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수경]6. 여래심대발언문

2007.03.01 02:00

여해 Views:13542

제6장 여래십대발원문

   

우리가 참회를 하여 업장을 소멸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들의 삶에 새로운 좌표를 설정하기 위함이다. 금생에서 뿐만이 아니라 우리들의 영원한 생명이 세세생생 걸어 가야할 좌표를 지금 이 자리에서 세우고자 하는 것이다. 이 좌표는 곧 우리들이 영원히 가야할 삶의 희망이 되고, 희망을 성취하고자 하는 힘을 생산하는 동력이 된다. 이 희망과 동력이 원력이 되어 우리들이 살아가는 힘이 되는 것이므로 원력이 곧 생명력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살아가는 힘은 곧 원력에서 나오는 것이요, 원력은 곧 생명력이다.

대부분의 재가신도들의 원은 ‘남편이 이번에 꼭 승진하게 해 주십시오’, ‘아들 딸 좋은 대학에 진학하게 해 주십시오’, ‘건강하고 무사하게 해 주십시오’, ‘더 편안하고 풍요롭게 해 주십시오’ 등이다. 소박하고 현실적인 당면한 원이다. 그리고 더 큰 원을 세우기 위해서는 이러한 소박한 가정적인 문제들이 기본적으로 갖춰져야 하리라고 본다. 『천수경』에서는 우리들로 하여금 이보다 더 큰 원을 세우게 하기 위해 여래의 열 가지 큰 발원문을 설하고 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여래십대발원문(如來十大發願文)

원아영리삼악도(願我永離三惡道)

원아속단탐진치(願我速斷貪瞋癡)

원아상문불법승(願我常聞佛法僧)

원아근수계정혜(願我勤修戒定慧)

원아항수제불학(願我恒隨諸佛學)

원아불퇴보리심(願我不退菩提心)

원아결정생안양(願我決定生安養)

원아속견아미타(願我速見阿彌陀)

원아분신변진찰(願我分身遍塵刹)

원아광도제중생(願我廣度諸衆生)

 

여래께서 발원하신 이 열 가지 발원문은 두 가지 의미로 접근할 수 있다. 하나는 여래께서 모든 중생을 제도함에 있어서 필요한 발원문을 설하셨다고 볼 수 있고, 다른 하나는 여래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을 위해 이와 같이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한다는 발원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어느 것이라 해도 상관없지만 공부하는 수자(修者)의 입장에서는 후자의 경우로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원아영리삼악도(願我永離三惡道)

삼악도(三惡道)는 육도윤회(六道輪廻)하는 세계 중 지옥, 아귀, 축생의 세계이다. 원아영리삼악도(願我永離三惡道)란 이와 같은 윤회의 사슬을 영원히 여의게 하여 주소서라는 서원이다. 그런데 이러한 악도의 세계가 우리들 마음 밖에도 있지만 우리들의 마음 안에도 지옥의 마음, 아귀의 마음, 축생의 마음이 있다.

지옥의 마음이란 우리들의 삶 가운데 문제성이 많은 마음이다. 내 마음에 문제성이 많으면 세상 사람들이 다 자기와 같다고 보기 때문에 자기가 가는 길로 남을 끌고 가려는 속성이 있어서 그와 인연된 사람들은 모두 비참한 현실을 살아가게 된다. 테러가 그 예로 사람을 파리 목숨만도 못하게 살해해 놓고도 뻔뻔스런 악마의 탈을 쓴 사람들도 있다.

아귀의 마음이란 굶주린 귀신의 마음이라 무엇이나 보는 대로 탐을 내 남의 사정은 전혀 볼 줄 모르고 자기 배만 채우려고 교묘한 수로 남을 속여 이익을 챙기거나 강도질을 하는 마음이다. 그러면서도 전혀 부끄러운 줄 모르는 사람들인데 현재 우리 사회에 이러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축생의 마음이란 동물 같은 마음이란 뜻인데 인면수심(人面獸心)이란 말과 같은 뜻이다. 사람의 탈을 쓰고 살면서도 전혀 사람 같지 않은 짐승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다. 뉴오린스 수재로 많은 사람들이 인명과 재산의 피해를 입고 있는 와중에도 총을 쏘고 불을 지르며 강탈을 일삼은 사람들이 있었다하니 수심(獸心)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는가.

