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수경]7. 사홍서원과 삼귀의

2007.03.01 01:59

여해 Views:17397

제7장 사홍서원과 삼귀의

 

 

천수경에서는 여래의 원을 본받게 하고자 여래십대발원문을 외우도록 한 데 이어 중생 스스로가 발하는 네 가지 큰 서원, 곧 사홍서원을 발하고 있다. 이 서원은 맹세의 원이다.

 

발사홍서원(發四弘誓願)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

번뇌무진서원단(煩惱無盡誓願斷)

법문무량서원학(法門無量誓願學)

불도무상서원성(佛道無上誓願成)

자성중생서원도(自性衆生誓願度)

자성번뇌서원단(自性煩惱誓願斷)

자성법문서원학(自性法門誓願學)

자성불도서원성(自性佛道誓願成)

중생 가없지만 기어코 건지리다.

번뇌 끝없지만 기어코 끊으리다.

법문 한없지만 기어코 배우리다.

불도 끝없지만 기어코 이루리다.

내맘의 중생을 기어코 건지리다.

내맘의 번뇌를 기어코 끊으리다.

내맘의 법문을 기어코 배우리다.

내맘의 불도를 기어코 이루리다.

 

이 네 가지 큰 서원은 제불보살님께서 세우시고 펴신 대원이며, 동시에 우리 불자들이 배우고 세우고 이룩해야할 큰 원이다. 법회를 할 때 ‘삼귀의’로 시작을 열고, ‘사홍서원’으로 온 법계에 원을 가득 채운 다음 끝을 맺는다. 왜 이렇게 하는가?

원력이 생명력이요 삶의 근본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사홍서원의 정신을 마음에 담아야 한다. 정녕 원(願)이 무엇인가? 마음가짐이다. 자기의 현재 좌표를 확연히 인지하고 미래세와 통하는 희망을 세우는 것이다. 비록 그 원이 불가능해 보일지라도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여 꾸준히 나아가면 그 원에 힘이 생겨 원력(願力)이 되고, 그 원 속에서 마음을 넉넉하게 쓰면 행복이 스스로 깃들게 된다.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

중생 가없지만 기어코 건지리다.

내 스스로 깨달음을 얻은 후에 중생을 제도해야 한다고 공부에만 열중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현재도 중생을 제도하는 일에 게을리 하지 않겠다는 서원이다. 괴롭고 슬픔에 잠겨 있는 사람을 만나면 위로해 주고, 병든 이에게 문병가 위로해 주며, 삶의 길을 잃은 사람에게 길을 찾아 주려고 노력하고, 가난한 이에게 바르게 살면서 가난을 벗어나는 법을 가르쳐주며, 화를 잘 내는 사람에게 화 다스리는 법을 가르쳐 주고, 각자의 자성에 누구보다 재미있고 멋있게 잘 살 수 있는 능력과 지혜가 있음을 가르쳐주고, 이 『천수경』 안에 있는 쉽고 간단한 진언을 외우게 한다든지, 『금강경』이나 『반야심경』의 한 구절만이라도 외우게 하면 그들의 마음이 편안해지고 건강해질 것이다. 이러한 우리들의 생각과 행동이 모두 가없는 중생을 한 사람 한 사람씩 그들의 어려움에서 건지는 작업이 될 것이다.

 

번뇌무진서원단(煩惱無盡誓願斷)

번뇌 끝없지만 기어코 끊으리다.

