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화경]제3 비유품

2007.10.26 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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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법연화경 제2권

제3 비유품

지난주에는 방편품을 마치고 91쪽「제2권, 3. 비유품」을 105쪽까지 독경하였다.
그 내용은 오랜 옛적에 사리불이 부처님회상에 있을 때 모든 보살이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았지만 부처님께서 자기에게는 수기를 주지 않으셨다. 이 때 그는 여래의 한량없는 지혜를 잃었다고 한탄하며 슬퍼하였다.
그는 숲 속에서 혼자 나무 아래서 앉거나 경행을 하는 중에서도 「나에게도 저 수행자들과 똑같은 불성(佛性)이 있지 않은가, 부처님께서 설하시는 소승법(小乘法)은 내가 이미 오래전에 깨달았던 것이 아닌가. 내가 이미 다 아는 법을 설하시기만 하시고 더 높은 법을 설하시지 않으시더니 어찌 내가 수기 받은 대중에 끼일 수 없었단 말인가. 이제 나는 32상 80종호, 십력(十力) 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을 모두 잃었단 말인가. 그러면 부처님의 아들로서 무루법(無漏法)에 들 수도 없고, 미래세에 무상법문도 할 수 없단 말인가」라고 낙심하고 실망하며 부처님을 원망하고 의심하였다. 그러다가 어느 날 홀로 산책하던 중에 부처님께서는 수많은 중생들에게 이익이 되는 법을 설하시는데 내 이 이로운 법을 놓친 것은 내가 나를 속인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다. 같은 법문을 듣고 다른 사람들은 이익을 받았는데 어찌하여 나는 이익을 받지 못하였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주야로 이와 같이 생각하던 중에 부처님께서 많은 대중들을 칭찬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이제 나는 나의 지위(地位)를 잃었는가? 잃지 않았는가? 생각하며 부처님을 뵈면 꼭 여쭤봐야 되겠다고 생각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자기 잘못을 찾으려고 수 없이 고민하기도 하고 스스로 견책하기도 하면서 많은 세월이 지나 이제 부처님을 뵙게 되니 사리불은 뛸 듯한 환희심에 넘쳤다.    
사리불이 부처님께서 하시는 법문을 듣고 부처님께서는 근기 따라 법문을 하시나 듣는 사람의 근기 따라 같은 법문이 소승이 될 수도 있고 대승이 될 수 있다는 이치를 깨닫게 되었다. 그는 과거에 부처님께서 하시는 법문을 들을 때 ‘왜 부처님께서 같은 법문을 되풀이하시는가? 나는 그것을 이미 다 알고 있는 법인데’라고 생각하였다. 이 생각에 가리어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참 뜻을 알지 못하면서 다 안다고 생각했던 것을 깨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부처님께서 소승법을 설하시는 것이 허물이 아니라 그를 이해하지 못했던 자기의 과거에 허물이 있었음을 깨닫게 되고, 부처님께서 그 때 이러한 생각에 묶여있는 사리불을 보셨기에 자기에게 부처님께서 수기를 주시지 않은 것이 당연하였다고 생각하게 되니, 자기를 몰라준다고 부처님을 의심하고 슬퍼하고 낙심하였던 지난날이 모두 자기의 잘못된 생각에서 일어난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중생의 근기 따라 설하시는 법은 곧 방편법임을 깨닫게 되었다. 이리하여 과거에 자기가 깨달았다고 생각했던 것은 참된 깨달음이 아닌 것도 알게 되었다.
이와 같이 잘못을 깨닫고 마음의 문이 열려 있는 사리불을 부처님께서 보시고 성문들에게 묘법연화경 대승경을 설하는 것이라 하시며 이는 보살들을 가르치는 법이며 부처님께서 보호하시는 경이라 하셨다.
그리고 사리불에게 가이없는 겁을 지나면서 여러 천만억 부처님께 공양하고 바른 법을 받들어 지니며 보살이 행할 도를 구족하여 마땅히 성불하리니, 이름은 화광여래, 응공, 정변지, 명행족, 선서, 세간해, 무상사, 조어장부, 천인사, 불세존이리라. 라고 수기를 주셨다.
그리고 화광부처님의 세계와 수명을 수식하셨다.