우리들이 사는 이 세상이 어렵고 힘겹고 험난한 것은 이러한 삼악도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우리들의 마음속에도 그러한 마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니 항상 기도 정진하는 마음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모든 악도를 영원히 멀리 여의겠다고 아무리 생각하고 있어도 지식으로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므로 기도 정진하는 행이 반드시 따라줘야 모든 악도를 영원히 멀리 여읠 수 있게 된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끝임 없는 기도가 필요한 것이다.

 

원아속단탐진치(願我速斷貪瞋癡)

하루 빨리 탐진치를 끊기를 원한다는 서원이다. 탐욕의 마음이란 내 마음 가운데 자기 외에 다른 사람이 전혀 고려되지 않은 마음이다. 자기의 이익만을 취하려고 하고 남의 사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마음이 탐욕이다. 이 탐욕이 지독하게 심하게 되면 아귀의 마음으로 변한다. 탐욕의 마음은 순리적으로 자기 노력의 대가를 받고자 하는 마음이 아니라 자기 노력의 대가보다 훨씬 많은 것을 요구하는 마음이기 때문에 항상 불만이 많고, 불만이 깊어지면 화를 내 상대방을 불안하게 만든다. 이러한 사람은 현명하지 못함으로 어리석다고 한다. 어리석음은 탐욕, 탐욕은 화를 낳게 하여 자기의 주변을 온통 공포에 싸이게 한다. 언제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탐욕은 아귀악도와 비교되고, 불만은 괴로움의 원인이므로 지옥악도와, 화냄은 아수라와, 어리석음은 축생악도와 비교된다. 그러므로 지옥 아귀 축생 삼악도를 영원히 여의기 위해서는 탐진치 삼독심을 하루 속히 끊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원아속단탐진치(願我速斷貪瞋癡)를 발원하는 이유이다.

남의 것을 뺏고자하는 탐욕을 대치(對治)하기 위해 보시바라밀을, 화냄을 대치하기 위해 인욕바라밀을, 어리석음을 대치하기 위해 지계바라밀과 정혜(定慧)바라밀을 닦아야 한다. 육바라밀 수행은 불법승 삼보를 믿고 기도하는 마음에서 시작한다.

 

원아상문불법승(願我常聞佛法僧)

‘불법승 삼보를 항상 듣기를 원한다’는 서원은 부처님께 항상 공양 올리고 기도하며, 부처님의 생애 팔상성도를 새겨보는 마음을 가지며, 스님으로부터 부처님의 가르침 연기와 중도에 관해 배우고 그에 따라 행하며, 스님은 욕계, 색계, 무색계를 초월하는 공덕을 닦는 수행자이니 그들을 공경하는 것이라 하겠다. 부처님께 공양 올리고 기도한다는 것은 보시바라밀을 실천하는 기초단계라고 볼 수 있다. 부처님께 공양 올리고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아들 딸 남편 아내를 위해 불공할 수 있고 기도할 수 있으며, 나아가 사회와 국가를 위해서도 부처님께 불공 올리고 기도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부처님께 불공올리고 기도하는 마음은 부처님의 심오한 가르침을 배우고자 하는 마음의 싹을 틔워 불법을 배우게 된다. 불법을 배움으로써 탐진치가 개인에게, 사회에, 국가에 미치는 문제를 인식하게 되고 그에 대한 대안으로서 포괄적인 해법이 필요함을 깨닫게 된다. 그것이 바로 계정혜(戒定慧) 삼학의 수행이다.

 

원아근수계정혜(願我勤修戒定慧)

계정혜 삼학을 부지런히 닦기를 원한다는 서원은 앞에서 불법승 삼보에 대하여 항상 듣기를 원한다는 서원에서 실천하는 서원으로 넘어온 것이다. 여기에서의 계(戒)는 육바라밀 중 보시 지계 인욕 정진바라밀을 포함한 계로 보아야 한다.

계를 지킨다는 것은 일체 중생이 연기한다는 이치를 바르게 이해하고 그에 수순한다는 뜻이다. 연기하기 때문에 내가 계를 지키면 그 과가 나에게 오고, 계를 지키지 않으면 지키지 않은 과가 나에게 온다는 원리이다. 남을 위해 공덕을 지으면 그 공덕은 결국 나에게로 돌아오지만 남을 해(害)하면 그 해가 돌아 결국 나에게 온다는 우주의 법칙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육바라밀은 과거 생이나 금생에 알게 모르게 남에게 해롭게 한 과보를 소멸하기 위해 보시바라밀 수행을 계를 지키는 덕목 중 가장 으뜸으로 꼽는다. 보시바라밀은 과거에 지은 빚을 갚고 새로운 복을 쌓는 공덕이 되어 탐욕심이 변하여 평화로운 마음이 되게 한다.

