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禪)밖의 선(禪)

2009.09.07 12:25

현성 Views:7052

선(禪)을 미국사회에서 메디테이션(meditation)이라고 부르는데 주로 절에 있는 선방(禪房)에서 하는 참선을 말한다. 선방에 가면 선을 지도하시는 스님이 계시고, 선방에서 하는 규칙에 따라 선(禪)수행을 하는데, 선방의 전통에 따라 그 방법과 분위기는 약간씩 다를 수 있지만, 참선이 지향하는 목표는 한결같이 깨달음을 얻고자 함에 있다.

스님들께서 하안거와 동안거 기간에 각 3개월씩 수행하는 시간을 갖는데 스님들 중에서도 3개월씩 안거에 참여할 수 있는 시간을 얻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스님들이 안거에 참여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마치 재가신도님들께서 봄, 여름, 가을철에 휴가 가는 시간을 얻고자 하는 마음과 비슷하다고 하겠다.

안거에서 수행하시는 스님들께서 궁극적인 목적인 깨달음을 얻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절에서 주어진 소임을 이행하는 동안에 있었던 어려운 일과 감정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것도 귀하다고 하겠다. 더욱이 스님에 따라, 안거가 끝난 후에, 다시 접하게 될 세속적인 갈등을 해소하고 누구나 함께 즐길 수 있는 전당(殿堂)으로 분위기를 바꾸어 놓기 위해 스스로 해야 할 바를 구상하기도 할 것이다.

 

안거에 입방할 때는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들어가지만 안거가 끝나고 돌아올 때는 가볍고 시원한 마음으로 나오게 된다. 그것은 아무리 큰 뜻을 가지고 메디테이션을 하고 또 한다고 하더라도 그 답은 너무나 의아할 정도로 항상 간단명료하기 때문이다. 원(願)이 크다고 무슨 큰 설계도가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내려놓아라.”이다. 모두 내려놓았으니 가볍고 시원할 수밖에 없다.

“내려놓아라.” 정말 간단명료하다. 그러나 실제 “내려놓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 것 같다. 그 동안 많은 사람들을 대하여 왔지만 “내려놓는다.”는 것을 생각해본 사람도 드물지만, 매 순간, 무엇인가 많은 것을 짊어지고 다니는 사람이 많다. 짐이 너무 무거우면 자연히 마음고생이 심할 수밖에 없고, 더욱이 뜻밖에 일이 생길 수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도 짊어지고 다니지 않을 수 없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그렇다. 스님이니 “내려놓을 수 있는 것이다”

“내려놓으면” 아무 것도 없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원력(願力)은 “내려놓는데서 시작한다.” “모두 내려놓는 때와 장소”에서 원(願)은 뿌리를 내리고, 자라며, 열매를 맺는다. 비록 깨달음을 얻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모두 내려놓으면” 원(願)이 세워지고, 그 원을 이룰 수 있는 원력(願力)은 가피를 받는다.

 

선방(禪房)은 깨달음으로 가는 길목에서 휴식처가 되기도 하고, 가야할 길의 방향을 제시해 주기도 한다. 그러나 진작 깨달음 그 자체는 선방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선방에서만 깨달음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가정하여 보면 한국의 그 많은 선객(禪客)들 중 깨달음을 얻은 스님은 수없이 많을 것이고, 오늘의 한국불교의 모습은 지금의 모습이 아닐 것이다. 깨달음은 묘해서 일정한 때와 장소 없이 일어난다. 책이나 교육을 통해 얻어지는 지식에 있는 것이 아니니 박사가 되었다고 깨달을 수 있는 법도 아니요, 상식이나 경험에 있는 것이 아니니 참선법에 상식이 많다거나 참선한 경험이 많다고 깨닫는 법도 없다.

