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 수 행 법 - 6. 집중력(Concentration)의 교육

2007.02.24 03:52

bultasa Views:9321

6. 집중력(Concentration)의 교육

계를 지님에 의하여 우리는 우리의 말과 육체적 행동을 통재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고통의 원인은 우리의 정신적인 행동에 있습니다. 만일 우리들의 마음이 부정한 정신적 행동으로 탐욕과 진에로 계속 끓는다면 단순히 우리의 말과 행동을 금하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들 자신을 이와 같은 길로 나누어 가게 한다면 우리는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조만간 탐욕과 진에가 갑자기 일어나 계를 범하기 때문에 남과 자기를 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적으로 누구나 부정한 행을 하는 것은 나쁘다는 것을 알고 있을 수 있습니다. 결국 몇 천년 동안에 모든 종교가 도덕의 중요성을 설하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유혹이 올 때는 그것이 마음을 위압하므로 그 사람은 결국 계를 범하게 됩니다. 술에 중독된 사람은 술이 그에게 해롭기 때문에 술을 마시면 안 된다는 것을 완벽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술에 대한 탐욕이 일어나면 술을 마시게 되고 술을 마시면 술에 제압당하여 중독됩니다. 그는 그 자신의 마음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 스스로 술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부정한 정신적인 행동을 범하는 것을 단절하는 법을 배우게 되면 그는 쉽게 부정한 말과 행동을 삼갈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문제는 마음에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문제를 정신적인 수준에서 돌파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 하여는 우리는 반드시 bhavana를 수행하여야 합니다. 즉 “mental development 정신 개발”입니다. 일반적으로 쓰는 말로는 meditation 혹은 참선입니다. 부처님 때를 지나서부터 bhavana라고 하는 단어의 뜻은 bhavana 수행이 사라지면서 그 뜻이 모호하여 졌습니다. 최근에 와서는 정신문화 혹은 영적인 향상과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정신문화 혹은 영적인 향상은 법을 독서하고, 말하며, 듣고, 생각하는 행위들을 의미합니다. “Meditation”은 bhavana의 가장 보편적인 영어 번역입니다. 이 meditation은 앞의 것보다 더 느슨하게 많은 행위들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그 행위란 정신을 이완하게 하는 것에서부터 대낮에 꿈을 꾸고 자유롭게 교접하고 스스로 최면술에 빠지는 것까지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부처님께서 뜻하고자하였던 bhavana와는 거리가 멉니다. 부처님께서는 특정한 정신운동, 즉 정신 집중과 마음의 정화를 위한 정확한 방법을 의미하기 위하여 사용하였던 것입니다.

Bhavana는 concentration(samadhi)와 wisdom(panna) 두 가지 교육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집중 수행은 또한 “development of tranquility(samatha-bhavana) 평정의 개발”이라고 하고 지혜는 “development of insight(vipassana bhavana) 통찰력의 개발”이라고 하였습니다. Bhavana의 수행은 집중 수행에서 시작합니다. 이 집중수행은 팔정도에서 두 번째 부분에 해당합니다. 이것은 마음의 행동과정을 통제하는 것을 배우는 청정한 행위입니다. 이러한 수행을 통해서 자신의 마음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 교육과정은 세 가지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정정진, 정념, 정정입니다.        

1) 바른 노력(Effort 正精進)

정정진은 bhavana 수행의 첫 단계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무지에 의하여 쉽게 위압을 당하고, 탐욕과 성냄에 의하여 쉽게 흔들입니다. 어떠한 방법으로든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마음을 강화하여 마음이 확고하고 안전하게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 확고한 마음은 우리에게 지어진 조건을 노출하여 그를 제거하기 위하여 가장 묘한 수준에 우리의 본질을  검사하는 유용한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환자의 병을 진찰하기를 원하는 의사가 피 sample를 취하여 현미경 아래 놓습니다. 그 sample을 검사하기 전에 의사는 반드시 그 현미경의 focus를 먼저 정확하게 맞추어야 하고 그 focus에 그 sample을 fix하여야 합니다. 이렇게 하였을 때 비로소 그 sample을 검사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병의 원인을 발견하고 그 병을 낳게 하는 합당한 치료법을 결정할 수 있습니다. 이와 유사하게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마음을 focus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주의의 한 대상에 마음을 fix하고 maintain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부처님은 마음을 집중하기 위한 여러 가지 techniques를 처방하였습니다. 교육을 받기 위해서 그를 찾아 온 사람의 사정에 맞는 technique을 설하였습니다. 내적인 실재를 탐지하기 위한 가장 적합한 technique으로 부처님 스스로 수행한 technique은 anapana sati, "awareness of respiration"을하는 technique입니다.