번뇌(煩惱)는 나를 괴롭게 하고, 답답하게 하고, 번거롭게 하고, 안절부절하게 하며, 심하면 속병을 앓게 하는 원인이다. 이러한 번뇌는 과거에 내가 경험한 일들이 내 마음에 저장되어 있다가 유사한 일이 생길 가능성이 있다든지 생기고 있을 때 일어나는 심적인 작용이다. 번뇌는 집중하는데 장애를 일으켜 문제를 해결할 지혜가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다. 그러나 사수관(死隨觀)이나 염불, 독경 혹은 봉사활동을 하여 번뇌의 원인을 찾아 제거할 수 있다. 번뇌 하나 하나의 원인을 찾아 제거하고 말겠다는 굳은 신심(信心)과 기도하는 마음이 일어나야 번뇌를 신중히 참된 마음으로 찾아 갈 수 있다. 이렇게 어렵게 찾은 번뇌를 제거함에 따라 집중력이 길러지고 집중력이 길러짐에 따라 지혜가 일어나 사리를 바르게 보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게 된다.

불자(佛子)님들이 사수관(死隨觀), 염불, 독경, 봉사활동 등을 통해 번뇌를 제거하는 노력을 매일 꾸준하게 하겠다는 서원이다.

 

법문무량서원학(法門無量誓願學)

법문 한없지만 기어코 배우리다.

부처님께서는 수많은 종류의 중생이 있고, 중생 각자마다 가지고 있는 고통이 다 다르다는 것을 아시고, 그들 각자에게 맞는 법을 설하시다보니 무량한 법문이 되었다. 그러나 어떠한 경전에도 병의 실체, 병의 원인, 병을 다스리는 법, 병이 다 나았을 때 이르는 경지에 대한 진리를 설하고 있음으로 표현과 설명하는 방법이 그 대상에 따라 다르다고 하더라도 실제 내용은 같은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어떠한 경전이든 한 경전에 담겨진 진리라도 바르게 이해하고 이해한 대로 바르게 행하려고 오랜 시간을 두고 꾸준히 노력하는 가운데 어느 날 갑자기 심오한 진리에 이르게 되면 부처님의 무량한 법문을 다 배운 것과 같이 될 것이다. 무량한 법문이라 하더라도 내용에 있어 병의 실체, 병의 원인, 병을 다스리는 법, 병이 다 나았을 때 이르는 경지의 진리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자(佛子)님들은 『천수경』이나 『반야심경』이나 어떠한 경전이든 하나를 택하여 오랜 시간을 두고 꾸준히 그 뜻을 바르게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이해한 대로 바르게 행동하려고 노력하다보면 어느 날 진리가 가슴에 와 닿는 때가 올 것이다. 이렇게 얻은 진리는 바로 무량한 법문에 담겨 있는 진리와 같은 진리라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불도무상서원성(佛道無上誓願成)

불도 끝없지만 기어코 이루리다.

앞의 세 가지 서원은 이 불도(佛道)를 이루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위없이 높은 부처가 되는 길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부처님이 출가하시기 전에 인도에는 브라만 종교가 있었다. 이 종교에서는 창조주가 있고 창조주가 만든 피조물이 있었다. 피조물이란 사람을 포함한 삼라만상이다. 사람은 피조물이기에 창조주와 대등할 수 없고 창조주의 구원에 의하여야만 다음 생에 금생보다 나은 신분으로 태어날 수 있다고 하여 창조주의 구원을 청하게 했다. 이러한 구원의 개념은 창조주와 구원을 받을 사람 사이에 이들을 중재하는 브라만 족이라는 사람들이 있어 중재하는 사람들이 구원을 구실로 구원을 받을 사람을 오히려 착취하여 구원을 받아야 할 천민들의 고통은 더욱 심해가고 있었다.

부처님께서 우주의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얻으신 후 부처가 되는 길로 창조주와 피조물이 하나가 되는 길을 여셨다. 즉 창조주도 없고 피조물도 없는 진리와 하나 되는 길을 여시고, 자신을 승화하면 이 진리와 하나 되어 스스로 창조주가 된다고 하셨다. 이와 같이 다른 종교에는 없는 길이 불교에는 있기 때문에 불도무상(佛道無上), 위없이 높은 불도라 한다.

