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물질관

2007.02.25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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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물질관


먼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물질관을 살펴보겠다. 이시대 이사회는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에 자본주의 경제체제하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먼저 자본주의라고 하면 자본을 가진 사람이 주인이 되어 기업체를 세워 노동자를 고용하여 생산업이나 상업이나 금융업 혹은 서비스업을 돈을 벌 목적으로 경영하고 활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돈을 벌 목적으로 경영하는 사업활동을 멸시하던 봉건사회에서 이들을 합리화한 사상적인 배경은 서양철학자 데카르트가 17세기에 주장한 “심신이원론(心身二元論)”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심신이원론”이란 몸(물질)과 마음(정신, 영혼)이 서로 관계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철학이다.

이 철학은 16,7세기에 기독교에 불만을 가진 학자와 과학자들에게 대단한 환영을 받았고 오늘날의 자유민주주의 정치체계와 자본주의 경제체계를 성립시키는 모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의 모태이기도 하다. 심신이원론에서 신(身)에 속하는 물질이 본질상 스스로 존립하고 생존하므로 물질인 돈을 버는 활동은 당연하고 합리적이란 철학이다.

이러한 물질 위주의 사상은 정신이 물질에서 나왔고 물질의 한 부분이라고 간주하게 되어 인간을 생산공장에서 기계화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게 받아졌고 생산된 상품과 같이 거래의 대상으로 취급하는 인간 상품화가 되어 온 것이다.

또한 돈을 버는 수단에 있어서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만 벌면 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고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오물(物)이나 폐수(水), 폐기(氣)도 자유로이 버리는 것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져 왔다.


자유민주주의 정치철학은 심신이원론에서 심(心)에 속하는 인간이 근본이라는 인본주의 사상을 그 배경으로 하고 인본주의는 인간의 존엄성과 인격을 보장하여야 함을 주장하고 물질은 정신에 속하는 것이므로 인권을 자본주의의 모순에서부터 보장받기 위하여 사회 보장제도를 마련하고 자본주의의 인간 기계화와 상품화로부터 인간의 인격을 보장받고 작업환경을 개선하기 위하여 노동조합을 결성하여 자본주의를 견제하게 하고 인간의 건강을 기업체에서 방출하는 공해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환경법을 만들어 기업체의 환경 훼손을 방지하게 한다.


인본주의의 이와 같은 모든 노력들은 결국 개인의 행복 추구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함에 있다. 개인에게 행복 추구의 자유와 권리가 주어졌지만 일반 사람들이 무엇이 행복한 것으로 알고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불자는 그렇지 않지만 불자가 아닌 많은 사람들은 행복이란 육체적인 쾌락과 향락으로 알고 또 돈의 위력을 선망하여 축재하는 재미를 행복으로 아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러한 괘락과 축재에 집착은 황금만능의 물질주의와 결탁하게 된다. 이러한 결탁은 크고 작은 공직의 부패와 타락을 가져오고 사회는 술집과 음란사업이 번창하고 가정에는 부부사이에 갈등과 고민으로 전락하게 된다.

이러한 고민은 각자의 무의식속에 종자로서 잠재하여 어떠한 경로를 통하여 소화 불량이나, 가슴이 답답하여 지고, 골치가 아프고, 대소변에 불편을 느끼게 되고, 육체적인 병으로 고통스런 인생을 살게 되고, 어떤 사람은 남의 빚에 쪼들려서 고통을 받던 것이 병이 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부도수표로 도저히 남의 빚을 갚을 수 없는 절망적인  상태에서 목숨을 스스로 끊는 비참한 일들이 오늘날 비일비재하다.


기독교 계통에서 종말론이 나오는데 종말은 기독교 문화권에서 나온 이러한 사상을 배경으로한 세계에 종말이 오고 새로운 사상을 배경으로 한 세상이 온다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 새로운 사상이 무엇인가? 그것은 여러분들이 다 잘 아는 “색심불이(色心不二)”이다. “색심불이”란 몸과 마음, 물질과 정신이 둘이 아니다. 즉 색심(色心)이 개별적이란 서양철학과 정반대인 것이다. “색심불이”는 기원전(2000년전)에 인도 마명보살의 “대승기신론”에서 논한 것이 처음이다. “색심불이”의 교리적인 배경은 몸(물질)의 본질과 마음의 본질은 불성으로서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동체이므로 몸(물질)은 마음을 위하고 마음은 몸(물질)을 위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요 순리라는 것이다.