호흡은 모든 사람에게 이미 주어진 관심의 대상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 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모두 숨을 쉬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호흡은
보편적으로 접근할 수 있고 보편적으로 받아 들일 수 있는 참선의 대상입니다. Bhavana 수행을 시작하기 위하여 참선자들은 앉습니다. 편안하게 그리고 허리를 곧고 바르게 하고, 그리고 눈을 감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일이 없는 조용한 방에 있어야만 합니다. 밖앗 세상의 일로부터 안의 세상으로 돌리므로서 그들은 가장 현저한 활동은 그들 자신이 숨 쉬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대상에 주의를 기우리게 됩니다. 코 구멍을 통해 들어오는 숨과 나가는 숨에 주의를 기우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숨쉬는 운동이 아닙니다. 이것은 알아 차리는 운동입니다. 노력은 숨을 control하려는 것이 아니라 숨이 자연스럽게 흐르는 그대로 의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숨이 길든 짧든, 무겁든 가볍든, 거칠든 부드럽든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알아차리는 연결 고리를 깨 버리는 산만한 마음을 전혀 허용하지 않고, 숨에 주의를 고정하는 것을 가능한 한 오랫동안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참선을 수행하는 사람은 곧 바로 이 수행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알게 됩니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호흡에 고정시켜 보려고 하면 발에 통증을 염려하기 시작합니다. 산만한 생각들을 누르려고 하자마나 천 가지 일들이 마음에서 일어납니다. 이를 테면 과거의 일들이 기억나고, 계획, 희망, 두려움 등 한 없이 꼬리를 물고 일어납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중 하나가 우리의 주의를 끌면 한 참 시간이 흐른 다음에야 우리는 우리가 호흡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다시 새로운 각오를 가지고 시작합니다. 그러나 다시 잠시 후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마음이 빠져나가버린 것을 알게 됩니다.

여기를 누가 장악하고 있습니까? 어떤 사람이 이 수행을 하자마자 사실상 마음은 통제 밖에 있었다는 사실을 대단히 빠르게 그리고 대단히 명백하게 알게 됩니다. 버릇없는 아이들이 한 장난감을 가지면 금방 싫증을 내고 다른 것을 찾고, 다른 것을 가지면 또 금방 싫증을 내곤 하여 마음이 계속 한 생각, 한 관심의 대상에서 다른 것으로 뛰어 다녀 현실에서부터 점점 멀어진다.

이것은 마음에 새겨진 습관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평생동안 하여온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들 자신의 진정한 본성을 검사하기 시작하면 밖으로 뛰어 다니는 것이 반드시 정지됩니다. 우리들은 우리들의 정신적인 습관의 pattern을 반드시 고쳐서 현실에 머무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들의 주의를 숨에 고정하려고 노력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우리가 마음이 헤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참을성 있게 조용히 우리는 마음을 되돌려 와야 합니다. 우리가 실패하면 또 노력하고 또 노력하여야 합니다. 웃으면서 아무런 긴장 없이 아무런 실망도 없이 우리들은 계속 수행으로 돌아와 수행을 끊임없이 지켜가도록 하여야 합니다. 결국 우리들이 평생동안 쌓아온 습관이 몇 분만에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습관을 바꾸는 일은 인내와 조용함을 유지하는 것은 물론 계속적인 수행과 그 수행의 반복을 요구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현실을 알아차리는 힘을 개발하는 방법입니다. 이것이 정정진입니다.

부처님은 네 가지로 바른 노력을 설명하셨습니다.

■악이나 부정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방지하고
■만일 그들이 일어난다면 그들을 없애 버리고
■청정한 일들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으면 일어나게 하고
■청정함을 간단없이 유지하고 청정함을 더욱 개발하도록 하고 완전히 자라서 완벽 하게 할 것이니라.    

호흡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함에 의하여 우리는 위의 네 가지 정정진을 수행하게 됩니다. 우리는 앉아서 생각 사이에 끼어드는 일 없이 호흡에 주의를 고정시킵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우리들은 자신을 알아차리는 청정한 자리를 시작하고 유지합니다. 우리들은 우리들 자신이 잡념에 빠진다든지 방심 상태에 빠진다든지 현실을 바라보는 눈을 잃는 다든지 하는 일들을 방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한 생각이 일어나면 우리는 그것을 좇아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 다시 우리들의 주의를 호흡에 돌아가게 합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한 대상에 focus하여 남아 있는 능력을 개발하고 정신을 산만하게 하는 것에 저항하는 능력을 개발합니다. 이 두 가지가 마음을 집중하는데 가장 실질적인 성질입니다.  