불교에서는 우리 인간은 피조물이 아니라 우리들 각자의 마음 가운데 어떠한 신(神)에게도 지배 받을 수 없는 무한한 능력을 가진 창조주가 있다고 한다. 우리가 있는 그대로 생긴 그대로 자기 인생을 창조해 가는 창조주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우리 스스로 창조주임을 깨닫고 창조주답게 살아야 한다. 우리의 마음 가운데 부처님이 항상 계시고 우리 각자가 곧 부처님이라는 가르침은 참으로 위대한 가르침이 아니라 할 수 없다. 이는 대부분의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그들의 창조주로부터 해방되는 가르침이다. 우리는 불도(佛道)를 닦아 부처님과 하나 되고 광대무변한 우주의 진리와 하나 되어 우리의 마음 가운데 우주가 안겨오는 길을 닦는다. 불도(佛道)로서 우리는 참선, 염불, 독경, 불공, 보시활동 등을 한다. 이것은 육바라밀(六波羅蜜)을 근본으로 하는 수행이고, 육바라밀은 팔정도(八正道)를 근본으로 하는 수행이다.

이와 같이 무상(無上)한 불도(佛道)이기에 ‘부처님을 삼계도사 사생자부 시아본사 석가모니불’이라 했지 피조물을 창조하는 창조주라 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무상한 부처님이 되는 길을 닦기 위해 우리는 매일 잊지 않고 기도하고 지극한 마음으로 불공올리고 염불하고 참선하고 보시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모두 부처가 되는 길의 과정들이다.

 

자성중생서원도(自性衆生誓願度)

자성번뇌서원단(自性煩惱誓願斷)

자성법문서원학(自性法門誓願學)

자성불도서원성(自性佛道誓願成)

 

『천수경』의 ‘발사홍서원’은 다시 안으로 향하여 자성 속에 있는 중생, 번뇌, 법문, 그리고 불도를 설한다.

자성 속의 중생이란 눈에 보이는 생명체가 아니라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내 생각’을 말한다. 즉 홀연히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번뇌 망상이 ‘나’ 속의 중생이다. 그러므로 자성번뇌서원단이 되면 자성중생서원도는 저절로 이루어진다.

자성번뇌서원단을 하는 방법은 자성 속에 이미 갖추어져 있는 백색 광명을 발현시키면 흑색의 번뇌는 저절로 사라진다. 그러므로 자성자리를 찾는 참선, 기도, 염불, 간경, 불공, 보시활동 등의 수행을 통해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 맑게, 그리고 밝혀가게 되면, 그것이 곧 자성불도서원성으로 자성의 불도를 저절로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번뇌를 끊고 ‘나’를 제도하기 위해서는 틈나는 대로 법문을 듣고 그 법을 실행에 옮기는 것이 중요하다. 잘 안되는 참선이요 염불일지라도 하고자 노력하고 또 노력하는 가운데 진전이 있는 것이다.

 

발원이귀명례삼보(發願已歸命禮三寶)

 

이제 『천수경』은 발원을 마치고 삼보에 대한 귀명례를 하며 끝을 맺는다.

 

나무상주시방불(南無常住十方佛)

나무상주시방법(南無常住十方法)

나무상주시방승(南無常住十方僧)

 

발원이 귀명례삼보

시방에 항상계신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시방에 항상계신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시방에 항상계신 스님들께 귀의합니다(3번)

 

발원이귀명례삼보(發願已歸命禮三寶)의 발원이(發願已)란 발원을 마치고의 뜻이니 사홍서원을 마쳤다는 말이다. 귀명례삼보(歸命禮三寶)란 불법승 삼보님께 내 몸과 마음 다 바쳐 예배드립니다라는 뜻이다. 사홍서원은 마쳤지만 그 서원을 성취하고 우리의 원력 달성을 위해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 그리고 스님들께 귀의함으로서 항상 삼보님과 하나 되어 위신력을 입기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치겠다는 결의이다.

