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관세음보살 십대원(十大願) 【 1 】기도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속지일체법(願我速知一切法)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조득지혜안(願我早得知慧眼)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속지일체법(願我速知一切法)

나무대비관세음(南無大悲觀世音)의 나무는 ‘나모 namo’라고도 발음하는데 그 뜻은 몸과 마음을 다 바쳐 귀의합니다 이다. 대자대비하신 관세음보살님께 귀의하는 마음으로 몸과 마음을 다 비워 정성스럽게 기도하는 마음이다. 기도의 극치의 대명사가 ‘나무’이다. 우리가 몸과 마음을 다 비워 관세음보살님께 기도하는 마음이 우러나야,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수많은 번뇌들이 다 녹아내려 세척진로(洗滌塵勞)되어서 바다를 건너는 일체법을 신속하게 알게 된다.

일체법(一切法)이란 광대무변한 우주의 법칙이다. 이 광대무변한 우주의 법칙을 부처님께서 망원경이나 어떤 기계를 가지고 우주의 법칙을 찾아낸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마음 안에서 이 우주는 가장자리가 없는 천체(天體)인 것을 아시고 그가 성주괴공(成住壞空)하는 법을 깨치셨다. 현대과학에서 인력(引力)이나 상대성원리(相對性原理)같은 법칙을 부처님은 연기법(緣起法)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는 다른 종교에서 찾아 볼 수 없는 불교의 우주관이다. 그리고 이 법칙에서 인간이 고통 받는 원인과 극락세계로 가는 일체법을 아시고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셨다. 그러므로 광대무변한 우주의 법칙을 포함한 모든 법은 부처님의 마음 안에 있었으므로 우리 인간의 마음의 법, 즉 심법(心法)안에 있다. 따라서 일체법을 알고자 한다는 말의 뜻은 우리들의 심법(心法)을 알고자 한다는 의미로 바꾸어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광대무변한 우주의 법칙을 깨닫고 심법(心法)을 알고자 하는 사람이 조금이라도 오염된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 오염에 가리어 절대로 만법을 볼 수 없다. 우주의 법칙을 깨닫기를 원하는 사람은 우선 마음속에 모든 오염된 마음을 깨끗이 씻어내기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쳐 대자대비하신 관세음보살님께 일념으로 기도해야 한다.

내가 받는 모든 고통과 번뇌의 원인이 되는 일체법을 알고자 하니 이는 집제(集諦)에 해당된다.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조득지혜안(願我早得知慧眼)

지혜안(智慧眼)이란 탁월하고 걸출한 아이디어를 내는 눈이다. 가정생활에서나 직장 일이나 사업에서나 걸출한 아이디어가 있는 사람이 모든 사람에게 이익을 주고 자기에게도 이익이 되는 일을 할 수 있다. 학생도 마찬가지 이다. 아이디어가 있는 학생이 우수할 수 있다. 지혜의 장애는 번뇌 망상이다. 번뇌나 망상에 가려지면 지혜가 샘솟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일체법을 알기 위해 세척진로를 해야 하고, 일체법을 알게 되면 지혜의 눈이 열린다. 그러므로 지혜의 눈의 열쇠는 일체법을 아는 것이고, 일체법을 아는 열쇠는 세척진로이다. 세척진로의 열쇠는 ‘나무대비관세음’을 염송하는 오직 일념의 기도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이 우주의 법도를 알아야 한다. 법도를 모르고 함부로 살아서는 재앙, 고통, 실수, 질병의 장애를 면할 수 없다. 시험 답안을 쓰는데도 길이 있고 요령이 있듯이 이 세상을 살아감에도 우주의 법도에 따라 살아가는 길이 있고 요령이 있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 맑고 밝은 사람에게는 이와 같은 길이 보이고 요령이 생기는 법이다.

법도란 무슨 말인가?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선문답이 있다. 만법이 하나로 돌아간다는 말은 일체가 하나로 돌아간다는 말인데 이 말은 내가 밥을 먹지 않으면 배가 고픈 것이 자기만 그런 줄 알고 자기 배만 채우려고 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고, 누구나 다 배가 고플 것이라고 생각하고 나누어 먹으려고 하는 사람은 만법을 아는 사람이고 지혜로운 사람이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일체법이 하나로 돌아간다는 이치를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자기 생명이 귀한 줄 알고 자기만 살겠다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고, 자기 생명이 자기에게 제일 귀하다면 일체 중생이 다 각기 자기 생명을 제일 귀하게 생각할 것이라고 생각 할 줄 아는 사람은 만법을 아는 사람이고 지혜로운 사람이다. 이것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법도이다.