2) 바른 알아차림(Awareness 正念)

호흡을 관하는 것은 또한 바른 알아차림을 수행하는 방법입니다. 우리의 고통은 무지에서 일어납니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반응을 일으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실재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대부분의 시간을 환상에 빠져 허송세월하고 즐겁고 불쾌한 경험을 다시 살리고 미래에 대하여 열정이나 공포를 예상합니다. 탐욕이나 진에로 자신을 잃어버리고 있는 동안, 우리는 지금 나에게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지 못하고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 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지정으로 지금이라고 하는 이 순간은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합니다. 우리는 과거에 살 수 없습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 갔습니다. 우리는 미래에도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영원히 잡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현재에만 살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지금하는 행위를 알아차리지 못하면, 우리는 과거의 잘 못을 반복하는 벌을 받습니다. 그리고 미래를 향한 우리들의 꿈을 얻는데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현재의 순간을 알아차릴 수 있는 능력을 개발 할 수 있으면, 미래에 우리들의 행동을 주문하는 지침으로서 과거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들의 목적을 얻을 수 있습니다.

법은 현재 여기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현재 이 순간을 알아차리는 능력을 개발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이 순간에 우리들의 실재에 주의를 focus하는 방법이 요구됩니다. anapana-sati의 technique이 그러한 방법입니다. 이것을 수행하면 현재 여기에서 자신을 알아차리는 것을 개발합니다. 이 순간에 숨을 들이 쉬고, 이 순간에 숨을 내 쉬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을 수행함으로서 우리는 이 순간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을 개발하는 또 다른 이유는 궁극적인 실재를 경험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숨에 focusing하는 것은 우리들 자신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것은 무엇이나 개발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의식하지 못하였던 모든 것을 의식으로 끄러드립니다. 숨에 focusing하는 것은 의식하는 마음과 의식하지 않는 마음 사이에 다리 역할을 합니다. 왜냐하면 숨은 의식적으로도 무의식적으로도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호흡을 통제하기 위하여 숨을 특정한 방법으로 쉴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잠시 동안 숨을 멈출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호흡을 통제하려는 것을 그만 둘 때, 호흡은 어떠한 자극도 받지 않고 계속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의지적으로 숨을 쉬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주의를 더 쉽게 고정하기 위하여 약간 굳은 자세로 합니다. 호흡의 알아차림이 명백하고 꾸준하게 되는 순간 우리는 숨이 자연적으로 진행하게 두게 됩니다. 때로는 굳거나 부드럽고, 때로는 깊거나 얕으며, 때로는 길기도 하고 짧기도 하고, 때로는 빠르기도 하고 느리기도 합니다. 우리는 숨을 조절하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노력은 다만 숨을 알아차리는 데 있습니다. 자연적인 숨을 알아차리는 것을 유지함으로서 우리는 몸의 자율적인 기능을 관찰하기 시작합니다. 이 자율적인 몸의 작용에 대하여 우리는 보통 의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의지적인 숨의 전체적인 실재를 관찰함으로부터, 우리는 자연적인 숨의 더 고요한 실재를 관찰할 수 있는 것으로 발전합니다. 우리는 표면적인 실재를 넘어 한 층 더 고요한 실재를 알아차리는 쪽으로 옮겨가기 시작합니다.

호흡을 알아차리는 법을 개발하고자 하는 또 다른 이유는 탐진치 삼독을 처음으로 알아차림에 의하여 탐진치 삼독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기 위한 것입니다. 호흡의 작용은 사람의 정신적인 상태를 반영함으로 숨은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도움이 됩니다. 마음이 평화롭고 조용할 때는 숨은 정상적이고 gentle합니다. 그러나 마음에 화가 난다든지 증오한다든지 두렵다든지 고민이 일어나는 부정적인 일이 일어날 때는, 호흡은 더 거칠고 무겁고 빨라집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우리들의 호흡은 우리들의 정신 상태를 우리에게 미리 알려주고 우리로 하여금 그들에 대처하기 시작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숨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들의 목적은 우리의 마음이 모든 소극적인 것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데 있으므로 우리는 우리가 그 목적을 향해서 취하는 모든 단계는 순결하고 청정하도록 우리들의 반드시 주의하여야 합니다. samadhi를 개발하는 첫 단계에서도 우리는 관행의 대상으로 청정한 것을 사용하여야만 합니다. 숨은 그러한 대상입니다. 우리는 숨을 향해서 탐욕이나 진에를 취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완전히 환각이나 환상으로부터 떠난 실재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가장 적합한 관행의 대상입니다.

