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행입문 - 강의 8

2007.02.27 18:28

현성스님 Views:10038

강의 8 참선하는 이유와 위빠사나 선

위빠사나 선
3. 일상생활의 알아차림
∙매일 활동의 알아차림은 선수자(禪修者)들의 바른 생활이다. 한 활동을 관찰할 것을 실패하면 그날의 생활을 있는 그대로 잃었다. 즉, 선수자가 선수생활을 멈추게 되면 념정혜(念定慧)를 모두 잃게된다.
∙념근(念根)은 항상 그리고 끊임없이 하루 수행 중에 모든 활동을 알아차림에 의하여 강력하게 된다.
∙지속되는 알아차림은 깊은 선정에 들게 하고, 오직 깊은 정력(定力)을 통하여서만 정신과 육체적인 현상의 본질적인 성질을 인식할 수 있게 한다. 이리하여 이것은 고통을 멸하게 한다.
∙하루 생활을 새기는 것을 실패하면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넓은 간격을 만든다. 새김을 계속하는 것이 알아차림을 한 순간에서 다음 순간으로 옮겨가는 것을 필요로 한다. 이와 같은 수행으로 매일 새로운 것을 많이 발견하게 될 것이다.
∙참선수련 중에 해야할 일은 알아차림을 끊임없이 행하고, 대단히 천천히 움직이는 것을 필요로 한다.
∙대단히 천천히 일을 하는 것은 마음을 집중하는데 도움을 준다. 선정을 배육 하기를 원하면 천천히 일을 하는 것에 익숙하여야 한다.
∙선풍기가 빠르게 돌아가면 그것이 어떠한 것인지 볼 수 없다. 그러나 천천히 돌아가면 그것이 어떠한 것인지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심신의 과정을 있는 그대로 보기 위 하여는 대단히 많이 천천히 할 필요가 있다.  
∙일을 빨리 하는 사람들로 둘러 싸여 있으면 주위에서 알아차릴 것은 없다. 그대신 자신의 심신의 활동을 더욱 강력하게 새겨라.
∙이야기를 하는 것은 통찰력을 발전하는데 큰 위험을 준다. 5분간의 이야기는 선수자가 쌓은 하루종일의 선정을 파괴할 수 있다.

4. 고통과 인내
∙고통은 선수자의 친구이다. 그것을 피하지 말라. 이것은 너를 열반으로 인도할 것이다.
∙ 고통은 그가 오는 것을 사전에 알려주지 않는다.
∙아픔을 떠내 보내기 위하여 관찰하는 것이 아니다. 그 참다운 본질을 깨닫기 위하여 관한 다.
∙아픔은 열반에 들어가는 문의 열쇠이다.
∙선정이 깊어지면 아픔은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자연적인 진행과정이다. 만일 주의 깊게 관하면 마음은 그기에 흡수 될 것이다. 그래서 그 본질을 발견한다.
∙아픔이 오면 아픔을 직접적으로 새겨라. 만일 너무 지나치게 아픔이 지속적이면 무시해 버려라. 계속적인 알아차림에 의하여 얻어진 깊은 선정에 의하여 극복될 수 있다.
∙만일 행선 수행 중에 통증이 심하게 일어나면 자주 쉬고 새김을 계속하라.
∙마음을 자극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간에 잘 참아야 한다.
∙인내는 열반으로 인도한다. 참지 못하면 지옥으로 떨어진다.

5. 정신 상태를 새김
∙정신이나 감정 상태를 새길 때, 급하게 힘있게 정확하게 하라. 그래서 새기는 마음이 계속적으로 강력하게 남아 있게 하라. 그러면 생각은 저절로 멈추어진다.
∙방황하는 생각을 새길 수 있기 전에는 그 마음을 집중하려고 하였을 때 당신은 이미 실패하였다. 마음이 방황하려고 할 때 그 생각의 새김이 강력하지 못하였음을 나타낸다. 이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은 소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생각이나 이론에 집착하지 말라. 선(禪)은 시공(時空)을 초월하고 있다. 그러므로 생각과 이론에 걸리지 말라. 통찰력은 깊은 선정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논리적이고 철학적인 생각은 얕은 선정에서 나온다.
∙졸림은 더 강한 정진으로 극복할 수 있다. Labelling을 맹렬히 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강력하게 졸림을 새겨라. 만일 게으름을 받아들이면 반은 자게 된다.
∙사실상 새기는 힘은 항상 있다. 문제는 하고 싶은 마음이 약하여서이다. 정신적인 태도가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므로 비관적이지 말라. 긍정적이면 자신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모든 상황에서 만족하게 되고 분산이 적게 일어난다.
∙ 인간은 대단히 다양한 능력을 가지고 있고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힘이 있다. 이 선을 완전히 알아차리는 것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개발하기를 원하면 이 수행에 결정적인 노력을 가할 필요가 있다. 전적인 노력을 기울인다면 습관적인 애착, 두려움 혼선에서부터 최종적인 해탈을 성취할 수 있다.    

