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청년회] ‘나’와 행복

2014.01.01 15:06

현성스님 Views:5529

선우청년회 법문 3. ‘나’와 행복

 

행복의 주체는 ‘나’이다. 그러니 ‘나’는 누구인지, ‘나’는 무엇인지, 그리고 ‘나’는 어떻게 되어 있는지 정도는 알아야 ‘나’의 행복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있지 않을까?

우선 15분 동안 이 주제로 참선한 후 각자의 답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이미나입니다.

‘이미나’는 ‘미나’의 이름이라 ‘미나’라는 사람을 대변하는 이름입니다. ‘이미나’라는 이름으로 대변되는 그 사람은 누구일까요?

글세요. ‘나’는 나를 창조해 가는 창조주입니다.

어떻게 자신을 창조해 가십니까?

‘내’ 자신의 노력과 주위의 도움을 받아 ‘내’ 자신을 창조해 갑니다.

주위의 도움을 받아 ‘내’ 자신이 원하는 바를 정하고, 주위의 도움을 청하여 그 원하는 바를 이루려고 노력합니다. 이 과정에서 ‘나’를 창조해 갑니다.

 

주위의 도움과 나

내가 원하는 바를 정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이루고자 하는 노력의 과정과 이룬 것을 중생에게 회향하는 모든 나의 행위는 모두 주위의 도움에 의하여야만 가능하다.

즉 나는 주위의 도움을 받아 존재할 수 있고, 삶을 유지할 수 있으며, 자신의 세계를 창조해 갈 수 있다. 주위의 도움이란 부모, 형제, 자매, 주위의 모든 사람들, 공기, 물, 땅, 햇볕, 자연, 모든 사물, 문화, 문명 등 한없이 많은데, 이들은 모두 ‘나 아닌 것’들이다.

그러므로 ‘나’는 ‘나 아닌 것’의 도움 없이는 잠시도 존재할 수도 없고, 삶을 유지할 수도 없으며, 스스로를 창조해 갈 수도 없다. 그러므로 ‘나’는 ‘나 아닌 것’의 덕분으로 존재할 수 있고, 삶을 유지할 수 있으며, 스스로를 창조해 갈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나 아닌 것’들과 분명히 달라서 구분할 수는 있지만 분리(分離)하여 때어 놓을 수는 없다. 때어 놓을 수 없으므로 모두가 한 몸이다.

즉 지구 전체, 더 나아가 우주 전체가 한 몸이 되는 동체(同體)이다. 이런 이치를 모르고 자신의 힘으로 자신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부처님께서 어리석다고 하신 것이다.

 

연기법적으로 보는 단위체로서의 나

한 몸의 가장 작은 단위체로서의 ‘나’는 몸과 마음이 하나 된 ‘나’이다.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나는 건강할 수 없으며, 몸과 마음이 하나로 움직이는 나는 건강하다. 가정을 한 단위체로 보면 나는 부모, 부부, 자녀들과 모두 하나가 된 몸으로서의 ‘나’이다. 가족을 구성하는 구성원들이 각기 자기의 이익을 위해 개별적으로 놀면 그 가족은 약하고 불행할 수밖에 없지만 그 구성원 모두가 각기 가족 전체와 하나 된 몸으로서의 '나'를 인정하고 그렇게 생각하고 행한다면 그 가족은 강하고 행복한 가정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직장의 단위체로서의 나는 직장의 사장을 비롯한 윗사람, 동료, 하급자, 그리고 직장의 장비 도구 등 일체와 하나 된 몸으로서의 ‘나’이라고 직원 모두가 인식하고 행한다면 그 직장은 흥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불타사와 관계에서의 나는 주지스님을 비롯한 모든 신도들과 어린이들 그리고 시설물 등 불타사 일체와 하나 된 ‘나’가 있고, 국가와의 관계에서도 국가 전체와 하나 된 ‘나’가 있으며, 지구 촌 전체와 하나 된 ‘나’가 있고, 이 우주와 하나 된 ‘나’가 있다. 이와 같이 내가 속한 조직 기관 전체와 하나가 되어 그 전체를 창조해가는 주인으로서의 ‘나’이다.

여기에는 개인주의적인 ‘나’는 있을 수 없다. 부처님께서는 개인주의적 생각을 하고 행동하는 사람을 어리석다고 하셨다.

 

현대사회에 살고 있는 나

이것이 불교의 연기 법적으로 보는 ‘나’의 실체이지만, 현대사회를 사는 일반적인 사람들의 생각에는 분명히 ‘나’와 ‘나 아닌 것’이 있고, ‘내 것’과 ‘남의 것’이 분명히 있다고 알고 분별한다. ‘내 것’과 ‘남의 것’이 있으니까, 좋은 것이 눈앞에 있으면, ‘내 것’으로 만들려는 욕심과 집착이 일어난다. 이것이 개인이기심이 일어나는 시작이다.