‘나무대비관세음’을 염송하는 사람이 지혜의 눈이 빨리 열리게 되기를 기원하는 발원문이다.

나의 앞에 놓여 있는 고통의 실상을 바로 볼 수 있는 지혜의 눈을 얻고자 함으로 이는 바로 고제(苦諦)이다.

관세음보살 십대원(十大願) 【 2 】지혜 방편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속도일체중(願我速度一切衆)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조득선방편(願我早得善方便)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속도일체중(願我速度一切衆)

‘나무대비관세음’하며 기도하는 일념은 우주의 일체법을 깨닫게 하고 그에 따라 응용할 수 있는 지혜의 눈을 열리게 한다. 이와 같이 ‘나무대비관세음’을 염송하는 사람은 마음을 텅 비우게 되니 사리사욕(私利私慾)에 물들었던 이기심이 녹아 사라진다. 이기심은 번뇌의 뿌리이기 때문에 이기심이 소멸됨에 따라 일체중생이 두루 하나임을 깨닫게 되어 마음이 넓어지고 포용력이 생겨 일체중생의 이익을 도모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게 된다. 이러한 원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 원을 성취하게 하는 지혜 방편의 문도 넓어진다.

일체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이 원이 하나의 구호에 불과한 경향이 있다. 병든 이나 괴로운 일이 있는 사람을 가까이 해 위로하고, 시카고에서 아직 정착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자주 만나 가까이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현실에 맞는 중생구제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문제에 좀 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대비하신 관세음보살님께 이 목숨 다 바쳐 귀의하오니 원하옵건대 이 법계의 일체중생을 하루 속히 제도(濟度)할 수 있게 하여 주소서.

나보다도 더 심한 고통의 바다에 빠진 중생들의 고통을 제도(濟度)하고자 하니, 곧 도제(道諦)이다.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조득선방편(願我早得善方便)

일체중생을 속히 제도하겠다는 대원을 세웠으니 그 원을 성취할 수 있는 방편이 필요하다. 방편은 마음을 비우고 사는 사람에게 나온다. 마음을 비우는 사람에게는 번잡한 생각들이 일어나지 않음으로 장애를 받지 않는다. 마음을 비우는 사람은 자기중심적인 생각에서 벗어나기를 원하기에 제도를 받아야 할 중생 입장으로 생각이 바뀐다. 그 중생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그를 도울 것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가운데 그에 필요한 응용력이 생겨 그 중생을 제도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는 전기제품, 전자제품, 공구(工具), 기계, 자동차, 비행기, 발전소, 전기, 통신, 의학 등 다양한 면에서 이들을 연구한 사람들은 많은 사람에게 이익이 되는 상품을 개발하는 것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면 될 수록 그 상품은 더욱 유명해 진다. 이들을 개발함에 필요한 응용력이 선방편(善方便)이고 중생을 고통에서 구함에 필요한 지혜력이 선방편이다. 어느 쪽이나 자기를 비우고 상대를 위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선방편이 나온다. 그러나 상대를 위하기보다 자기중심적인 욕망을 체우고자 하는 마음에는 악방편(惡方便)이 생긴다. 악방편은 모든 사람들이 다함께 잘살아야 하는 사회질서를 교란하고 중생들에게 해(害)가 되며 자신의 죄업장을 더욱 중(重)하게 하여 결국 고통의 길로 가게 된다.

대비하신 관세음보살님께 이 목숨 다 바쳐 귀의하오니 원하옵건대 이 법계의 일체중생을 제도할 수 있는 훌륭한 방편을 하루 속히 얻게 하여 주소서.

고해(苦海)에서 고통 받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훌륭한 방편을 얻고자 함으로 도제(道諦)에 해당된다.

 

관세음보살 십대원(十大願) 【 3 】부처님의 나라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속승반야선(願我速乘般若船)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조득월고해(願我早得越苦海)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속승반야선(願我速乘般若船)

원아속승반야선(願我速乘般若船)의 반야선(般若船)은 부처님의 나라로 가는 배이다. 이 반야용선(般若龍船)만 타면 부처님 나라로 가게 되어 있다. 그러나 기차를 타든 배를 타든 비행기를 타든 그 급에 따라 대가를 치루 듯 반야용선을 타는데도 그 급에 따라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 대가는 잠시도 함부로 살지 말고 천수경이나 대비주를 항상 염하여 관세음보살님을 마음속 깊이 모시고 남을 위해 기도하는 마음을 항상 이어가는 것이다. 즉 천수경 독경과 대비주 염송이 바로 반야선에 승선(乘船)하는 것이므로 업장이 소멸되고 대 방편의 지혜가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반야선에 타기만하면 반야지혜가 샘솟듯 솟아나는 배인지, 반야를 향해가는 배인지 잠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반야지혜가 샘솟듯 솟아나는 배이라면 고해(苦海)를 이미 건너간 상태이므로 여기에서의 반야선(般若船)은 반야를 향해 가는 배라고 봄이 옳다고 생각된다. 반야를 향해 가는 배라면 모든 번뇌 망상을 씻어내는 대비주를 전념으로 암송하는 단계가 반야를 향해가는 배라고 볼 수 있다.

