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大乘)

2007.02.25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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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大乘)


"대승"이란 주제를 가지고 우리가 어떻게 하면 복(福)을 지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알아 보고자 합니다.


먼저 "대승"의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대승이란 하나를 의미합니다. 하나라고 하면 이자리에 앉아 계시는 한분 한분도 하나요 이 화계사도 하나입니다. 화계사를 하나라고 하면 우리 하나 하나는 화계사에 의지 하면서도 화계사를 구성하는 한 요소가 됩니다. 화계사의 역사, 화계사가 놓여 있는 땅, 삼각산, 법당, 대웅전, 명부전 모두 각각이 화계사를 구성하는 요소이고 이 화계사에 모두 의지하고 있습니다.

이와같은 관념을 조금 더 확대하면 전우주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우주적인 차원에서도 우리는 우주를 구성하는 구성원으로서의 하나 하나이면서 우주라는 하나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대승이란 하나의 개체로서의 나와 우주전체를 의미하는 하나로 우리는 의식할 수 있습니다.


먼저 우주를 살펴보면 우주는 광대하고 무한하고 무량합니다. 진리(眞理)가 그안에 있습니다. 진리는 볼래야 볼 수 없고 만질래야 만질 수 없는 것이나 진리란 있는 것입니다. 진리란 참된 이치로서 운동하는 힘과 운동하는 능력과 운동하는 성질입니다. 운동하는 힘은 무한하고 무한한 능력과 무량한 운동의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 불교에서는 불성(佛性)이라고 합니다. 불성은 어떠한 연(緣)을 만나면 운동이 전개되어 그 결과로 생이 있고 생한 것은 생노병사(生老病死)가 생주이멸(生住異滅)이 성주양공(成住壤空)이 전개된다는 것입니다. 이때에 진리의 힘은 무한(無限)하여 생주이멸에 요소가 된 힘이 있고 사용되지 않고 자연의 힘 그대로 남아 있는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우주와 진리를 우리 인간과 관계를 살펴보면 우주에 해당되는 것은 현상으로서 우리의 몸을 소우주(小宇宙)라고 하고 진리에 해당되는 부분을 우리의 마음이라고 합니다. 마음도 역시 볼래야 볼 수 없고 만질래야 만질수 없는 것이지만 분명히 마음이란 있는 것입니다. 이 마음은 우주의 진리와 같이 운동하는 힘과 능력과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힘은 광대하고 그 능력은 무한하고 그 성질은 무수하게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은 우주를 덮고도 남음이 있고 우주의 진리란 바로 우리의 마음에서 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대승"의 총설을 살펴 보았습니다.


그러면 이와같은 "대승"이 우리가 복(福)을 짓는 것과 어떠한 관련이 있는가 살펴 보겠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재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즉 돈 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최소한 어느 정도의 돈 복이 있어야 하느냐 하는 기준을 설정하여 봅시다. 여러분들이 각자가 지금 어느 정도로 돈을 벌고 있는지는 여러분 각자가 스스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국민소득은 지금 년간 1만불이라고 하면 일본은 세계 제1위로서 4만불 미국은 4위로서 3만불로 알려져 있습니다.

여기에서 일본이 미국을 앞질러 4만불선을 올렸다면 우리 한국 민족도 앞으로 10년이내에 일본의 지금 4만불선을 돌파할 수 있는 가능성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지난 30년동안의 비약적인 발전이 국민소득 1만불선에 올려 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 30년간의 발전을 1960년대 이전 100년에 비유하여도 100년간 발전한 것 이상으로 지나간 30년 동안에 발전하여 왔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앞으로 우리들의 발전은 국민소득 3만에서 5만은 가능한 숫자로 예측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여러분 각자에게 의미하는 바는 여러분의 소득이 지금보다 3배내지 5배이상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다른 의미는 지금보다 3배-5배이상 치열한 경쟁속에서 고급 실업자가 많이 생기고 잘 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과의 격차가 더욱 심각해지고 셋째는 지금보다 앞으로 10년내에 3배-5배 더 잘 사는 것은 더 잘 사는 것이 아니고 시대에 흐름에 편승되어 낙후되지 않고 살아 남은 것에 불과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남들이 가는 속도로 우리가 이 세상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일차적인 생활 목표를 지금보다 5배이상으로 설정하여야 하겠습니다. 이 5배라는 것은 금전적인 수입에 5배뿐만이 아니라 정신생활의 풍요로움도 지금보다 5배로 질적인 향상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 마음의 운동하는 힘의 무한성과 그 능력의 무한성 그리고 성질의 무한성을 논하였고 향후 10년사이에 일어나야할 물질적 정신적 생활목표를 설정하였습니다.


