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다원계 수계법문 - 나는 누구인가?

2010.11.09 12:31

현성 Views:6992

 사람이 자기 얼굴을 볼 수 없는 것은 모든 동물이 자기 얼굴을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리고 사람은 자기의 몸매 앞과 뒤, 몸 둘레를 잘 볼 수 없는 것도 그와 같다. 뿐만 아니라 피부 속에서 작용하고 있는 모든 장기에 대해서는 더욱 더 캄캄하다. 그러하니, 내 얼굴의 모습, 몸매, 피부 속의 오장육부, 뇌신경 등을 움직이게 하는 주인공인 나를 안다는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대상이 될 수밖에 없기에, 어떤 종교에서는 그 주인공을 하나님인 창조주라고 하고, 나는 그의 피조물이라고 한다.

몇 주 전에 어린이 반에 들어갔다. 내가 어린이들에게,
오늘 아침에 무엇을 먹었어요? 하니,
밥 먹었어요.
밥에 물이 있어요?
없어요.
밥에 물이 없어요? 그러면 밥 먹고 물은 마셨어요?
네.
그 물은 어디서 왔어요?
수도꼭지에서요.
수돗물은 어디에서 왔어요?
호수에서요.
호수 물은 어디에서 왔어요?
비요.
비는 어디서 왔어요?
구름이요.
구름은 어디서 왔어요?
하나님이요. 라고 대답했다.

이런 식으로 각자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은 모두 “하나님”이라고 대답하면 맞으니 다른 종교는 불교보다 훨씬 쉽다고 하는 것 같다.

사람들은 자연의 원리를 체험해 배워 그 원리를 이용할 줄 안다. 자연의 원리에 의해 거울을 만들어 자기의 얼굴과 몸매를 거울을 통해 볼 수 있게 되었다. 즉 사람은 거울을 반연해 자기의 얼굴과 몸매를 볼 수 있게 되었고, 의학이 발달함에 따라 피부 속에 있는 우리들의 오장육부와 뇌신경 등의 구성과 작용에 대해서도 많이 알게 되었다. 의학의 지식, 장비, 기술 등에 반연해서 우리들의 육체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지만 모르는 부분들이 너무나 많다고 생각한다. 모르는 부분들은 아직 그 반연들을 찾지 못해서이다. 

육체는 우리들의 눈, 귀, 코, 혀, 몸 오관(五官)을 통해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것이지만 우리들의 오관으로 느껴서 알 수 있는 것보다, 느낄 수 없고 알 수 없는 부분이 훨씬 더 많다고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각자는 자신에 대해 다 알고 있다는 착각을 하고 있으면서도, 착각을 하고 있다고 느껴지지 않는 것이, 흔히 심한 고통의 원인이 된다. 고 불교에서는 설하고 있다.

불교에서 보는 우리들의 몸의 반연은 흙, 물, 불, 바람 기운이라고 한다. 그런데 흙, 물, 불, 바람이 자기 힘으로 몸을 만든 것이 아니라, 세속말로 하면 영혼, 불교 용어로는 아뢰야식이라는 의식이 부모를 택해서 그들과 반연함으로서 몸을 받는데, 그 몸은 흙, 물, 불, 바람 기운과 반연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몸의 상태를 알기 위해 흙과 물의 성분으로서 혈액검사를 하고, 불의 성분으로 체온을 재고, 바람 기운으로서 혈압을 잰다. 이것들 역시도 의학 기구, 기술 등에 반연하여 우리들의 몸의 상태를 알게 되는데 이들의 수치에 따라 우리들의 감정이 희비(喜悲)로 나누어진다.
그러나 어떠한 이유로 그러한 수치가 나오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우리는 흔히 의사 말을 존중하게 된다. 

불교에서는 우리들의 몸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 육체적 정신적 고통과 병의 원인은 “내 몸을 내 몸이라고 알고 몸에 집착”하여 몸에 좋다고 하는 것을 다하다 보면 마치 물고기가 먹이에 집착해 낚싯밥을 물어 삼키는 것과 같다고 하셨다. 집착에 눈이 가려지면 앞을 보지 못하니 사고를 당하게 될 것이니 집착을 삼가라. 집착을 삼가면 앞을 볼 수 있게 되어 먹을 것과 먹지 못할 것을 가릴 수 있게 된다고 가르친다.