나무(南無)란 몸과 마음 다 바쳐 예경합니다라는 말인데 지심귀명례(至心歸命禮)와 같은 의미이다. 상주(常住)란 시간적으로 항상 함께 계신다는 의미이고, 시방(十方)이란 공간적으로 언제 어디에서나의 의미이다. 상주시방불(常住十方佛)란 부처님께서 언제 어디에서나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말이고, 나무상주시방불(南無常住十方佛)은 언제 어디에나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부처님께 이 몸과 마음 다 바쳐 예경합니다, 혹은 지심귀명례(至心歸命禮)합니다. 이다.

언제 어디에서나 ‘나’와 함께 계시는 부처님이 되면 이 세상의 삼라만상 모두를 부처님으로 받아들이는 마음이 되어 섬기게 된다. 모두를 부처님으로 섬기게 되는 것은 시방세계 일체를 부처님의 화현이고 진리의 시현이라 우리를 깨우쳐 주고자 나투신 스승으로 보기 때문이다. 바람소리, 물소리, 중생의 하소연 등, 모든 것이 다 무엇 하나 놓칠 수 없는 부처님이요 법문이요 스승의 화현이다. 이렇게 되면 이 법계와 ‘나’는 이미 둘이 아니게 되며, 부처님의 가르침과 ‘나’의 실천이 그대로 하나가 된다.

정녕 시방에 상주하고 있는 불법승에 귀의하는 것은 ‘나’와 법계가 하나 되는 일이다. ‘나’와 법계가 함께 나누고 함께 누리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나는 부처님의 화현이 되고 관세음보살의 분신이 된다.

 

부디 잊지 마십시오. 밖으로 내딛는 실천의 한 걸음이 내 마음의 고향을 향한 귀한 한 걸음이 된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언제나 어디에나 계신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정삼업진언(淨三業眞言)

옴 사바바바 수다살바 달마 사바바바 수도함

옴 사바바바 수다살바 달마 사바바바 수도함

옴 사바바바 수다살바 달마 사바바바 수도함

 

정삼업진언은 신구의(身口意) 삼업을 깨끗이 하는 진언이다.

옴: 진언의 왕, 소리의 근원, 우주의 핵심, 섭복 / 사바바바: 본성(本性) / 수다: 청정(淸淨) / 살바: 일체 / 달마: 법(法) / 수도: 수다와 같음, 청정 / 함: 자기 자신 /

모두 합치면: 옴! 본성이 청정한 일체법이여, 내 본성도 청정하게 하여 지이다.

말하자면 이 세상의 모든 법은 본성이 원래 청정하고 훌륭한 것이므로 자신 또한 이 법과 더불어 청정하게 될 것을 기원하는 진언이다. 자성이 청정해지면 신구의(身口意) 삼업 중 의업(意業)이 청정해지는 것이니 구업(口業)과 신업(身業)은 의업에 따라 저절로 청정해진다.

 

 

개단진언(開壇眞言)

옴 바아라 놔로 다가다야 삼마야 바라베사야 훔

옴 바아라 놔로 다가다야 삼마야 바라베사야 훔

옴 바아라 놔로 다가다야 삼마야 바라베사야 훔

 

개단진언은 제단을 여는 진언이다.

바아라: 금강(金剛) / 놔로: 문(門) / 다가다야: 열다 / 삼마야: 삼매 / 바라베사야: 두루 들어가다 / 훔: 이구청정(離垢淸淨) /

모두 연결하면, 옴! 금강의 문이여 열려 지이다. 삼매에 두루 들어가 모든 때를 씻어내 청정하게 하리라.

지혜의 문을 열어 법계와 하나 되는 삼매에 두루 들어가 일체 더러운 것을 정화하여 청정케 하고자 하는 진언이다.

법요식을 위해 『천수경』을 독송하는 동안에 우리들의 삼업(三業)이 청정하여 지고, 삼업이 청정하여 지면 지혜로운 마음이 불단, 지장단, 신중단, 영단의 문을 열어 단을 차례로 청정하게 한 후 부처님, 지장보살님, 신중님 및 영가님들을 차례로 안좌(安坐)하시게 하여 그들과 하나 되어 삼매에 들어가 너와 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닌 부처님 세계와 완전히 하나 된 새로운 세계에 들어가라는 진언이다.