그러기에 대비하신 관세음보살님께 몸과 마음 다 바쳐 귀의하오니 원하옵건대 이 법계의 일체중생과 더불어 열반의 세계로 가는 반야선(般若船)을 하루 속히 탈 수 있게 하여 주소서 하고 기도하는 것이다.

중생을 고통에서 해탈하게 하는 도(道)는 반야지혜이니 이는 곧 도제(道諦)이다.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조득월고해(願我早得越苦海)

앞의 구절에서 반야선을 탔으니 고통의 바다를 하루 속히 건너기를 원한다. 위에서 탄 어떠한 교통편을 이용하더라도 도중하차하여 다른 볼 일을 보게 되면 그 교통편을 놓치게 되는 것과 같이 천수경, 대비주, 혹은 어떤 진언을 택하여 염송하는 도중 염을 놓치면 반야선에서 내린 것과 같은 결과를 가져와 고통의 바다에서 헤매게 된다. 고통의 바다를 하루 속히 건너 부처님의 나라에 가기 위해서는 반야용선을 탔다고 교만하거나 안심하지 말고 대비주를 염송하는 마음을 잠시도 놓치지 않으면서 하루하루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금생에 이 고통의 바다를 건너 부처님의 나라에 갈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금생에 고통의 바다를 건너기 어려울 것이다. 대비하신 관세음보살님께 이 몸과 마음 다 바쳐 귀의하오니 원하옵건대 이 법계의 일체중생과 더불어 이 고통의 바다를 하루 속히 건너게 하여 주소서.

반야지혜로써 고통의 바다를 건널 수 있으니 이 또한 도제(道諦)이다.

 

관세음보살 십대원(十大願) 【 4 】계정혜(戒定慧) 3학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속득계정도(願我速得戒定道)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조등원적산(願我早登圓寂山)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속득계정도(願我速得戒定道)

반야용선을 타고 고통의 바다를 건너 부처님의 나라에 가고자 대비주를 외우는 사람의 자격요건이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이다. 수행자로서 계(戒)를 지키지 못하면 정(定)과 혜(慧)를 이룰 수 없다. 그러나 계를 바르게 지키면서 천수경을 열심히 독경하고 대비주를 일념으로 염하는 사람은 정을 이룰 수 있고, 정이 깊어지면 혜가 따른다. 이 혜가 곧 원적산(圓寂山)이고 부처님의 나라이다.

계를 잘 지킨다는 뜻은 내가 계를 잘 지키는 행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남이 계를 지키지 못하였을 때 그를 비방하거나 하열한 사람으로 생각하거나 취급하는 행위를 하는 것은 내가 나의 계를 바르게 지키지 못하는 것이요 그를 도와서 계를 지키도록 인도하여 주는 것은 나의 계를 내가 바르게 지키는 것이다.

대비하신 관세음보살님께 이 몸과 마음 다 바쳐 귀의하오니 원하옵건대 이 법계의 일체중생과 더불어 계정혜(戒定慧)를 닦는 도(道)를 하루속히 얻게 하여 주소서. 반야지혜는 계정혜 삼학을 닦는 수도(修道)에서 나온다. 이 때 계(戒)에는 보시 지계 인욕 정진이 포함되니 역시 도제(道諦)이다.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조등원적산(願我早登圓寂山)

원적(圓寂)이 되면 그 곳이 곧 부처님의 자리이므로 원적산(圓寂山)이라 하면 부처님이 계신 산이라 할 수 있으니, 부처님이 계신 산에 하루 속히 오르고자 하는 원이다. 즉 성불(成佛)하고자 하는 원이다.

대비하신 관세음보살님께 이 몸과 마음 다 바쳐 귀의하오니 원하옵건대 이 법계의 일체중생과 더불어 원만하고 고요한 부처님이 계신 산에 하루 속히 오르게 하여 주소서. 원적산(圓寂山)에 오른다는 것은 등산할 때 산 밑에서부터 시작하여 봉우리까지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오르듯이 계정혜 삼학을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하나 빠짐없이 닦아 반야지혜를 일으키는 원적(圓寂)에 오른다는 뜻이니 이 또한 도제(道諦)이다.

