀진 것으로 붙들어 버리고, 의식의 오염을 가중시킨다. 보디사트바는 존재의 모습이 모습 아님을 통달함으로써 의식의 오염을 벗어나고, 일상 경험활동 속에서 의식의 고정화를 지양함으로써 존재의 연기적 역동성을 억압하지 않는다. 보디사트바는 생각에서 생각을 떠남으로써 존재의 모습을 모습 아님으로 지양하고, 생각 없음에서 생각 없음마저 떠남으로써 존재의 새로운 연기 생성을 주체화한다.

  반야행에 서 있는 보디사트바는 이처럼 억압된 문명과 규정된 사회체제가 늘 꼭 그렇다 할 것이 없는 줄 요달함으로서 그것을 꼭 그러함으로 규정해 내는 집단적 허위의식을 부정하고 억압된 문명, 대립과 갈등의 역사를 해탈과 번영의 역사로 끌고 간다.

  그러므로 보디사트바는 지금 나의 삶을 소외시키는 왜곡된 문명 속에서 그것의 공성(空性)을 통달함으로써 온갖 얽매임과 두려움을 벗어나고, 외적 세계와 사물들의 있는 모습에 갇힌 뒤바뀐 허위의식과 없음을 없음으로 규정하는 허무의식을 넘어 현실 역사를 떠나지 않고 현실의 장애와 질곡 가운데서 해탈과 자유를 구현해 간다.

3)  구경열반(究竟涅槃) [세 째, 열반을 얻음(得果)]
     문득, 더 나아갈 수 없는 열반에 든다.

  세 번째는 열반을 얻음이다. 열반이란 범어 니어바나(Nirvāna)의 음역으로 번역하여서는 적멸(寂滅), 멸도(滅度), 원적(圓寂), 적정(寂靜) 또는 멸(滅)이라고만 쓰기도 한다. 이렇게 보면 열반이나 적정은 같은 뜻이 된다. 그리고 원래 니어바나(Nirvāna)란 말은 〈불어서 끈다(吹滅)〉든지 혹은 〈불이 꺼진 상태〉를 나타내는 정도의 말이었는데 이 말이 불교에 흡수되어서는 모든 번뇌의 속박에서 해탈하고 미혹의 생사를 초월하여 불생불멸을 체득한 불교 최고 이상의 경지를 나타내는 말로 심화되었다.

  열반을 경에서는 어떻게 정의하는지 알아본다.

  질문을 하는 사람은 염부차(閻浮車)라 하는 사리자(舍利子)의 옛 친구이며 대답은 바로 부처님의 제일 제자 사리자이다.

“사리자여, 열반, 열반하는데 도대체 열반이란 무엇인가?”

“벗이여, 열반이란 탐욕의 소멸, 성냄의 소멸, 어리석음의 소멸, 이 일체의 번뇌가 영원히 다하는 이것이 바로 열반이라 한다.”

“그렇다면 그 열반을 실현할 방법이 있는가? 있다면 어떻게 하여야하는가?”

“벗이여, 있다. 바로 팔정도가 그것이다. 곧 올바른 견해, 올바른 마음씨, 올바른 말, 올바른 행위, 올바른 생활, 올바른 노력, 올바른 생각, 올바른 정신통일이다.”1)

  니어바나(Nirvāna)가 〈불이 꺼진 상태〉이므로 그 반대는 〈불이 타고 있는 상태〉가 된다.  <불>을 탐진치 삼독에 비유하므로,〈불이 타고 있는 상태〉란 탐, 진, 치 삼독이 치성함으로 인하여 번뇌가 극심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번뇌의 영원한 멸진이라 함은 바로 양쪽에 치우친 변견(邊見)을 막는 곧 비유비무(非有非無)의 쌍비(雙非)하고 쌍차(雙遮)되는 진공의 심청정(心淸淨)을 말하며, 또 양변에 치우친 견해를 막는다 하면 결국 자리(自利)를 말함이니, 이제 곧 심광명(心光明)의 묘유(妙有)가 성스러운 덕으로 사방을 두루 비추게 될 따름이다.

  이 열반은 적극적이며 활동적인 실생활과는 둘이 아님이 대승사가(大乘師家)들에 의해 논의되었다. 이곳은 참으로 영원하고, 즐겁고, 깨끗한 곳이며 온갖 성덕(聖德)을 갖추어 자발광(自發光)하는 곳이며, 진공묘유(眞空妙有)이며 자리이타(自利利他)의 강력한 곳임을 말하고 있다.

  여기에 구경열반을 <이렇게 이렇게 하여 마침내 열반에 이른다>하는 식의 열반에 이르는 경로 혹은 결국 열반에 이를 수밖에 없는 어떤 원인의 결과로 구경열반이라 경전에 쓰여진 것이 아니다. 모두 결국 문득 알고 나면 자기가 있는 그 자리가 구경열반이고, 더 나아갈 수 없어서 머물지 않는 열반을 지칭하여 무주처열반(無住處涅槃)이라 한다.

  구경열반(究竟涅槃)에 대한 남양 혜충국사의 말씀을 <반야심경삼주(般若心經三注)>에서 살펴본다.
  혜충스님이 이르기를 마음에 만약 생기는 것이 있으면, 곧 없애야 할 것이 있게 되고, 마음에 본래 아무것도 생기지 않는 다면 실로 없애야 할 것이 가히 없다. 생길 것도 없앨 것도 없는 것을 이름하여 열반이라한다. 구(究)란 것은 <다한다>는 뜻이고 경(竟)이란 것은 <마친다: 盡>는 뜻이다. 과거, 현재, 미래에 이어지는 티끌 같은 망념이 본래 생기지도 멸하지도 않았음을 아는 까닭에 구경열반(究竟涅槃)이라 한다.