오계(五戒)를 지키고 보살계(菩薩戒)를 지키는 것은 살생해서 지은 원한, 도둑질해서 지은 원한, 사음해서 지은 원한, 거짓말해서 지은 원한 등 모든 원한을 갚고 마음에 안정을 가져오게 한다. 인욕바라밀은 모든 화낼 일들을 지혜로서 슬기롭게 넘겨 화낼 일이 없게 한다. 정진바라밀은 더욱 열심히 보시 지계 인욕바라밀을 정진하여 정념(正念)에 들게 하고 정념은 다시 선정삼매(禪定三昧)에 들게 하고, 선정삼매는 지혜바라밀을 낳게 하여 모든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게 한다. 이와 같은 바라밀을 통해 부처님의 집에 들어가 부처님을 친견할 수 있게 된다.

 

원아항수제불학(願我恒隨諸佛學)

수(隨)에는 수행원이 되어 받들어 따라간다는 의미가 있으므로 이해하고 실천한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따라서 원아항수제불학(願我恒隨諸佛學)은 항상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하고 실천하겠다는 서원이다.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하고 실천하기 위해서는 먼저 절에 열심히 다니고 절에서 가르치는 불법을 바르게 배워 바르게 행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원아불퇴보리심(願我不退菩提心)

보리심이란 아뇩다라삼먁삼보리(Anuttara Sam Myak Sam Bodhi),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이다. 이 마음에서 물러서지 않겠다는 서원이다. 부처님께서도 수많은 전생에서 불퇴전(不退轉)의 마음으로 꿋꿋하게 구도자의 길을 걸어오셔서 금생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셨다. 목표가 원대하면 원대할수록 고통과 역경의 골은 깊은 것이기에 퇴전하기 쉽다. 그러나 고통과 역경을 기쁨과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마니보주로도 볼 수도 있기 때문에 퇴전할 이유가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고통과 역경이 없이는 기쁨과 즐거움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금생에 기필코 성불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정진할 뿐이다.

 

원아결정생안양(願我決定生安養)

불퇴전의 마음으로 앞으로 앞으로 나아갈 뿐인 사람에게는 결국 번뇌와 마장이 모두 녹아내려 무한한 즐거움의 세계에 들게 된다. 이 즐거움의 세계를 안양국(安養國)이라고도 하고 극락세계 혹은 열반이라고도 한다. 지고(至高)한 복락(福樂)의 세계이다.

수행을 거듭하면 할수록, 번뇌를 극복하면 할수록, 우리들 마음속에 한없는 평화와 안락의 경계가 열려가는 것을 체험한다. 끊임없는 수행 가운데 물질세계에 대한 여러 가지 속박을 이겨내게 되고, 그 결과 차원이 다른 즐거움의 세계를 열어갈 수 있다. 마음이 먼저 극락이 되지 않으면 극락에 갈 수 없으니, 우리의 마음을 극락으로 만들어가는 비결은 한없는 수행이다. 불퇴전의 마음으로 끊임없는 수행을 감행하는 것이다. 결정코 극락에 나게 될 것이다.

 

원아속견아미타(願我速見阿彌陀)

아미타부처님을 하루 속히 만나기를 발원합니다. 불퇴전의 마음으로 결정코 안양국(安養國)에 도달하였으니 아미타부처님을 친견하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발원이다. 친견은 곧 본성을 보는 것이므로 성불을 뜻한다.

범어 ‘아미타’를 시간적으로 번역하면 무량수(無量壽)이고, 공간적으로 번역하면 무량광(無量光)이다. 한량없는 수명과 한량없는 광명 그 자체인 아미타부처님을 친견하는 것은 참으로 무량한 복덕을 지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이루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불퇴전의 마음으로 기도 정진하는 사람에게는 불가능이 가능해져 모든 일이 순조로이 풀려나가는 법이다. 그리고 아미타부처님을 친견하면 성불의 대도를 성취한 것이다. 아미타불의 광명과 ‘나’의 광명이 하나로 합해지면서 성불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부처님을 친견하기 위해 건너야 할 수행단계는 수많은 고행(苦行)이 따르겠지만 그 때마다 불퇴전의 마음과 헌신적인 마음으로 극복해 가야 아미타부처님의 자비광명을 구경에 입을 수 있을 것이다.