이러한 개인이기심을 합법화하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제도 하에서 개인에게 이익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끼리, 혹은 개인에게 손해가 된다고 보는 사람들끼리 단체를 조직해서 집단이기주의자들의 활동이 극심하게 되니, 그런 조직에 가입되지 않는 일반 시민들은 저절로 약자, 다수의 피해자가 되어 손해를 보게 되니, 빈부의 격차가 극심해지는 사회구조이다.

이익을 독점하는 기업체 혹은 개인, 극단적인 노동조합, 테러조직, 마약조직, 로또, 카지노 등으로 인한 디트로이트 시의 파산, 이로 인해 약자인 시민들이 감당해야 할 부담, 강한 국가들의 국가 이기주의적인 경쟁 등이 그 예이다.

현재 사회나 가정이 불행하게 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를 살펴보면, 개인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정치제도 하에서, 크게 한 일도 없이 큰돈을 버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일일 노동자들은 상대적으로 박탈감을 느끼게 되어 노동해야 희망이 없다고 좌절해 노동하기를 싫어하게 된다. 이에 따라 불만만 고조되는 사회현상이다.

이러한 사회 현상에서 국민 각자의 마음바탕에 개인 이기주의적 경험이나 생각이 보통으로 깔려 있게 된다.

 

업아(業我)와 진짜 나, 진아(眞我)

불교에서는 ‘나’와 ‘남’을 분별하는 ‘나’는 나의 업(業)의 성질에 의해 만들어진 ‘나’라고 하여 업아(業我)라고 한다. 업아(業我)는 진짜 나가 아니라고 하여 가아(假我)라고 하기도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나’는 업아(業我) 혹은 가아(假我)이다. 그러나 ‘나’와 ‘나 아닌 것’은 서로 다르지만 때어놓을(分離분리) 수 없는 관계에 있다고 볼 때, ‘나’와 ‘나 아닌 것’은 분리할 수 없음으로 하나이다. 이와 같이 전체와 한 몸이 된 나에게는 개별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나는 없다.

개별적인 나는 없다는 것을 무아(無我)라고 하고, 무아(無我)에는 나와 남을 분별하는 업아(業我) 혹은 가아(假我)가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업아(業我)를 없애면 무아(無我)가 되는데, 무아(無我)는 곧 나와 남을 분별하지 않는 나이고, 분별함이 없는 나는 진짜 나인 진아(眞我)이다. 즉 ‘나’와 ‘남’을 분별하는 나는 없다는 뜻이 무아(無我)이고, ‘나’와 ‘남’을 분별하지 않고 전체를 한 몸으로 보는 나를 '진짜 나'라고 하여 진아(眞我)라고 한다. 그리고 진아(眞我)는 진여(眞如), 부처, 불국토(佛國土), 정토(淨土), 법신불, 열반, 극락정토라고 사정에 따라 표현하기도 한다.

업아(業我)의 업을 다 소멸하고 진짜 나의 성품을 처음 만났을 때 견성(見性)이라 하고, 진짜 나의 성품을 봤으면 곧 성불(成佛)한 것이라 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 한다. 견성성불(見性成佛)하신 분의 입장에서는 언제 어디서나 개별적인 ‘나’는 없고 전체와 하나 된 ‘나’만이 있다. 전체와 하나 된 나라고 볼 때, 그 전체와 하나 된 몸이 불국토, 정토, 열반, 극락정토가 되고, 하나 된 마음의 입장에서 보면, 진아(眞我), 진여(眞如), 법신불(法身佛), 부처라고 부른다.

 

업아(業我)와 일인(一人) 일세계(一世界)

불교에서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누구나 전생에서 지은 업을 가지고 온다. 그 업은 태어날 때 가지고 온 성품, 타고 난 성품이라 한다.

이 성품을 가진 ‘나’를 업아(業我)라고 하고, 업아인 나는 그 업을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보고, 듣고, 배우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기준으로 삼는다. 그 결과로 얻어지는 경험에 따라 그 기준도 변해가면서 자기가 삶에 가장 필요하고 중요하다는 경험을 마음 깊이 새겨두고, 그 후 일어나는 일에 대한 옳고 그른 것의 판단이나, 좋아하고 싫어하는 생각의 기준으로 삼는다. 즉 이 세상을 살아가는 자기의 가치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다.