우리들의 마음이 원만히 호흡에 focus되는 순간 마음은 탐욕으로부터 자유롭고, 진에로부터 자유롭고, 무지로부터 자유입니다. 아무리 그 청정한 순간이 짧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 사람의 모든 과거 조건에 도전하기 때문에 대단히 강력합니다. 모든 누적된 반응은 동요되고 정신적인 것은 물론 육체적인 여러 가지 어려움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어려움들이 그 사람의 알아차림을 개발하려는 노력을 방해합니다. 우리들은 발전하려고 조급하게 서두는 것을 경험합니다. 이것은 탐욕의 한 형태입니다. 아니면 발전이 너무 느린 것 같이 보이기 때문에 진에가 화나는 형태로나 낙심하는 형태로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 때로는 무기력함이 우리를 제압하여 우리가 참선하려고 앉자마자 졸아버립니다. 때로는 우리는 대단히 흥분하여서 안절부절 불안해 할 수도 있고 참선을 피하고자 구실을 찾을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회의적인 마음이, 작용하고자 하는 의지를 훼손시킬 수 있습니다. 회의적인 마음이란 강박감이나, 선생이나 그의 가르침에 대하여 이유 없이 의심하거나 우리들 자신의 참선하는 능력을 의심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어려움들을 갑자기 직면함에 우리는 수행 자체를 모두 포기하고자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는 우리는 이러한 모든 방해가 일어나는 것은 우리들의 호흡을 알아차리는 수행이 성공함에서 따르는 반대작용임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참으면, 그들은 점차 사라집니다. 그들이 사라지면 우리들의 작업은 그만큼 쉬워집니다. 수행을 시작한 초보 단계에서도 마음의 표면에서부터 약간의 조건의 겹이 제거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우리들이 숨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함에 따라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청결하기 시작하고 해탈하는 방향으로 전진하게 됩니다.    

3) 바른 집중(Concentration 正定)

관심을 호흡에 고정시키는 것은 현재의 순간을 알아차리는 것을 개발합니다. 이러한 알아차림을 순간에서 순간으로 할 수 있는 한 오랫동안 유지하는 것이 right concentration 正定입니다.

일반적 생활의 매일 활동에서도 집중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正定과 꼭 같은 것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감각적인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혹은 두려운 일을 미리 막기 위하여 집중을 할 수 있습니다. 고양이가 그의 모든 관심을 쥐구멍에 focus하여 쥐가 나타나기만 하면 뛰어갈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쓰리 꾼이 그의 관심을 어떤 사람의 지갑에 두고 그것을 훔칠 기회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밤에 자던 어린 아이가 방에서 가장 어두운 구석에서 귀신이 숨어 그림자가 보인다고 상상하여 두려움에 가득 차 그 곳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어느 것도 정정이 아닙니다. 정정은 해탈을 위하여 사용될 수 있어야 합니다. Samadhi는 반드시 모든 탐욕, 모든 진에, 모든 환상으로부터 자유로운 대상을 samadhi의 focus로 가져야 합니다.    

숨을 알아차리는 수행에서 수행자는 끊이지 않고 알아차림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알게 됩니다. 숨의 대상에 관심을 고정하려고 확고한 결심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어떻게 빠져나가 버립니다. 우리는 술 취한 사람이 직선으로 걸어가려고 노력하지만 이 쪽 저 쪽으로 계속 길을 잃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실상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무지와 환상으로 취하여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과거와 미래, 탐욕과 진에로 길을 잃습니다. 우리는 지속적인 알아차림의 똑 바른 길에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참선하는 사람으로서 이러한 어려움에 직면하였을 때 우울해 지그나 실망하지 않는 것이 현명합니다. 마음에 새겨진 습관이 오래되어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이해하여야 합니다. 이러한 습관을 고칠 수 있는 것은 단지 반복하여 수행하고 계속하고 참고 인내심으로 끝없이 이어가야 합니다.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단순히 마음이 길을 잃었다는 것을 알자마자 우리의 관심을 숨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으면 우리는 돌아다니는 마음의 길을 바꾸는데 중요한 step을 취한 것입니다. 그리고 반복하는 수행에 의하여 잃은 관심을 돌리는데 점점 더 빨리 할 수 있는 것이 가능하여 집니다. 점차 잃어버리는 기간이 짧아지고 지속적으로 알아차리는 기간 - samadhi - 은 점점 길어집니다.    