 

 

건단진언(建壇眞言)

옴 난다난다 나지나지 난다바리 사바하

옴 난다난다 나지나지 난다바리 사바하

옴 난다난다 나지나지 난다바리 사바하

 

건단진언은 ‘제단을 세우는 진언’으로 풀이해 보면,

난다: 환희의 신 / 나지: 건단 무녀신 / 난다바리: 희열의 낙원을 가지고 오다 / 사바하: 그렇게 이루게 하여 주소서 /

모두 합치면, ‘환희신이여, 환희신이여, 단을 세우는 무녀신이여, 단을 세우는 무녀신이여, 희열의 낙원을 펼쳐 주소서, 모든 일이 이와 같이 성취되게 하소서’라고 해석할 수 있다.

부처님과 완전히 하나 된 새로운 세계에서 제단을 건립하여 환희신이 희열의 낙원을 이루어 모든 일이 성취되게 하여 줄 것을 기원하는 진언이다.

 

정법계진언(淨法界眞言)

라자색선백(羅字色鮮白) 공점이엄지(空點以嚴之)

여피계명주(如彼髻明珠) 치지어정상(置之於頂上)

진언동법계(眞言同法界) 무량중죄제(無量重罪除)

일체촉예처(一切觸穢處) 당가차자문(當加此字門)

「나무 사만다 못다남 남」(3번)

 

정법계진언(淨法界眞言)

정법계진언은 앞에서 한번 나온 것으로 반복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라자색선백(羅字色鮮白) 공점이엄지(空點以嚴之)

라자색선백(羅字色鮮白)의 라자(羅字)는 “옴 람” 중 람의 ‘라’이다. ‘<라(羅)>의 글자는 색이 곱고 흰데, 공점이엄지(空點以嚴之) 공에 점으로 장엄했다인데 둥근 점으로 장엄했다고 해석한다.

‘옴 람’이라고 입으로 발성하는 소리의 파장은 우주의 근본 파장과 같은 사이클(cycle)이므로 우주의 진여(眞如)와 마음의 진여가 만나 즉시 하나로 합쳐지는 삼매에 들 수 있는 소리이다. 이러한 뜻을 가진 ‘옴 람’이란 소리를 ‘라(羅)’라는 글자로 색이 선명하고 희게 보이게 했다는 뜻이다.

이 ‘옴 람’의 소리는 부처님의 말씀 중에 원음(圓音)에 속하는 것으로, 부처님께서 원음으로 말씀하시면 어떠한 말을 상용어로 쓰는 사람이나, 어떠한 소리로 의사소통을 하는 중생도 언어의 형상을 초월하여 다 알아 듣고 환희심을 내고 깨달음을 얻은 중생도 있었다 한다. 이와 같은 뜻을 가진 부처님의 원음인 ‘옴 람’을 외워 공(空)한 마음에 점(點)으로 장엄한 것과 같다는 말씀이다. ‘옴 람’을 외울 때마다 태허(太虛)같이 빈 마음에 ‘옴 람’이란 화대(火大)의 종자가 심어진다고 생각하면 그 종자가 공한 가운데 점으로 장엄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공한 점을 이해하기 쉽지 않음으로 여기에서 ‘둥근 점’이라 했다.

그리고 ‘람’은 화대(火大)의 종자로 모든 번뇌 망상을 소멸하고 청정한 지혜를 솟게 하는 종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여피계명주(如彼髻明珠) 치지어정상(置之於頂上)

‘람’의 공한 점을 마치 상투를 밝은 구슬로 장식하는 계명주(髻明珠)와 같이 가장 높은 정상(頂上)에 안치(安置)하여 받들 것이니라. 라는 뜻이다.