예를 들면, 돈이 최고야 하는 관념, 자유란 내 편한 데로 내 좋은 대로 하는 것이란 관념, 정치 경제 철학, 이성에 대한 애정, 종교에 대한 믿음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는 관념이다. 이 기준을 행사하는 사람의 성격이 각기 다름으로 각기 다른 세계를 창조해 간다는 것이 일인(一人) 일세계(一世界)의 원리이다.

각기 어떠한 기준 하에서 행동하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인과응보가 따른다. 그러므로 상대되는 사람은 그 사람의 세계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협조해 주어 그 사람이 원하는 세계를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렇게 서로 돕는 환경이 조성될 때 행복을 체험할 수 있게 된다.

 

개인주의적 사회와 나

나와 남을 분별하는 개인주의적 자본주의 사회와 정치제도 하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내가 했다.’ ‘내가 한다.’ 또는 ‘내가 할 것이다.’라는 관점으로 자기 일을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일을 하는 사람은 자기에게 주어진 조건들이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해 오만하고 자만에 빠지기 쉽다. 오만한 사람은 사람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으므로 대인관계가 좋지 않다.

또 ‘내가 해야 한다.’는 생각은 자신을 강박감에 빠지게 하고 스트레스를 받게 한다. 이러한 사람의 마음에는 불평불만이 가득하고,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얼굴은 찡그린 상이며, 신경질적인 말을 하고, 남이 자기를 존중해 주기를 바라는 행동을 한다. 이러한 사람은 ‘자기가 해야 한다’고 자기와 남을 분별하는 마음이 강하여, 상대로부터 바라는 것이 많고, 그에 대한 집착이 심해 불평불만을 내려놓을 수 없다. 불평불만은 괴로움과 고통의 자업자득을 계속 받게 하니 절대로 행복할 수가 없다.

이것이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사회 사람들의 행복지수가 낮은 이유이고 어리석은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다.

 

연기주의적 사회 와 나

연기주의를 근본으로 하는 사람들은 ‘내 주위의 도움을 받아 했다.’ ‘내 주위의 도움을 받아 한다.’ ‘내 주위의 도움을 받아 할 것이다.’라는 관점으로 자기가 할 일을 한다. 내 주위의 덕분으로 내가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는 것이고, 주위의 모든 것을 대하는 마음이 겸손해지게 되고, 주위의 모든 것에 감사한 마음을 갖는다.

겸손하고 감사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매사를 보고 느끼고 생각함이 긍정적이고, 상대를 만날 때,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므로 맑고 미소 띤 얼굴을 하게 되고, 따뜻하고 부드러운 말을 하며, 감사함에 보답하고자 하는 행동을 한다. 주위의 도움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긍정적인 생각, 미소 띤 얼굴, 부드러운 말, 보답하는 행동의 씨앗을 심어 긍정적인 열매를 맺게 되어, 하는 일마다 원만하게 성공시키고 행복하게 살게 되는 것이 자업자득의 이치이다.

연기주의는 행복지수가 높은 사회 건설에 혁신적인 역할을 할 사상이다. 일을 할 수 있는 조건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긍정적인 생각을 하고 감사함에 보답하는 행동을 하는 사람은 하는 일을 성공시킬 수 있는 자질을 갖춘 사람이고 행복할 수 있는 마음 자세를 가진 사람이다.

 

나의 수행과 나의 행복

나와 남을 분별하는 내 업을 소멸하기 위해 염불이나 참선수행을 해 마음이 한 점에 집중되면 모든 생각이 끊어진다. 나와 남을 분별하는 모든 생각이 끊어져야 마음이 한 점에 집중되어 정념(正念)을 이룰 수 있고, 정념에서 선정(禪定)에 들어 모든 움직임이 쉬게 된다.

모든 생각이 멈춰졌다는 것은 일체 분별하는 마음이 없어진 것이고, 분별하는 마음이 없어진 경계는 ‘나’도 ‘남’도 일어나기 전으로 돌아간 경계이다. ‘나’도 ‘남’도 일어나기 전으로 돌아갔으니, ‘나의 것’도 없고, ‘남의 것’도 없다. 그러니, 좋아 할 것도 없고 싫어할 것도 없으며, 옳은 것도 없고 그른 것도 없다.

그러므로 더해야 할 것도 뺄 것도 없으니 요구할 것도 없고 더욱이 집착할 일도 없으며 스트레스 받을 일도 없는 세계이다. 일체가 한 몸인 고요한 세계에 들어간 것이다. 이때의 마음은 허공(虛空)과 같아 누가 욕을 한다고 해도 그 사람의 업이 그로 하여금 그렇게 생각하게 만드는구나하고 상응(相應)하지 않는다. 마치 새가 허공을 나나 자취를 남기지 않는 것과 같이 상응하지 않으니 스트레스 받을 일도 없고, 그 욕하는 사람 때문에 괴로워할 일도 없다. 괴로울 것이 없으니 고요함을 즐기는 마음뿐이다.