지난주에는 「제2권, 3. 비유품」105쪽 5장 ‘화택을 비유하시다’에서 129쪽까지 독경하였다.
그 내용은 사람이 탐진치 삼독으로 말미암아 영적, 정신적, 육체적인 세계가 오염되어 부패(腐敗)되어 가는 것이 마치 불난 집에서 아이들이 놀이에 빠져 있는 것과 같다. 사람이 눈, 귀, 코, 혀, 몸, 뜻, 육입(六入)의 향락에 물들어 생로병사(生老病死), 우비고뇌(憂悲苦惱), 탐진치(貪嗔癡)로 마음의 세계가 부패되어 가는 것을 모르니 결국 지옥에 떨어지게 될 것이, 마치 불난 집에 살고 있는 아이들이 노는 데 정신이 팔려 밖으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으니 결국 불에 타 죽을 것과 같으니, 아이들의 아버지께서 아이들을 살려나올 방편을 연구하셨다.
아이들이 장난감을 좋아하니 사슴이 끄는 수레, 양이 끄는 수레, 소가 끄는 수레가 문밖에 준비 되어 있다고 외쳐 아이들이 자기들이 좋아하는 수레를 가지려고 불타는 집 밖으로 뛰어 나왔다. 그리하여 그들은 화난(火難)을 면하게 되었다. 그들은 화난을 면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고 아버지에게 수레가 어디 있느냐고, 수레를 달라고 보챘다. 아버지께서는 흰 소가 끄는 수레, 모든 진귀한 보배로 장식한 찬란하고 아름다운 수레를 아이들 각자에게 하나 씩 나누어 주니 아이들은 좋다고 이를 타고 놀았다고 했다. 그리고 양이 끄는 수레는 성문승(聲聞乘)에, 사슴이 끄는 수레는 연각승(緣覺乘)에, 소가 끄는 수레는 보살승(菩薩乘)에, 그리고 흰 소가 끄는 수레는 일불승(一佛乘)에 비유한 것이라고 설명하셨다.
이 장에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점 몇 가지를 들어 보이고자 한다.
1) 우리가 살아가면서 알게 모르게 짓는 육입(六入)의 향락, 감각적인 향락을 위해 청정한 자기 마음을 더럽히는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을 화택(火宅), 불난 집 속에 있으면서 불난 줄도 모르고 놀고 있는 아이들에게 비유하고 있다.
2) 아라한과를 증득하기 위한 방법으로 교학을 공부하는 성문승, 참선을 하는 연각승, 보시와 봉사를 하는 보살승(菩薩乘)이 있다. 어느 방법이든 각자의 성향(性向)에 따라 수행하여 아라한과를 증득하고 나면 성문승 아라한, 연각승 아라한, 보살승 아라한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일불승만이 실(實)이라는 점이다. 아이들이 불난 집에 있을 때 아버지께서 사슴, 양, 소가 끄는 수레가 밖에 있으니 너희들이 밖으로 나와 각기 좋아하는 수레를 빨리 가지라고 외쳤지만 그들이 나와 보니 그 수레들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불난 집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어떠한 방편을 썼던 모든 번뇌에서 해탈되었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성문, 연각, 보살의 방편도 사라졌다.
그러하니, 혹 성문승으로 아라한이 된 성자(聖者)가 자기는 성문승 아라한이라고 한다면 그는 아라한이 아직 되지 못했다는 근거로 삼는 것이다. 이는 마치 군(軍)에서 장군이 되면 병과(兵科)가 없다는 말에 비유될 수 있으며, 스님이 선사(禪師)라 하여 교학(敎學), 염불, 봉사로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고 하며 오직 선(禪)만을 주장한다면 이는 옳지 않다는 말로도 해석된다. 산정(山頂)에 올라갔을 때 자기가 올라온 길만을 인정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산정에 올라가 본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산정에서 보면 수많은 길이 있음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가 올라간 길은 한 방편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3) 진귀한 보배로 장식한 흰 소 수레는 깨달은 사람, 아라한이 불지견(佛知見)으로 장엄하여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부처님의 길, 불도(佛道)로 들어가심을 보인 것이다.