 

원아분신변진찰(願我分身遍塵刹)

분신(分身)이란 내 몸이 수많은 미진(微塵)으로 나누어진다는 뜻인데 내 마음이 수많은 사람에게 전달되어 내 마음과 똑같은 사람이라는 말이다. 변진찰(遍塵刹)은 우주 곳곳마다 두루 있는 것을 의미한다. 원아분신변진찰(願我分身遍塵刹)은 나와 똑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우주 곳곳에 두루 있게 되기를 원한다는 발원이다. 위에서 아미타부처님을 뵙고 성불하였으니 몸을 자유자재로 어느 때 어느 곳에나 나툴 수 있는 몸이 되기를 발원하는 것이다.

나와 똑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우주 곳곳에 있을 수 있는 사람은 어떠한 사람일까? 그 사람의 마음이 우주의 진리와 하나 된 사람이다. 진리와 하나 된 사람은 우주와 하나 된 사람이고, 우주와 하나이니 곳곳마다 내 마음과 똑 같은 사람이 있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내 마음이 곧 진리이니까. 이와 같이 진리로써 분신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부처님과 하나 되어 부처님의 분신이며, 부처님의 마음을 이루어 성불한 사람이다. 물질세계에 대한 모든 번뇌를 이긴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은 우주 어느 곳에나 필요한 때에 나툴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다.

 

원아광도제중생(願我廣度諸衆生)

‘널리 모든 중생을 제도하고자 발원합니다.’ 여래 십대 발원문 중 앞의 아홉 가지는 마지막 광도제중생(廣度諸衆生)을 위해 필요한 조건들이라 생각된다. 널리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면 닦아야 할 과정들이다. 이것이 곧 대승불교의 보살도인 동시에 모든 불자(佛子)들이 해야 할 과제이다.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우리들이 성불해서 중생을 제도해야 한다는 가르침이 다른 종교에서 하나님이 죄인을 구원한다는 교리와 다른 점이다.

현대사회는 인류 역사상 어느 때보다 풍요롭게 살면서도 불만이 많고 스트레스에 싸여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은 먹고 살기가 어려워서가 아니라 급변하는 현시대상항에 자기를 적응시켜가기가 점점 어려워져가기 때문이다. 불자들은 이들의 마음 가운데 진리의 등불을 밝혀주어야 한다. 개인의 자유가 중요하고 때론 이기심도 필요하지만 전체의 균형을 깨가면서 자유를 찾고 이기심을 내세우면 부작용이 크게 생기는 법이고, 이 부작용은 전체의 이익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개인의 이익과도 상반되는 법이니, 전체의 균형 있는 발전을 도모하는 범위에서 개인의 자유를 누리고 건전한 이기심을 발휘하면 개인의 이익이 곧 전체의 이익이 되고 전체의 이익이 곧 개인의 이익이 될 수 있다는 진리이다. 이 진리의 등불을 부처님께서 연기법이라 하셨다. 아무리 물질만능시대라 하더라도 이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것이 자신을 포함하여 아무 것도 없으니 언젠가는 물질만능시대가 다른 시대로 바뀌게 되고 나도 바뀌게 되어 있으니 물질에 집착할 것도 없고 ‘나’라는 존재에 대한 집착도 할 것이 없다. 집착을 버리면 대 자유를 얻고 차원이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는 지혜를 얻어 영원히 불변하는 진여(眞如)의 세계에 안주하게 된다. 이것이 영원히 불변하는 진리의 등불이다.

이 등불이야 말로 광도제중생(廣度諸衆生)하는 진리의 등불이니 병든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 이 시대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모든 불자(佛子)들은 이 진리의 등불을 들고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야한다.

실로 시방세계의 모든 부처님은 이상의 십대발원에 의해 부처를 이루었고, 우리 또한 성불하고자 한다면 이 열 가지 대원을 발하여야 한다. 또한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도 이 대원은 우리에게 중요하다.

이상에서 보듯이 『천수경』의 내용은 소원과 원력 기도로 가득 차 있다. 그만큼 진언이나 다라니의 구절에는 원력을 성취시킬 만한 힘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여래의 열 가지 큰 발원문

삼악도를 영원히 벗어나기 원합니다

탐진치를 신속히 끊어내기 원합니다

불법승의 말씀을 항상듣기 원합니다

계정혜를 부단히 닦아가기 원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 늘배우기 원합니다

보리심에 항―상 머물기를 원합니다

안양국에 결정코 태어나기 원합니다

아미타불 신속히 만나뵙기 원합니다

곳곳마다 나투어 불법펴기 원합니다

모든중생 기어코 제도하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