내 몸은 나의 생활상에서 얻어지는 결과물이라고 본다. 내 생활상에서 내 몸을 위한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해가 되는 수가 더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내 몸은 내가 아닌 흙, 물, 불, 바람기운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라.”고 가르치고 그렇게 실천할 것을 요한다. 이것이 바로 반야심경에서, “오온이 공한 것을 분명히 알게 되니 일체 고액을 소멸하였느니라.”라고 하신 원리이다. ‘내 몸이 내 몸 아닌 것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았으면, 내 몸, 색(色)이 공(空)하다는 이치를 알은 것이다. 그러하니, 생활상에서 “내 몸이 내 몸이라고 알고 좋다는 것” 찾아 먹으려 하지 말고, 지수화풍(地水火風) 그대로인 자연식으로 내 몸 아닌 내 몸을 위하는 것이 가장 잘 위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나의 생활상에서 나와 반연하는 모든 것은 공과 반연하여 있다고 보게 되면 근심 걱정할 일이 사라지게 된다. 근심 걱정할 일이 없으니 마음이 편안하고, 마음이 편안하면, 얼굴과 몸매가 편안해 지고, 그 또한 아름다워진다.

의학이 고도로 발달하였지만 병에 대한 이러한 처방은 불교에서만 배울 수 있고, 체험할 수 있다는 점이 어느 종교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불교의 특징이다.
오늘 수다원계를 받은 심공(心空)수다원님과 원공(願空)수다원님께서는 그동안 공(空)하다는 도리를 많이 체험하셨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깊이와 넓이는 한이 없는 것이니 더욱 심도(深到)있게 체험할 수 있도록 정진하시기 바란다. 

내 얼굴을 거울이라는 반연이 없이는 볼 수 없듯이, 내 마음도 반연이 없이는 느낄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다. 왜냐하면 마음은 반연이 없으면 일어나지 않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반연을 만나면 내 마음이 일어나지만, 일반적인 경우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자기의 마음이라고 알지 못하고, 주변사정이나 하나님의 뜻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주변 사정이나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한, 나는 나를 조금도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다. 내가 나를 볼 수 없고 알 수 없는 한, 내가 나를 개선하거나 개혁할 수는 더욱 없다. 남이 나를 개선해 주거나 하나님이 나를 개선해 줘야 하니까.

그러나 불교수행에서 첫 단계의 수행이 내가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기 위한 수행이다. 이 수행의 이름이 정념(正念)인데, 우리말로 ‘마음 챙김’이라고 번역하기도 하고, 영어로는 ‘mindfulness(마인드풀네스)’라고 알려져 있다. 마음의 주의를 항상 지금 여기에 두는 수련이다. 지금 여기에서 몸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 것을 내가 아는 것, 누구를 만났을 때 일어나는 마음을 내가 아는 것, 할 일이 있을 때 일어나는 마음을 내가 아는 수련이다. 마음이 일어나는 것은 몸을 움직여야할 반연이 있을 때 일어나고, 누구를 만나는 반연, 할 일이 있는 반연이 있을 때 마음이 어떻게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리는 수련을 정념(正念), 마음 챙김, mindfulness exercise(마인드풀네스 엑슬사이스)라고 한다.
내 마음은 반연이 있을 때 일어나는 것이므로 반연이 없으면, 내가 나를 알아차릴 수 있는 기회가 없다는 원리를 이해해야 한다. 예를 들면,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자기를 알 수 있는 기회가 아주 적은 것이다. 여러 사람들과 더불어 있을 때 일어나는 스트레스가 자기 마음에서 일어나는 움직이라는 사실을 인증하지 못하고, 같이 있는 사람들의 탓이라고 생각하니 혼자 있는 것이 편안하다고 생각되지만, 이렇게 혼자 있는 것이 오히려 우울증에 원인이 될 수도 있다.

내가 나를 알아차릴 수 있는 기회를 충분히 나에게 제공하기 위해, 절에 와서 일이 많을 때를 택해 봉사활동을 할 것을 권장하는 것이다. 특히 미운 사람을 만날 때, 미운 사람이 나에게 말을 걸어올 때, 그에 대응하는 나의 마음의 움직임을 알아차리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마음 챙김 수행을 바르게 할 때, 나의 마음의 과오를 알아차리고, 나의 잘못된 생각의 틀을 알아차리며, 어떤 일에 내 마음이 고집하며 집착하는 지를 알아차릴 수 있다. 이 알아차리는 힘을 기르기 위해 정정(正定), correct concentration(콜렉트 콘센트레이션)이 필요한 것이다. ‘강한 집중력’으로 ‘마음 챙김’ 수련을 하여 잘못된 과오와 생각의 틀을 알아차리고, 강하게 부셔버리면 정견(正見), 바르게 볼 수 있는 눈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바르게 볼 수 있을 때, 바른 생각이 일어나고, 말하고, 행동하고, 우수한 직장인이 될 수 있고, 부지런한 사람이 되어 더욱 강한 집중력으로 마음 챙김 수련을 상향시켜, 일체 망상이 저절로 소멸되게 되어 아뇩다라 삼먁 삼보리에 이르게 되고, 그에 의지해 마하반야바라밀에 이르게 될 것이다.