그러면 현재 물질에 대하여 우리의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살펴 보겠습니다. 돈에 약하고 권력에 약한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돈이 좀 있는 사람은 돈이 없는 사람을 멸시하고 자기보다 돈이 많은 사람을 따르고 자기보다 권력이 약한 사람을 무시하고 자기보다 강한 사람을 따르고 아첨하는 습성입니다.

이와같이 돈과 권력을 따르는 사람은 일시적으로 잘 사는 듯이 보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은 능력이 있어 성공하였다면 다음 순서는 감옥이 아니면 지옥입니다. 돈을 따르고 권력을 따르는 사람은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남을 해치는데 과감한 사람들입니다. 이익이 있다면 부정(不正)을 하는데 조금도 두려움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사기와 기만 약탈을 보통으로 알고 시기와 질투 분노심이 강하고 투쟁과 살육을 보통으로 행하고 성도덕이 문란한 사람들입니다.

이와같은 사람은 번뇌와 망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그와 관계된 사람도 불행을 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사회적 부조리의 현상은 사람들이 자본주의 사회의 물결속에 물질 만능이란 관념이 심정속에 심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돈을 따르고 권력을 따른다는 것은 현재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모든 사회악의 근본 원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돈을 따르지 않고도 돈이 나를 따르고 권력이 나를 따르는 방법으로 우리는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대승"의 원리인 것입니다. "대승"은 무한한 능력과 다양한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현재의 이기심적이고 사리(私利)에 탐을 내는 마음을 대승의 마음으로 바꾸어 놓음으로서 앞에서 세운 우리들의 10년 목표를 달성하고 우리들 스스로를 사회에 필요한 인물로 성장시켜갈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는 방법론에서의 "대승"은 원효대사의 칠대성(七大性)을 소개합니다. 앞서 우리들의 마음은 무한한 운동하는 힘과 능력이 있고 무수한 운동하는 성질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 운동하는 무량한 성질을 일곱가지의 대성(大性)이라 하여 "대승"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일곱가지의 대성이란 경(境)대성, 행(行)대성, 지(智)대성, 정진(精進)대성, 방편선교(方便善巧)대성, 증득(證得)대성, 업(業)대성입니다. 경대성은 부처님께서 경계에 관하여 교설하신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즉 눈, 귀, 코, 혀, 몸, 뜻의 대상입니다. 행대성은 자리와 리타행을 의미하고 지대성은 지혜, 정진은 끊임없는 노력, 방편선교는 바르고 묘한 방편, 증득은 진리를 체득함이고 업대성은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후 이루신 모든 선업을 의미합니다.


이와같은 원효대사의 7대성의 개념을 우리가 복을 짓는 길로 적용할려는 것입니다.

먼저 경대성을 살펴 보겠습니다. 경대성이란 우리가 하고자 하는 대상이나 문제를 풀어야 할 대상입니다. 그 대상을 어떻게 보고 느끼느냐에 따라 그 방법이 결정됩니다. 이때에 우리가 본다는 그 대상은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것이나 풀어야할 그 문제로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이때에 대상을 우리의 마음까지 포함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것과 하고자 하는 마음을 동시에 그 경계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풀어야할 문제와 그 문제를 바라보는 마음을 동시에 그 경계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때의 이 마음은 무슨 마음인지 알아보겠습니다. 잠시 눈을 감으시고 현성스님을 잠시 마음속으로 그려 보십시요. 눈을 뜨시고 여러분들이 스님을 그린 바로 그 마음자리가 경계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 마음까지 경계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느냐 하면 분명이 현성스님은 한분이지만 여러분이 느끼고 그린 현성스님의 영상은 각기 업력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보이게 됩니다. 이 자리에 150명이 법회에 참여 하셨으면 150개의 현성스님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 법문을 하는 스님은 현성스님 한분이지만 이 법문을 듣고 이해하시는 것은 또 역시 각자의 업력에 따라 다릅니다. 그러니까 150개의 법문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그런가 하면 보고 듣는 것이 모두 조금전에 현성스님을 마음속에서 그린 그 마음 자리를 통과하는데 그 마음 자리는 전생에서부터 지은 업력의 스폰지와 같은 것인데 이것을 유식학에서 상분(相分)이라고 합니다. 모든 경계의 대상은 상분을 통과한 다음 인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안경을 쓴 사람은 사물이 안경알을 통과한 후에 눈이 사물을 인지하므로 안경알에 때가 끼여 있으면 눈이 인지하는 것은 옳을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눈, 귀, 코, 혀, 몸을 통과한 모든 대상은 업력의 상분을 통과한 후에 내가 인식하게 됨으로 업력의 상분과 풀어야할 문제를 동시에 경계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예를 들어보면 어릴 때 개에 놀란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개를 보는 순간 무섭게 생각하고 피할려는 행동을 하게 됩니다. 개를 보는 순간 개는 두렵다는 업력의 상분을 통과하므로 두렵다는 인식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개가 두렵다는 눈앞에 있는 개의 문제와 개가 두렵다는 내마음의 상분을 동시에 경계로 하여 그 개의 문제를 풀어가면 현재 눈앞에 있는 개가 순한 개인지 사나운 개인지 그 개의 실상을 알고 그 개 문제를 처리하면 되지만 피하거나 몽둥이로 쫓아버리면 새로운 업을 짓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문제는 고부간에도 마찬가지이다. 시어머니 눈에 보여진 한 문제를 놓고 그 문제와 동시에 시어머니의 마음의 업력을 상분을 경계하여 살펴보게 되면 그 문제의 실상을 찾아내어 처리할 수 있게 되지만 시어머니가 자기의 상분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느낀데로 문제를 삼으면 도저히 며느리와 평화로운 해결점을 찾기 어렵다. 며느리도 동일한 문제에 대하여 자기의 상분이 비추어지는 것을 고려하지 않고 자기 주장만 하게 되면 해결점을 발견하기란 어려운 것이다.