오늘은 129쪽 7장 ‘법과 합함을 읊다’에서 시작하겠다. 이 장에서는 입불지견도(入佛知見道) 혹은 불도(佛道)가 무엇인가를 설명하고 있다.
“법과 합함”이란 모든 번뇌가 소멸되고 해탈하였다는 뜻과 같다. 왜냐하면 해탈해야 법과 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제목은 성자(聖者)가 되었을 때 일어나는 일을 읊다. 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성자가 되신 부처님께서 고사리불(告舍利弗) 사리불에게 말씀하시기를
아역여시(我亦如是) 중성중존(衆聖中尊) 세간지부(世間之父) 일체중생(一切衆生) 개시오자(皆是吾子) 나도 역시 많은 성인 중에 존중받는 성인이며 이 세간의 아버지이고, 일체 중생이 모두 나의 아들인데 이들을 내가 보니
심착세락(深著世樂) 무유혜심(無有慧心) 삼계무안(三界無安) 유여화택(猶如火宅) 중고충만(衆苦充滿) 심가포외(甚可怖畏) 세상의 욕락에 깊이 빠져 지혜로운 마음 전혀 없어 삼계가 불안하기가 마치 불이 타는 집과 같아, 수많은 고통이 가득 차 있으니 심히 두렵구나!
상유생노(常有生老) 병사우환(病死憂患) 여시등화(如是等火) 치연불식(熾然不息) 생노병사와 근심과 환난이 끊임없이 있는 것이 마치 불이 치성하여 쉬지 않는 것과 같구나. 그러나
여래이이(如來已離) 삼계화택(三界火宅) 적연한거(寂然閑居) 안처임야(安處林野) 여래는 이미 불이 타는 삼계의 집에서 떠나 숲이 우거진 편안한 곳에서 한적(閑寂)하게 지내노라.
여기에서 삼계화택을 여의었다는 뜻은 정신, 육체, 영혼의 일체 마음의 탐진치 삼독에서 해탈하였다는 뜻이니 곧 성불하여 모든 번뇌에서 벗어났다는 말씀이다. 성불을 하고 보니,
금차삼계(今此三界) 개시아유(皆是我有) 기중중생(其中衆生) 실시오자(悉是吾子) 이금차처(而今此處) 다제환난(多諸患難) 유아일인(唯我一人) 능위구호(能爲救護) 지금 이 삼계에서 오직 나만(깨달은 사람은)이 있으니 삼계 가운데 있는 모든 중생은 모두 나의 아들이다. 지금 이 곳에 있는 수많은 중생들이 모두 환난에 있는데 오직 나 한 사람만이 능이 이들을 구호(救護)할 수 있다. 그러나 중생들에게,
수부교조(雖復敎詔)  이불신수(而不信受) 어제욕염(於諸欲染) 탐착심고(貪着深故) 비록 반복하여 가르치고 가르쳐도 모든 욕망에 물들여져 탐욕에 집착이 심하여 믿고 받아드리지 아니하니
이시방편(以是方便) 위설삼승(爲說三乘) 영제중생(令諸衆生) 지삼계고(知三界苦) 개시연설(開示演說) 출세간도(出世間道) 이 방편으로서 삼승을 설하게 된다. 모든 중생들에게 삼계의 고통을 열어 보여 알게 하고, 세간사에서 일어나는 번뇌를 벗어나는 길을 연설한다.
시제자등(是諸子等) 약심결정(若心決定) 구족삼명(具足三明) 급육신통(及六神通) 유득연각(有得緣覺) 불퇴보살(不退菩薩) 이 모든 아들들이 삼명과 육신통을 구족하겠다는 마음이 결정되어 (수행하면) 연기법에 의한 깨달음을 얻어 보살로서 물러남이 없게 될 것이다.
육신통(六神通) - 신족통(神足通), 천이통(天耳通), 타심통(他心通), 숙명통(宿命通), 천안통(天眼通), 누진통(漏盡通)   삼명(三明) - 육신통 중 숙명통, 천안통, 누진통을 삼명이라 한다.
여사리불(汝舍利弗) 아위중생(我爲衆生) 이차비유(以此譬喩) 설일불승(說一佛乘) 여등약능(汝等若能) 신수시어(信受是語) 일체개당(一切皆當) 성득불도(成得佛道) 사리불아 나는 오직 중생을 위해 이 비유법으로서 일불승(一佛乘)을 설하노라. 너희들이 능이 이 말을 믿고 받아 지닐 수 있다면 일체 중생은 모두가 마땅히 부처의 길을 이루고 얻게 되리라.