마음 챙김으로 ‘나의 마음이 누구를 좋아하는 마음의 움직임을 알아차렸을 때’ 그 마음의 움직임을 보통 ‘나’의 마음이라고 우리는 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이때의 나의 마음을 ‘나’라고 하지 않고, 업아(業我)의 마음, 업식(業識)이라고 한다. 업으로 인한 가짜 나, 가아(假我)의 마음이다. 그러니, 아직도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뇩다라 삼먁 삼보리에 의지했다”는 말은 ‘마음 챙김’ 수행을 통해 업아(業我)의 업장(業障)을 완전히 소멸하였을 때 바른 ‘참나’ 진아(眞我)가 일어나는 것을 깨달아, 그 진아의 마음에 의지하였다는 뜻이고, “마하반야바라밀”은 그 진아에 의지하였을 때, 가장 완성된 지혜가 일어나게 된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 일반 중생은 수행을 통하지 않고는 ‘자기가 누구인지 도저히 알 수 없다. 그리고 일반적인 수행을 통해서 알아낸 ’나‘는 업(業)의 소생으로 나타나는 업아(業我)인지라 가아(假我)이지 “참나”는 아니다. 오직 정념(正念), 정정(正定) 수행을 정정진(正精進)하여 업장(業障) 소멸이 될 때 업아(業我)가 사라지고 진아(眞我)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 때 비로소 나는 “내가 누군지”를 알게 되고 체험할 수 있게 되는 법이다.

오늘 수다원계 수계식은 심공(心空)수다원님과 원공(願空)수다원님이 이와 같이 기나 긴 세월동안 진행될 수행에 입문(入門)하였다는 뜻으로 모든 신도님들이 증명하시는 가운데 수다원 수계증을 받게 된 것이다. 정념(正念), 정정(正定) 수행을 정정진(正精進)하여 업장(業障)을 소멸하고, 정견(正見)을 얻어, 바르게 봄으로서 바르게 생각하는 정사(正思)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바르게 생각할 수 있으니, 바른 말, 바른 행동, 바른 직업생활을 할 수 있게 되는 법이다.

그러므로 일체 수행은 정념(正念), mindfulness exercise에서 시작해서 정념(正念), mindfulness exercise에서 끝나게 됨을 명심하고, 얼굴은 거울에 비춰야 볼 수 있듯이, 마음도 반연을 만날 때 일어나는 속성을 가지고 있음으로 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지도 말고, 할 일이 많다고 싫어하지도 말며, 어떠한 반연이 내 앞에 나타나더라도, ‘또 새로운 나를 알아차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음에 감사할 줄 아는 수행자가 되도록 노력하기 바란다.’

수다원계는 법문을 설하고 신도님들을 신앙적으로 지도할 자격증이니 기독교에 비교하면 목사자격증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집사, 권사, 장로라고 불리는 기독교 계급보다 훨씬 위인 동시에 목사와 같은 지위이다.
목사에게 가족이 있듯이 수다원님들도 가족이 있다는 점에서는 목사와 같다. 그러나 목사들은 그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봉급을 받아야 함으로 그 봉급과 관련된 여러 가지 부작용을 일으킬 소지를 가지고 있지만, 수다원님들은 봉급을 받지 않고, 자기의 신앙을 위해 자기를 바친다는 의미에서 볼 때 수다원의 계위가 목사의 지위에 비교할 수 없이 숭고(崇高)하고 수승(殊勝)한 지위에 있음을 인식해 자부심을 가지시기 바란다.

오늘 수다원계를 받으신 심공(心空)수다원님과 원공(願空)수다원님께서는 항상 반연을 대할 때 일어나는 마음은 업심(業心)임을 알아차리시고, 업심(業心)은 곧 공(空)하다는 ‘마음 챙김’을 한 없이 하시리라 믿는다. 그리고 업심(業心)을 알아차리게 해 준 반연에 감사하고, 그 반연을 존중하는 습을 쌓아 가시기 바란다. 이렇게 가는 길에 아뇩다라 삼먁 삼보리가 있고, 비로소 진아(眞我) ‘참나’를 만나게 되는 것이니, 이 수행이야 말로 ‘나를 알게 되는 길’이며, 마하반야바라밀과 만나게 되는 길이니까요.

두 수다원님께서는 어떠한 반연을 만나더라도 두려움 없는 수다원이 되시고, 지혜와 자비가 항상 함께하여 원하는 일 원만히 성취하고, 항상 편안하며, 가정이 원만하고, 사회는 자유롭고 평화로워 불국정토가 되며, 이 지구상에 일체 중생들이 자유, 평등, 평화를 즐기게 되는 불사에 큰 축이 되어 주시기를 기원한다.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시어 수계의식을 증명해 주신 신도님들께도 심심한 감사를 드리고, 부처님의 가피 항상 함께하시기를 기원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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