자기의 업력의 상분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고 상분을 경계의 대상으로 놓고 볼 때에 그 문제의 실상을 알 수 있게 되고 문제의 해결점이 도출되는 것이다. 이 상분에 관한 것은 부부사이에도 마찬가지이며 직장에서도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자기의 상분을 심사하는 것을 능동적으로 습관화시켜야 한다.


상분의 업력을 잘 다스리게 되면 사욕이나 이기심에 의한 말과 행동이 점차 사라지게 되어 소아(小我)적인 나에서 대아(大我)적인 나로 전환되는 전환점에 이르게 된다. 이 전환점에 이르게 되면 내가 돈을 따르거나 권력을 따르던 나는 사라지고 대아의 전환점에 이르게 된 것이다. 계속하여 상분의 업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노력하게 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는 대아로 성장한 것이다. 대아가 되면 자기의 사고하는 방식이 달라지고 사고하는 방식이 달라지면 운명이 달라지는 것이다.

사고 방식이 달라지는 것은 지금까지는 내가 돈을 따라 다녔지만 나의 주관이 뚜렷한 인격체를 구성하는 동시에 상대방을 위할 줄 아는 인물이 되는 것이다. 며느리를 위할 줄 알고 어머니를 위할 줄 알고 부인을 위할 줄 알고 남편을 위할 줄 알고 직장에서도 자기의 상사와 동료와 부하를 위할 줄 알고 고객을 위할 줄 아는 인물이 되는 것이다.


행대성은 몸으로 움직이는 것만이 행이아니라 문제의 대상을 보고 자기 마음의 상분까지 심사하는 그 마음의 작용도 행에 속하는 것이다. 이와같은 마음에서 나오는 행은 자연적으로 자리와 리타행이 되는 것이다.


대아의 경지에 이르게 되면 대아의 안목에서 조금전에 세운 앞으로 10년 즉 2006년까지 달성하고자한 목표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고 보완할 것이 무엇인가를 반성하여야 한다. 자기의 직장이나 사업이 춘하추동 사시(四時)로 나누어 볼 때 어느 계절에 속하는지 진단을 할 줄 알아야 한다. 봄철에 해당하는 사업은 한창 상승기에 있는 사업이고 여름철은 절정에 오르는 사업이요 가을철은 내리막길에 있는 사업이요 겨울철은 사경에 있는 사업이다. 여름철에 있으면 가을에 대한 대비를 가을철에 있는 사업이라고 진단이 되었으면 겨울철에 대한 대비를 겨울철에 있으면 새로운 것을 모색하여야함은 자명한 것이다.

여기에 닥쳐올 어려움에 대한 인간의 무한한 능력이 작용한 예를 들어보면 홍수로 피해가 극심한 강을 막아 땜을 구축하고 수력발전을 일으키고 물을 저장하여 물의 흐름을 잘 조절하여 농사에 유익하게 하고 수원의 공급수로 삼는 것이나 추운 날에 대비하여 난방시설 더운 날에 대비하여 냉방시설 등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하여 인간이 본래부터 누구나 가지고 있는 무한한 운동의 힘과 능력과 무량한 성질을 충분히 발휘하여 어려움을 극복하는 지혜를 성사 시켰다.