지난주에는 「제2권, 3. 비유품」8장 ‘뜻을 명확히 밝혀 주다’를 했다. 부처님의 뜻을 어떻게 밝히셨다는 말씀인지 다시 간추려 보고자 한다.

이 장에서 부처님께서 성문승이 되었다, 연각승이 되었다, 보살승이 되었다하는 것은 하나의 방편설이다. 어떻게 방편이 되는지 ‘해탈’의 예를 들어 그 뜻을 밝히셨다. 중생의 마음이 허망한 일에서 해매고 있다가 어떤 연고로 그 허망에서 벗어난 것을 해탈이라 하지만 중생의 허망한 마음이 한 없이 많아 일체 허망한 것에서 해탈하였다는 뜻은 아니니 참 해탈은 아닌 것이다. 그러하니 해탈했다고 자만심을 가지면 이것이 곧 아만(我慢)이다. 해탈하였어도 일체 허망한 마음에서 해탈하기 위해 일심으로 부처님을 공경하고 부처님 법 배우고 실천하고 중생에게 이익한 일을 무한히 하는 사람이 참된 보살이라 했다.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이 모두 이와 같다.

원문(原文)을 살펴보자.
아수선설(我雖先說) 여등멸도(汝等滅度)  단진생사(但盡生死) 이실불멸(而實不滅)  
내가 앞에서 너희들이 멸도(滅度)하여 생사(生死)가 다하였다고 설하였지만 참된 멸도는 아니다.
금소응작(今所應作) 유불지혜(唯佛智慧) 약유보살(若有菩薩) 어시중중(於是衆中) 능일심청(能一心聽) 제불실법(諸佛實法)
오직 부처님의 지혜를 지어가기 위해 지금 보살이 많은 중생 가운데서 일심(一心)으로 모든 부처님의 참된 법을 들으려 하면,
제불세존(諸佛世尊) 수이방편(雖以方便) 소화중생(所化衆生) 개시보살(皆是菩薩)
모든 불세존(佛世尊)께서 방편으로써 중생을 교화하는 바이니 모두가 보살이다.
일심으로 부처님의 참된 법을 깨치기 위해 노력하는 부처님의 아들을 보살이라 부르는 것이니 자만심을 일으키지 말고 일념으로 정진하라는 뜻이다.