집중력이 강화 됨에 따라 우리는 긴장이 풀리고 행복하고 기(氣)가 충만함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조금씩 조금씩 숨결이 변하여 부드러워지고 정상적이고 가볍고 얕아지게 됩니다. 때로는 호흡이 완전히 정지된 것 같기도 합니다. 사실상 마음이 평정하여 짐에 따라 몸도 역시 고요해 지고 신진대사가 slow down 되어서 산소의 필요성이 적어집니다.

이 단계에서 호흡의 알아차림을 수행하는 사람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여러 가지 비상한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면, 앉아서 눈을 감고 있는 동안에 빛을 본다거나 통찰력이 생기기도 하고 혹은 비상한 소리를 듣기도 합니다. 이 모든 소위 비상한 감각의 경험은 단순히 마음이 집중력이 높아진 수준을 얻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 자체에서 이러한 현상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것에 관심을 가지면 안 됩니다. 알아차림의 대상은 호흡에 남아 있습니다. 그 외 모든 것은 주의를 분산하는 것입니다. 누구도 그러한 경험을 기대하면 안 됩니다. 그들은 어떤 경우에는 나타나고 다른 경우에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모든 비상한 경험들은 단순히 수행 길상에서 발전되어가는 것을 표시하는 이정표입니다. 어떤 때는 그 이정표는 보이지 않게 감추어져 있습니다. 혹은 우리가 그 길을 빨리 지나가는 동안에 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러한 이정표를 수행의 최종 목표로 삼고 그기에 집착하면 진행 되던 모든 발전이 정지됩니다. 결국 헤아릴 수 없는 비상한 감각적인 경험을 우리는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담마를 수행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경험을 추구하지 않고 그들 자신의 본성을 관통하여 모든 고통으로부터 자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하여 오직 호흡에 관심을 갖습니다. 마음이 더 집중 됨에 따라 숨은 더 섬세하여 져서 따르기가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더 큰 노력으로 관심을 집중할 것이 필요해 집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우리는 계속 마음에 경종을 울리고 집중을 날카롭게 하고 집중을 도구로 하여 분명한 표면의 실재를 넘어 꿰뚫어 가서 가장 묘한 내(內)에 있는 실재를 관하기 위한 것입니다.

집중을 개발하기 위한 다른 많은 technique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한 단어를 반복함으로 써 집중이 된다고 배웁니다. 혹은 눈에 보이는 영상에 집중하거나 몸의 특정한 운동을 반복하게 하여 집중을 하게 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그 사람은 관심의 대상에 몰입하게 되어 환상의 기쁨의 경지에 들게 됩니다. 그러한 경지는 그 경지가 계속하는 한 의심할 여지없이 대단히 기쁜 것이지만 그것이 끝나면 전에 가지고 있던 똑같은 문제를 가진 보통 생활을 하는 자기로 돌아 온 것을 알게 됩니다. 이러한 technique은 마음의 표면에 평화와 기쁨의 결을 개발하여 작용합니다. 그러나 깊이 있는 조건들은 손을 대지 못합니다. 이러한 technique으로 집중을 얻기 위하여 사용하는 object는 그 사람의 순간순간에 일어나는 실재와 관계가 없습니다. 그 사람이 얻는 기쁨은 겹쳐진 것이고 의도적으로 창조된 것입니다. 정화된 마음의 깊은 곳으로부터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Right samadhi는 영적인 중독일 수 없습니다. 이것은 모든 인공적인 것으로부터 자유롭고 모든 환상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 안에서도 얻을 수 있는 여러 가지 환상의 경지가 있습니다. - jhana 선(禪) - . 부처님 스스로도 깨닫기 전에 여덟 단계의 마음의 몰입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의 생애동안 계속 그들을 수행하였습니다. 그러나 환상 만으로 그를 해탈 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몰입의 경지들을 배웠을 때 내관(內觀)을 개발함에 디딤돌의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강조하였습니다. 참선자들이 집중의 능력을 개발하는 것이 기쁨이나 무아경을 경험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도구로 만들어 그 도구로 그들 자신의 실재를 검사하고 그들의 고통의 원인인 조건들을 제거하는데 있는 것이다. 이것이 right concentration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