이 지혜를 성소작지(成所作智)라고 한다. 성소작지란 무엇인가 만들어낼 수 있는(소작) 지혜라는 뜻으로 이러한 지혜는 매사를 처리함에 상분에 있는 업력을 소멸하기 위하여 정진을 하게 되면 눈, 귀, 코, 혀, 몸에 관련된 업을 소멸하여 성소작지가 나타난다고 하였다. 즉 자기의 직장에서 하는 사업이 여름철에 있던 겨울철에 있던 그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성소작지가 소생하여 그기에 필요한 묘한 좋은 방편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상분에 있는 업장을 소멸하기 위하여 매사에 임하여 계속하여 정진을 하다보면 묘관찰지(妙觀察智)란 지혜가 나타난다. 이 지혜는 상분내에 의식에 속하는 업장이 녹아나면 생기는 지혜로서 꿰뚫어 볼 수 있고 꿰뚫어 들을 수 있고 상대방의 마음까지 읽을 수 있는 지혜이다. 또 역시 더 높은 방편선교대성도 이루어지는 것이다.

직장에서나 가정에서 일어나는 매사에 자기의 상분까지 계속하여 심사하면서 업장을 소멸하기 위하여 정진해 가면 평등성지(平等性智)가 나타난다. 평등성지는 상분에 있는 제7말나식에 연한 모든 업장이 소멸되면 나타나는 지혜이다. 일체 모든 것이 하나로서 평등함을 깨닫고 자비심으로 보살행을 하게 됨을 뜻한다. 기독교의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지만 불교의 참다운 자비심은 이 평등성지에서 일어나는 자비심이다. 방편선교대성은 평등성지에 상응하는 높은 수준의 방편선교대성이 이루어지게 된다.

매사에 임하여 그 문제와 자기 마음의 상분을 엄밀히 검토하며 업장을 소멸하기 위하여 정진을 열심히 하면 대원경지(大圓鏡智)에 이르는 것이다. 제8아뢰아식에 있는 업장까지 모두 소멸하여 얻어지는 지혜이다. 이 큰 둥근 거울에 비쳐지는 지혜로 모든 것을 실상 그대로 볼 수 있는 지혜로서 이때 비로서 "대승"의 뜻 그대로를 체득할 수 있게 된다.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이때는 이미 최상의 방편선교대성도 이루어졌으므로 그 높은 차원의 방편으로 모든 중생에게 회향을 하게 되면 부처님이 이루신 모든 업을 짓게 된다. 부처님의 복을 짓게 된다.

우리는 이와같이 살아갈 때 동네에서나 직장에서나 사회에서나 선망의 대상이 되고 돈과 권력이 나를 따라오는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앞으로 십년이내에 여러분이 원효대사의 대승의 십대성을 이루시게 되면 지금의 생활 수준의 5배가 문제가 아니라 몇 백배도 가능할 것입니다.


위에서 소아와 대아의 전환점에 대하여 말씀드렸습니다. 이 전환점의 마음자리를 체득함이 가장 중요한 시점입니다. 이것이 얻어지면 이때까지한 경대성의 수행을 정진하시면 다음일은 점차 일어나고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경우 이 소아와 대아의 전환점에 오르지 못하는 분이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분들을 위하여 또 이 전환점에 오를 때까지 지극한 정성으로 불법승 삼보를 모시면 상분을 누르고 그 자리에 안주한 부처님을 통하여 인식을 하게 되므로 복을 지을 수 있는 지혜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흔히들 모든 것을 놓아 버리고 주인공에게 맡기면 잘 해결된다는 법문을 합니다. 모든 것을 놓아 버린다함은 바로 이기심 소아적인 생각을 버린다는 것입니다. 소아적인 마음을 버리면 대아는 저절로 나타나 작업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심오한 이치를 바르게 이해하시고 이것을 자기가 하기 위한 노력을 매사에 끊임없이 추구해 나가시면 지혜는 순차적으로 대아에서 성소작지로 성소작지는 묘관찰지로 다음은 평등성지로 다음은 대원경지로 이루어지게 되며 이들은 방편선교대성을 수반하게 됨으로 부처님의 깨달음을 정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대승"을 이루는 것입니다.


백천만겁나조우란 이 인생의 몸을 받아 태어났으니 멋지고 아름답고 정열에 넘치는 인생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사시면 다음생에 지금까지 닦으신 공덕으로 사람의 몸을 받아 좋은 세상에 태어나지만 돈이나 권력을 좋아하고 따르는 사람은 죽어서 중음신이 되면 매사에 보는 눈이 미혹하여 지옥중생이나 축생이 좋아보여 그들에게 가서 지옥중생이나 축생으로 태어나게 됩니다. 매사에 바로보기 위하여 상분에 있는 업장을 없애려고 노력한 사람은 바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으므로 죽어서 중음신이 되어도 사람이 좋아보이고 사람중에서도 좋은 사람이 좋아 보여서 그들에게 가까이 하여 좋은 세상에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여러분들이 공부하시느라 노력하신 것은 죽어서도 가져가는 것입니다.


다시한번 앞으로 10년간 많은 복을 지어서 멋지고 아름답고 정열에 넘치는 인생을 살아 가시기 바랍니다.


불기 2540/05/20 화계사 가족법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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