 

관세음보살 십대원(十大願) 【 5 】부처님의 몸과 마음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속회무위사(願我速會無爲舍)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조동법성신(願我早同法性身)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속회무위사(願我速會無爲舍)

무위사(無爲舍)라 함은 부정(不淨)한 것이 없는 깨끗한 집이니 부처님의 집이다. 나를 위해 구하는 것이 있거나 욕심을 내는 것은 유위(有爲)이고 부정(不淨)한 것으로 보지만 나의 상대를 위하고 사회를 위하고 나라를 위하고 일체 중생을 위하여 하는 행위는 나를 위해 하는 것이 아니므로 무위(無爲)이고 청정한 행위이다. 오직 중생 구제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치신 부처님께서 머무시는 곳이 무위사이다. 그러하니 원아속회무위사(願我速會無爲舍)는 하루 속히 부처님의 집에서 모두 함께 만나기를 원합니다 이다.

대자대비하신 관세음보살님께 이 몸과 마음 다 바쳐 귀의하오니 원하옵건대 이 법계의 일체중생과 더불어 부처님의 집에 하루속히 도달하게 하여 주소서. 부처님이 계시는 집에 도달하니 이는 멸제(滅諦)이다.

원적산(圓寂山)과 무위사(無爲舍)에 대한 설명이 필요해 한 실화 예를 들고자 한다. 제가 화계사 불교대학에서 강의 할 때 한 보살이 저를 찾아 왔는데 그 때 그 분은 얼굴에 근심 걱정이 가득 차 붉은 색에 검정 색이 섞여 있는 정도였다. 사연인즉 결혼을 해 아들 둘을 놓은 후 어떻게 하다 자기 남편이 자기와 만나기 전에 결혼을 했었고 전 처와 이혼한 남자였는데 남편에게 속은 것이 너무나 억울하여 이혼을 하려고 해도 아들이 둘이나 있으니 이혼도 할 수 없고 자기를 속인 남편이 너무나 미워 자기 마음을 달랠 길이 없어 술을 마시기 시작한 지 20년이 가까이 되다보니 자기는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는데 자기 친구가 화계사 불교대학에 현성스님 강의를 들어보라고 해서 한 학기 들었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하면서 위와 같은 자기의 사정을 이야기 하면서 앞으로 자기가 어떻게 해야 술을 끊고 대학 입시를 앞둔 아들을 좀 돌볼 수 있겠는가고 문의 하였다.

나는 그 보살에게 불교에서 경영하는 장애자 복지회가 있는데 그 곳에 가서 자원 봉사를 한 주에 한번씩 할 것을 권하였다. 그는 이 권유를 받아 들여 그 복지회에 가보니 장애자 목욕시키는 자원봉사자가 필요하다고 하여 그렇게 정하고 왔다고 나에게 알려주었다. 그 보살이 한 달 이상 장애자를 목욕시키는 봉사를 하면서 자기가 만일 술을 계속 마시다 풍이라도 맞아 이와 같이 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자기 남편이 전 처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건강하지 않는가? 만일 전 처가 없는 대신 무슨 사고로 불구자가 되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등등을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감자기 남편에게 감사한 생각 아들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서 알코올 중독자라고 화 한 번 내지 않고 자기를 위로해 주었던 자기 남편, 그리고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는 아들들에게 너무 큰 죄를 지어 가며 살았던 자기를 발견하게 되어 부처님께 끝없는 참회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는 오직 남편과 두 아들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부인이 되고 어머니가 되었다.

여기에서 남편이 잘못한 것을 탓하며 남편을 끝까지 용서하지 못하는 행은 자기를 알코올 중독자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남의 잘못을 용서해야 하는 계를 어기며 자기 생각 속의 삶을 살아 온 것이다. 여기에는 번뇌도 많고 망상도 많은 삶이다. 그러나 남편의 과거 잘못을 이해하고 남편이 건강한 것을 오히려 고맙게 생각하고 오직 남편과 자식을 위해 살겠다는 마음은 무위심(無爲心)이요 모든 근심 걱정을 떨쳐버린 적정(寂靜)한 삶이 곧 원적산에 오른 것이다.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조동법성신(願我早同法性身)

법성(法性)은 법신(法身)의 성품이고 법신은 진여(眞如)이며 불생불멸(不生不滅)하는 각(覺)의 본체이다. 이를 우리는 참된 부처라 부른다. 조동(早同)은 빨리 같게 한다는 뜻이니 원아조동법성신(願我早同法性身)은 하루속히 부처님과 같은 몸이 되기를 원한다는 뜻이다. 성불(成佛)하고자 하는 원을 발원하는 것이다.