소리를 잡을 수는 없는 것이지만 마음속에 새겨진 점을 머리보다도 더 높은 상투를 밝은 구슬로 장식하듯이 가장 귀중하게 모시고 받들려고 하는 마음에 공덕이 있고 복이 온다는 의미이다.

 

진언동법계(眞言同法界) 무량중죄제(無量重罪除)

진언은 법계와 같아서 무량한 중죄를 모두 제거한다.

‘옴 람’이란 진언(眞言)의 ‘옴’은 우주의 핵심이고, ‘람’은 화대(火大)의 종자로 모든 번뇌 망상뿐만이 아니라 일체 중한 죄업을 소멸하고 청정한 지혜를 샘솟게 하는 종자이니 내 마음이 청정해지면 법계와 하나가 된다는 진언이다.

 

일체촉예처(一切觸穢處) 당가차자문(當加此字門)

촉(觸)은 닿다, 부딪치다의 뜻이고, 예처(穢處)는 더러운 곳이니 어려움이나 괴로움이 있는 곳이라는 뜻이다. 가(加)는 더하다, 입다, 몸에 붙이다의 뜻이 있으니 두 구절을 합하면 일체 괴로운 일에 부딪쳤을 때 응당 이 글자(옴 람)를 그 곳의 문에 붙이라고 했으니 ‘옴 람’을 외우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어려움이 있을 때 반드시 ‘옴 람’을 외우면 관세음보살님이나 신장님께서 반드시 도와주실 것이라는 의미이다.

 

나무 사만다 못다남 남

나무 사만다 못다남 남

나무 사만다 못다남 남

 

끝으로 「나무 사만다 못다남 남」의 <남>은 보리문(菩提門)인 ‘불(火)의 종자’라는 뜻이다. ‘널리 두루 계시는 부처님과 그 제자들에게 귀의하여 받드오니 일체 더러운 것을 화대(火大)의 종자로 녹여버리고 깨달음의 길로 가게 하여 주소서’라고 해석할 수 있다.

 

『천수경』의 결론은 우리의 삶의 모든 현장에서 어둠과 두려움과 부정적인 것들이 모두 사라져 늘 기쁨과 희망, 안녕과 행복, 그리고 평화가 깃들어지도록 함에 있다. 단순히 경전을 해석하는 것에 그치지 말고 그 속에 숨은 뜻이 우리의 인생사 속에서 하나가 되어 삶에 유익한 보탬이 되기 위해 지극정성으로 대비주(大悲呪) 기도를 하여 『천수경』이 담고 있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비밀스런 경지와 일체(一體)가 되도록 하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방편문(方便門)이 열리어 자유와 평화를 누릴 수 있다고 하고 있다.

『천수경』을 통해서 관세음보살님의 자비를 바로 이해하고 실천하는 그런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천수경』을 공부한 이 인연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의 현장이 관세음보살님의 자비가 흘러넘치는 아름다운 불국토가 되기를 기원한다.

모두 함께 성불합시다.

 

 

 

 

 

...임에게는 아까운 것이 없이

무엇이나 바치고 싶은 이 마음

거기서 나는 보시를 배웠노라.

임에게 보이고자

애써 깨끗이 단장하는 이 마음

거기서 나는 지계를 배웠노라.

임이 주시는 것이라면

때림이나 꾸지람이나 기쁘게 받는 이 마음

거기서 나는 인욕을 배웠노라.

자나 깨나 쉴 사이 없이 임을 그리워하고

임 곁으로만 도는 이 마음

거기서 나는 정진을 배웠노라.

천하 하고 많은 사람 중에

오직 임만을 사모하는 이 마음

거기서 나는 선정을 배웠노라.

내가 임의 품에 안길 때에

기쁨도 슬픔도 나와의 존재도 잊을 때에

나는 반야를 배웠노라.

인제 알았노라.

임은 이 몸께 바라밀을 가르치려고

짐짓 애인의 몸을 나툰 부처시라고

 

....춘원 이광수님의 시 애인

육바라밀을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