불교의 우주관인 18계(界)에서도 색심불이 사상을 볼수 있다. 안근(眼根) 등 6근과 색경(色境) 등 6경을 합하여 12처(處)라고 한다. 6근은 몸을 의미하므로 물질이고 6경도 물질이므로 12처란 물질을 의미한다. 안식(眼識)등 6식은 마음을 의미한다. 6식과 12처의 관계는 6식이 활동하는 활동처로 기능하는 곳이 12처이고 6식(마음)의 활동력을 생장시키는 기능을 하는 곳이 12처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마음(衆生心)은 몸과 자연을 유지하고 육성시키고 몸과 자연(물질)은 마음의 활동처가 되고 마음을 성장시키는 요소가 된다는 것이다.


불교교리의 근본이 되는 연기법으로 볼 때에도 마음이 있으므로 몸이 있고 몸이 있으므로 마음이 있고 마음이 일어나므로 몸이 일어나고 몸이 죽으므로 마음이 죽는다는 연기법의 관계인 것이다. 마음이 몸을 생장시키면 몸도 마음을 성장시키고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면 남편도 아내를 사랑하는 상호 의존하고 상호 보존하는 관계인 것이다. 불교의 물질관과 정신관은 한결같이 정신은 물질을 위하고 물질은 정신을 위하여야 함을 교지(敎旨)로 하고 있다. 만일 아내(부인)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자기를 위하면 이러한 경우 서양철학의 “심신이원론”이 적용이 되어 남편과 각각등 보체가 되는 것이다. 불교는 이러한 고통(苦)을 제거하기 위하여 배우고 수행하여 서로 위하면서 안락하고 행복한 삶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색심불이”란 둘이 아니라는 의미속에 하나도 아니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현대 자유민주주의의 정신관과 자본주의의 물질관에서 이미 논하였지만 자본주의의 물질관에서는 정신은 물질에 속하고 물질에서 나온 한 부분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그와 반면에 인본주의의 정신관에서는 정신은 인격의 주체요 인권이 보장되어야 함으로 물질은 인간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점에 관하여 부처님께서는 범부들은 몸(물질)을 중심으로 마음을 바라보면 마음이 몸(물질)에 속하는 것이라 착각한다.

그러나 마음은 마음대로의 개별성이 있고 역할이 있으므로 몸과 평등하게 보아야 한다. 그리고 마음을 중심으로 몸을 보면 몸(물질)은 마음에 속한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몸은 몸대로의 역할이 있으므로 마음과 평등하게 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점에 있어서도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심신이원론”의 사상과 불교의 “색심불이”가 반대인 것이다. 이 뜻이 무엇인가 하면 “색심불이”란 의미중 하나도 아니라는 의미가 있다.

부부사이에서 남편을 중심으로 보면 범부들은 부인이 남편에게 속하는 것으로 착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은 부인은 부인으로서의 개별성이 있고 역할이 있으므로 남편과 평등하게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대통령이 대통령의 입장에서 보면 범부일 경우 국민이 대통령에 속하여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같이 착각한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국민은 국민대로 개체성이 있고 역할이 있으므로 대통령은 국민을 자기와 평등한 관계로 보아야 한다. 국민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와 같이 볼때에 불교의 “색심불이” 사상은 어느 방향에서도 회통하여 화목과 평화를 이룰수 있는 사상이지만 자유 민주주의의 인본주의는 자본주의의 물질관과 충돌하고 자본주의 내에서도 자본가와 노동자가 충돌하고 민주주의 내에서도 항상 강자와 약자가 대결하고 충돌하고 있다.


불교의 “색심불이” 사상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하여는 지난 5월 법문과 4월 법문을 잘 이해하고 실천하여야 한다. 현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문제를 다르게 표현하면 개인의 이기심, 집단이기심, 국가이기심 즉 이기심에 있다. 이 이기심은 업력의 영향을 받는 상분(相分)이란 마음에 의한 것이므로 상분의 업을 제거하기 위하여 우리는 상분을 관(觀)하여야 한다. 상분의 업이 제거되면 소아(小我)적이었던 내가 대아(大我)의 나로 전환한다. 이 전환점이 바로 우리의 마음에 부처님을 모시는 자리요 부처님의 지혜와 복덕의 광명이 항상 밝게 빛나게 되는 곳이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물이 어떠한 물인지 우리가 바르게 알아서 불교의 물질관과 정신관으로 사회를 정화하여 가면서 정신과 물질세계를 풍요롭게 하여 지복(至福)의 세계 극락정토를 현실세계에서 이루어 보자.

어느 모로 보아도 우리 불자들은 잘 살 수 있다. 자부심과 긍지와 자신감을 가지고 색심불이(色心不二)를 믿고 실행하여 보자. 모두 세세생생 극락을 누리게 될 것이다.


불기2540년 6월22일(일) 화계사 가족법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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