법성신(法性身)과 같게 되기를 원한다는 것은 내가 내 밖에 계시는 부처님의 법성신과 같게 되기를 원한다는 뜻도 아니고, 내 자신에게 법성이 없는 것을 새로 만들어서 법성신과 같게 되기를 원한다는 의미도 아니다. 원래 무시이래로 내 자신에게 이미 있는 법성신을 일깨워 일으켜서 불생불멸하는 참나, 본래의 법성신으로 돌아가는 것을 법성신과 같게 되기를 원한다고 한 것이다. 즉 참나와 법성신은 같은 하나를 다르게 표현한 것이다. 법성신을 일깨워 일으키는 방법은 여래 십대 발원문 중 앞 아홉 가지를 차례로 닦아 성취하면 열 번째 법성신이 내 자신에서 저절로 발현(發現)되는 것이다.

대자대비하신 관세음보살님께 이 몸과 마음 다 바쳐 귀의하오니 원하옵건데 이 법계의 일체중생과 더불어 법성신(法性身)과 하루 속히 똑 같게 하여 주소서. 법성신(法性身)과 똑같이 되기를 원하니 이 또한 멸제(滅諦)이다.

 

관세음보살 십대원(十大願)은 가장 아름답게 묘사된 위대한 발원문이다. 나무대비관세음(南無大悲觀世音)은 기도하는 사람의 가장 지극한 마음을 표하고 있다. ‘이 몸과 마음 다 바쳐 대자대비하신 관세음보살님께 귀의하오니’ 이 얼마나 지극하고 간절하게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는가.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은 이와 같이 되어야 하고 또 꾸준하게 진행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지극한 마음으로 꾸준하게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 속에서 자신과의 만남을 이루어 이 우주의 일체법을 깨닫게 되니 원아속지일체법(願我速知一切法)을 이루게 된다. 일체법을 깨달아 그를 필요에 따라 이용할 수 있는 지혜의 눈이 생기니 원아조득지혜안(願我早得智慧眼)을 이루게 된다. 지혜의 눈으로 중생의 고통을 살피고 그를 제도하여 주니 원아속도일체중(願我速度一切衆)을 이루게 되지만, 일체중생을 제도하다 보니 여러 가지 좋은 방편이 필요한데, 지혜를 가진 눈으로 많은 중생을 제도한 공덕으로 훌륭한 방편을 항상 얻게 되니 원아조득선방편(願我早得善方便)을 이룬다. 좋은 방편으로 중생을 제도하다 보니 모두 함께 부처님을 친견하러 가고자 한다. 친견하러 가기 위해 배편을 마련하여 그를 타고 대비주를 간절한 마음으로 염하니 원아속승반야선(願我速乘般若船)을 이루고, 부처님의 나라로 가는 반야용선을 타고 대비주를 일념으로 염하며 고해(苦海)를 건너니 원아조득월고해(願我早得越苦海)를 하게 된다. 고해를 건너려하니 계정혜(戒定慧)란 이름을 가진 길이 보인다. 이 계정혜(戒定慧) 삼학이라는 길을 따라가니 원아속득계정도(願我速得戒定道)를 하게 된다. 이 계정혜(戒定慧) 삼학의 길을 끝까지 따라가니 부처님이 계시는 원적산(圓寂山)이 보인다. 그 원적산의 산정(山頂)에 오르니 원아조등원적산(願我早登圓寂山)하게 된다. 원적산(圓寂山)에 도달하고 보니 부처님이 사시는 무위(無爲)라는 이름을 가진 집이 보인다. 이 집에 모두 함께 들어가니 원아속회무위사(願我速會無爲舍)를 하였다. 부처님이 사시는 무위 집에 들어갔으니 부처님을 친견하게 된다. 부처님을 친견하여 원아조동법성신(願我早同法性身)을 하고 보니 내 밖에 있는 부처님과 내가 같아진 것이 아니라, 법성신 즉 부처님은 원래부터 내 마음 안에 있는 법성이고 이 법성신이 곧 나의 불성(佛性)이었음을 깨달아 나의 불성으로 돌아와 하나가 되었다. 내 마음 안에 불성(佛性)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성불(成佛)할 수 있는 소질(素質)을 가지고 있다. 불성이 없다면 성불은 불가능하다.

기도를 통해 성불하는 단계가 너무나 아름답게 그리고 훌륭하게 표현되어 있다.

 

여래 십대 발원문에서 관세음보살 대비주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무장되어 법성신과 하나 되고 이 우주의 진리와 하나 되는 수행자가 되었을 때 아래와 같은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