‘고요한 마음’도 인연을 만나면 그것을 알아차리는 작용이 있는데 그 작용을 ‘성성하다.’고 한다. 고요함을 ‘진공’이라고 표현하면 그 작용은 ‘묘유’라 하고, 고요함을 ‘공공적적’이라 표현하면 그 작용을 ‘소소영영’이라 한다.

일체가 한 몸인 고요한 세계에서 어떤 인연을 만나면, 예를 들어 나를 욕하는 사람을 만나면 마음이 일어나 작용한다. 그 작용은 한 몸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라 대응하거나 요구할 것이 있거나 집착할 일이 있는 것은 아니므로 괴로움이나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인연은 거대한 나의 몸 안에 있는 한 중생이 괴로워하는 것이라고 받아 들여 동체(同體) 대비심(大悲心)을 일으켜 그를 구원(救援)하는 작용을 한다.

이것이 수행자가 느끼는 지속가능한 행복이다.

 

www.

www는 World Wide Web으로 세계 전체가 거미줄 같이 하나로 짜여 있다는 뜻이고, .(점)은 바로 ‘나’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점)으로 www 세계에 직선도 곡선도 내 마음대로 그릴 수 있음으로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이 세계에서 내가 원하는 세계를 내 마음대로 창조해 가는 주인공임을 의미한다고 본다.

세계 전체가 거미 줄 같이 엉켜 한 몸으로 되어 있다는 것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에 있지만 분리(分離)시킬 수 없는 한 몸임을 의미한다. 이렇게 하나로 얽혀있는 세계에서 내가 원하는 만큼의 세계를 창조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나’를 .(점)으로 상징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해석하고 보면 www을 창시한 사람은 불교의 연기법을 이미 통달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불교의식에서 “지심귀명례 시방삼세 제망찰해 상주일체 불타야중”, “지심귀명례 시방삼세 제망찰해 상주일체 달마야중”, “지심귀명례 시방삼세 제망찰해 상주일체 승가야중”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www가 의미하는 바와 깊은 관계가 있다고 생각되어 소개하고자 한다.

지심: 마음을 지극하게 하나로 모아;

귀명례: 목숨 다해 예배합니다.

시방: 세계 팔방에 상하를 합하니 십방, 십방을 시방이라 한다;

삼세: 과거세 현재세 미래세가 삼세;

제망: 제석천왕 궁에 설치된 구슬 망, 마치 고기잡이 어망 매듭의 구슬이 a, b, c, d, e, f, g 10개가 있다면, a구슬에 a구슬에 있는 모든 것은 물론이고 그 외 9개의 구슬의 모든 상황도 a구슬에 비치고, b구슬에도 b구슬에 있는 모든 것이 b구슬에 비치는 것은 물론이지만 그 외 9개의 구슬에 있는 정보도 모두 b구슬에 비친다. 나머지 c, d, e, f, g 구슬도 모두 이와 같이 비치어, 결국 구슬a에는 a가 고유하게 가지고 있는 정보뿐만이 아니라 나머지 9개의 정보도 공유한다는 의미이다.

이치가 이라하니 어떤 한 구슬에서도 10개 구슬의 정보를 다 검색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제망은 이러한 의미를 가지고 있음으로 제석천의 왕이신 제석천왕이 멀리 계신다고 내가 하는 짓을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라는 의미도 있다.

찰해: 제망의 구슬이 마치 푸른 바다처럼 펼쳐진 하늘에 떠있는 수많은 섬나라에 비유한 것이다;

상주: 시간과 공간에 상관없이 항상 머물러 계신다;

일체: 사람뿐만이 아니라 유정 무정 자연의 모든 것을 포함한다는 의미이다;

불타야중: 일체 중생에게 머무시는 수많은 부처님들이라는 뜻이다. 말하자면 너에게도 나에게도 풀에도 땅에도 어디에나 계시는 부처님이다.

 

“지심귀명례 시방삼세 제망찰해 상주일체 불타야중”: 시방 삼세 중중 무진한 일체중생에게 항상 머물러 계시는 수많은 부처님들께 지극한 마음으로 이 생명 다하도록 예경하나이다.

일체 중생이 다 부처님이라, 이들이 항상 나를 도와주시는 덕분에, 내가 존재할 수 있고, 살아갈 수 있으며, 내가 원하는 바를 성취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으니, 나에게도 부처님이 계심을 확연히 믿고 이 생명 다하도록 일체 중생 모두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불국정토를 건설함에 기여하리라.

 

2013. 12.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