  원효스님의 <열반경종요(涅槃經宗要)>2)의 말씀을 인용한다.
  열반의 도는 도가 없으면서도 도 아닌 것이 없고, 머무름이 없으면서도 머물지 않음이 없다. 그러므로 이 도는 지극히 가까우면서도 지극히 먼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도를 증득한 사람은 그지없이 고요한 동시에 또한 그지없이 시끄럽다. 그지없이 시끄러우므로 팔성(八聲)을 두루 떨쳐 허공을 다니면서 쉬지 않고, 그지없이 고요하므로 십상(十相)을 멀리 떠나 진리의 끝과 하나가 되어 담연하다. 지극히 멀기 때문에 가르침을 따라 가면서 천겁을 지나도 이르지 못하고, 지극히 가깝기 때문에 말을 잊고 찾되 한 찰나에 스스로 만난다.

  이 경은 불법의 큰 바다요, 대승(方等)의 비밀창고이며, 그 가르침은 측량하기 어렵다. 실로 넓고 탁 트이어 가이없고 매우 깊어 밑이 없다. 밑이 없기 때문에 다하지 않음이 없고, 가이없기 때문에 갖추지 않음이 없다.

  여러 경전의 부분을 통합하여 온갖 흐름을 일미(一味)로 돌아가게 하고, 지극히 공정한 부처님의 뜻을 열어 모든 사람이 서로 다른 의견을 내세워 다툼을 화해시킨다. 이리하여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사생(四生)을 무이실성(無二實性)으로 돌아가게 하고, 오랜 잠에서 꿈꾸는 중생들을 한결같이 대각(大覺)의 극과(極果)에 이르게 한다.

  극과(極果)의 큰 깨달음이라 함은 실성(實性)을 체득하여 마음을 잊는 것이고, 무이실성(無二實性)이라 함은 참된 것과 거짓을 섞어서 하나로 만든다는 것이다. 이미 둘이 없으니 어찌 하나가 있겠으며, 진망(眞妄)이 섞여 있으니 어느 것이 진실이겠는가.

  이것이 이치와 지혜를 모두 잊어버리고, 이름과 뜻이 아주 끊어진 것이니, 이것을 열반의 그윽한 뜻이라 한다. 다만 모든 부처님이 그것을 증득하고서도 그 자리에 머물지 않되, 응하지 않음이 없고, 말하지 않음이 없으니, 이것을 열반의 지극한 가르침이라 한다. 그러나 그윽한 뜻이면서도 한번도 고요한 적이 없었고, 지극한 가르침이면서도 한번도 말 한적이 없었다. 이것을 이치와 가르침의 일미(一味)라 한다.

  『팔천송반야경』「초품」은 보디사트바의 니르바나가 정체된 관념의 신비가 아니라 나와 너, 이것과 저것의 모순 속에서 모순이 공한 중도를 체달함으로써, 현실의 모순을 해탈의 관계로 전환시키되, 전환하는 행에도 또한 머물지 않는 창조적인 행 자체임을 이렇게 말한다.

  수보리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보디사트바가 크나큰 장엄을 발한다고 말씀하시는데 무엇을 크나큰 장엄을 발한다고 하십니까.’

  부처님께서 대답하셨다. ‘보디사트바는 내가 응당 한량없는 아승지 중생을 구제하리라고 생각하되 중생을 구제하고서는 구제한 중생이 없다. 왜 그런가. 모든 법의 참모습이 그렇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환술사가 네거리에서 환술로 사람을 만들어 그 환술로 사람의 목을 자른 것과 같으니 어떻게 생각하느냐. 거기 상처를 입거나 죽은 자가 있겠는가.’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디사트바도 이와 같아서 한량없는 중생을 제도하지만 모두 제도하고 나서는 실로 제도한 중생이 없는 것이다. 만약 보디사트바가 이러한 일을 듣고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으면 이 보디사트바가 바로 크나큰 장엄을 발한 줄 알아야 한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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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반야심경]목차 및 본문 file 여해 2007.02.27 12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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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반야심경](부록)묘법연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 - 나. 게송부분 해석 여해 2007.03.01 10974
29 [반야심경](부록)묘법연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 - 가. 산문부분 여해 2007.03.01 1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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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반야심경]3.2 수행의 경계 -2)연기의 정의와 의의 - (1)삼법인 여해 2007.03.01 10940
18 [반야심경]3.2 수행의 경계 -1)공의 참모습 즉, 진리의 세계 - (4)무무명역무무명진... 여해 2007.03.01 12442
17 [반야심경]3.2 수행의 경계 -1)공의 참모습 즉, 진리의 세계 - (3)무안계내지무의식계 여해 2007.03.01 9921
16 [반야심경]3.2 수행의 경계 -1)공의 참모습 즉, 진리의 세계 - (2)무안이비설신의... 여해 2007.03.01 10717
15 [반야심경]3.2 수행의 경계 -1)공의 참모습 즉, 진리의 세계 - (1)시고공중무색무수상행식 여해 2007.03.01 11571
14 [반야심경]3.1 관찰되는 경계 -2)만물이 비어 있는 모습 - (3)불생불명, 불구부정, 부증불감 여해 2007.03.01 11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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