성문승이 되는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성제를 예를 들어 설명하신다.
약인소지(若人小智) 심착애욕(深着愛欲) 위차등고(爲此等故) 설어고제(說於苦諦)
어떤 사람이 지혜가 적어 애욕에만 깊이 탐착하고 있으면 이런 사람들에게 부처님께서는 고제(苦諦)를 설하신다.
중생심희(衆生心喜) 득미증유(得未曾有) 불설고제(佛說苦諦) 진실무이(眞實無異)
고제를 들은 중생의 마음은 과거에 없었던 환희심에 찬다. 부처님께서 고제(苦諦)를 설한 것은 진실할 뿐 다른 뜻은 없다.
약유중생(若有衆生) 부지고본(不知苦本) 심착고인(深着苦因) 불능잠사(不能暫捨) 위시등고(爲是等故) 방편설도(方便說道) 제고소인(諸苦所因) 탐욕위본(貪欲爲本)
만일 어떤 중생이 고통의 근본을 알지 못하여 고통의 원인을 알기 위해 깊이 집착하는 마음을 잠시도 버리지 못하면 이러한 사람들을 위해 부처님께서 모든 고통의 원인은 탐욕이 근본임을 방편으로 도(道)를 설하신다.
약멸탐욕(若滅貪欲) 무소의지(無所依止) 멸진제고(滅盡諸苦) 명제삼제(名第三諦) 위멸제고(爲滅諦故) 수행어도(修行於道) 이제고박(離諸苦縛) 명득해탈(名得解脫)
만일 탐욕을 멸하면 고통스런 마음이 머물 대상이 없어지니 모든 고통이 소멸된다. 이것을 제삼의 진리 멸제(滅諦)라 하니, 이러한 길로 수행을 열심히 하면 모든 고통의 속박을 여의게 된다. 이를 일러 ‘해탈을 얻었다’고 한다.
시인어하(是人於何) 이득해탈(鎰解脫) 단이허망(但離虛妄) 명위해탈(名爲解脫) 기실미득(其實未得) 일체해탈(一切解脫) 불설시인(佛說是人) 미실멸도(未實滅度)
이 사람이 어떻게 해탈을 얻었는가 하면 단지 허망함을 여읜 것을 해탈이라 했으니 그 실은 일체해탈을 아직 얻은 것은 아니다. 부처님께서 이러한 사람은 진실한 멸도를 아직 얻은 것은 아니라 했다.
사인미득(斯人未得) 무상도고(無上道故) 아의불욕(我意不欲) 영지멸도(令至滅度)
이러한 사람은 위없이 높은 도를 아직 얻은 것은 아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이들이 멸도(滅度)에 이르렀다고 하고 싶지 않다고 하셨다.
아위법왕(我爲法王) 어법자재(於法自在) 안은중생(安隱衆生) 고현어세(故現於世) 여사리불(汝舍利弗) 아차법인(我此法印) 위욕이익(爲欲利益) 세간고설(世間故說)
내가 법왕이 되어 모든 법에 자재로워 모든 중생을 편안케 하기 위해 이 세상에 출현하였느니라. 사리불아, 나는 이 세간에 이익이 되게 하기 위해 이 법인을 설하노라.

우리들의 입장에서 말하면, 잘 한다, 잘 한다, 하는 것은 더 잘하라고 하는 말이지 진짜 잘해서 잘한다고 하는 말은 아니니, 잘한다고 해서 자만하면 하근기 중생이 되고, 잘한다는 칭찬을 받아도 마음에 흔들림 없이 더 열심히 정진하는 하는 사람은 상근기 중생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부처님의 법은 아무리 잘 알고 실천했다 해도 무상도(無上道)를 얻기에는 부족한 줄 알아 금생뿐만 아니라 수많은 겁을 두고 수많은 부처님을 공경하고, 공양 올리며 수행하고, 중생위해 교화(敎化)활동을 해야 한다는 말씀으로 이해된다.  
어떤 사람이 이미 다 배웠다고 생각하여 더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마음이 좁은 사람이니 하근기 중생이지만, 이 사람이 찰나 사이에 자기에게 아상(我相)과 아만(我慢)있음을 깨닫고 이를 버리고 나면 아직도 배울 것이 많고 부족함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사람이 부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마음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되면, 이 사람은 즉시 상근기 중생이 된다는 뜻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