행선(行禪)은 자기의 사유패턴을 인식하고 고쳐 나가는데 크게 도움이 되는 수행입니다. 예를 들면 참선하면 좌선(坐禪)을 의미하는 것처럼 생각할 정도로 좌선은 우리들의 참선의 fashion으로 되어 있고 또 화두를 참구하는 것이 우리들 참선의 방법으로 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태국이나 미얀마에서는 행선(行禪)이 큰 선풍을 일으키고 있고 일정한 화두보다도 자기 몸 특히 자기 발의 움직임을 관하는 것입니다. 좌선에서는 졸림이 큰 마(魔)이지만 행선 에서는 졸림의 문제는 거의 없습니다. 좌선과 행선을 자기에게 맞게 병행하는 수행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수행 fashion이 바뀌면 그 결과도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좌선과 화두선만이 최상이라고 알고 있는 수자(修者)들에게는 자신의 집념을 그대로 지킬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집념을 지키는 효과는 있지만 그 대신 새로운 방법을 소화할 능력은 없는 것입니다. 무엇이 좋고 나쁜지를 사유하는 힘을 길러주는 것이 행선입니다.
행선을 통하여 무상(無常)을 경험하는 것은 물론이고 무아(無我)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일단 보행을 관하는 수행이 익숙하여 지고 수행의 방해 요인 제거에 익숙하여 지면 자기의 사유패턴의 한계를 사유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보행을 자기가 평소 하는 대로하기도 하고, 더 빨리 하기도 하고, 더 천천히 하기도 하고, 더 더 천천히 하기도 하고, 더 더 더 천천히 하기도 하고, 더 더 더 더 천천히 하기도 하면서 그기에서 일어나는 생각들을 관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수행하는 과정 속에서 자기 성격상의 결함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 결함들을 부처님 전에 고백하고 하나하나 고쳐 나갈 때 구속에서 해방되는 해탈의 느낌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 만족하면 실패합니다. 오히려 더욱 발심하여 열심히 수행 정진하여 그 잘 못된 성질의 뿌리를 뽑아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사유 패턴이 완전히 바뀌어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금강경』에서 설하고 있는 무주상보시, 상이 없는 속에 계시는 여래, 불응취법 불응취비법을 이해하고 행으로 옮기는 것도 행선 수행이 크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참선하는 목적은 열반에 입문하는데 있고 열반을 증득하기 위하여는 탐욕도 없고 화냄도 없고 어리석음도 없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조건을 만족하기 위한 방편이 계정혜 삼학입니다. 계가 정과 혜를 돕고 정이 계와 혜를 돕고 혜가 계와 정을 돕는 것입니다. 이들 셋이 서로 도와 상대를 증장하게 만듭니다.
먼저 계가 정과 혜의 증장을 돕기도 하고 오히려 방해하기도 하므로 수행하고자 하는 사람은 계를 잘 다스려야 합니다. 계를 잘 다스리지 않으면 번뇌로 말미암아 선정과 지혜를 얻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계를 잘 다스릴 수 있을 까요. 계를 잘 다스린다고 하는 것은 살생 대신 방생, 도둑질 대신 보시, 사음 대신 사랑, 거짓말 대신 바른 말, 음주 대신 청정심을 유지하도록 자기 마음을 끊임없이 다스리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을 끊임없이 다스림에는 두 가지 지켜야할 법이 있습니다. 한 법은 현재 마음을 청정하게 유지하기 위하여 새로운 업을 짓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또 한 법은 과거에 지은 업을 내 마음에서 소멸하여 현재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업장소멸이라고 합니다.
업장을 소멸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경전 독경 사경,  보시 혹은 자비행과 같은 선행(善行), 염불, 혹은 Vipassana 선 등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관심을 갖는 방법은 위빠사나 선에 의한 업장소멸입니다. 다른 여러 가지 업장소멸법보다 위빠사나 법이 가장 빠른 효과를 가져온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우리들의 업장이란 무엇인가 생각해 보겠습니다. 업장(業障)이란 업(業)이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 장애(障礙)를 가져온다는 뜻입니다. 현재 우리들의 경우 과거에 쌓인 업(業)이 현재 우리가 하고자하는 참선에 장애를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업(業)을 소멸하면 장애는 없어지는 것입니다.
업(業)이란 무엇인가? 내가 습관적으로 한 행동이나 말이나 마음이 나의 기억 속에 잠재하여 있다가 어떤 인연을 만나면 그 기억이 살아나 작용하게 됩니다. 그 작용이 탐욕일 수도 있고, 애욕일 수도 있고, 인색한 마음일 수도 있고, 불평불만일 수도 있습니다. 이들을 모두 묶어서 우리는 번뇌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번뇌의 핵은 기억입니다. 이 기억을 소멸하면 업이 소멸되는 것입니다. 이 기억을 소멸하기 위하여는 먼저 그 기억을 찾아내야 합니다. 이 기억을 찾아내어 소멸하기 위하여 우리는 오늘 위빠사나 선 수행을 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