부처님께서도 6년간 고행 끝에 새벽 햇빛을 보고 그 끝이 없는 깨달음을 얻어, 불법의 시조(始祖)가 되셨고, 원효대사께서는 중국에 가기 위해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 근처에 도착하였을 때, 밤이 되어 토담에서 잠을 잘 자고 아침에 일어나 보니, 그 곳에 사람해골이 있는 것을 보고, 무덤임을 알게 되니 무서운 생각이 일어났다. 그런데 마침 중국으로 떠나는 배가 없어, 하루 밤 더 그곳에서 자게 되었는데, 그날 밤에는 귀신이 수없이 나타나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 때 그는 “마음이 일어나니 이 우주의 법이 일어나며, 마음이 멸하니 모든 법이 사라진다.”는 마음의 법을 크게 깨닫고 중국에 갈 것을 포기 하고, 신라 서울로 돌아와 불법을 크게 폈다. 그가 서기 600년대 사람이니 140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그와 비교될 수 있는 스님이 아직 나오지 않았다.

중국의 육조 혜능선사는 원효스님보다 21년 후대의 선사였는데, 그 스님이 젊은 나무꾼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을 때, 한 스님이 금강경을 독경하는 소리를 듣고 있던 중, “마음이 상(相)에 머물음이 없음에 그 마음이 일어난다.”는 대목을 듣고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스승을 찾아가 그 스님의 인가를 받고 중국선종의 대가가 되어 오늘날 동양선종의 원조(元祖)가 되었다. 이 경우 역시 금강경을 독경하던 스님이 깨달은 것이 아니라, 그 독경을 듣고 있던 나무꾼이 깨달았으니 깨달음이란 정말 묘하게 일어나는 법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이 선(禪) 밖에서 얻어진 큰 깨달음의 예는 너무나 많으니, 재가신도님들께서 시간이 없다고 탓할 바는 없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수행하는 마음을 바로가지면,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黙動靜), 선(禪)아닌 것이 없으니, 생활하는 그 자체가 바로 선(禪)이요, 직장에서 하는 일 그 자체가 가장 깊은 선심(禪心)을 요구하고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마음의 문이 열리면 자기가 그동안 잘못알고 있었던 사실이 보이고, 바른 사실이 보이는 것이 바로 깨달음이고, 깨달은 데로 행하려고 노력하는 행위가 보림이다. 문자를 쓰면 이것을 돈오점수(頓悟漸修)라고 했다. 작은 깨달음도 있고 큰 깨달음도 있기에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바를 가장 높은 깨달음이라 하여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이라 했다.

우리에게 어렵고 불행하다고 느끼는 때가 있다. 그것은 생각을 잘못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니, 잘 관찰해서 그 잘못하고 있는 생각을 정확하게 깨달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불행을 씻고 행복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선(禪)밖의 선(禪)이다.

 

대한불교 조계종 시카고 불타사 현성 합장

2009.9.6.

 

No. Subject Author Date Views
118 돌아가시다 현성 2009.09.20 9124
» 선(禪)밖의 선(禪) 현성 2009.09.07 7052
116 지혜와 탐욕 현성 2009.08.16 7324
115 봉사(奉事)와 불교 현성 2009.08.01 6747
114 자유(自由)와 성장(成長) 현성 2009.07.14 6935
113 인간(人間)과 인생(人生) 현성 2009.07.06 7610
112 건강(健康) 현성 2009.06.21 6711
111 무한경쟁과 극한투쟁 현성 2009.06.02 6992
110 단(斷)과 불생(不生) 현성 2009.05.11 6779
109 차별(差別)과 무차별(無差別) 현성 2009.04.20 6981
108 사랑과 명상 현성 2009.03.29 7271
107 평화와 불교 현성 2009.03.09 7028
106 맑고 밝은 것이 있을까? 현성 2009.02.03 7349
105 바르게 배우자 현성 2009.01.04 7219
104 몸과 사랑 현성 2008.12.23 7757
103 안녕과 사랑 현성 2008.12.01 8376
102 예수 천국, 불신 지옥 현성 2008.11.16 8599
101 시어머니와 불교 현성 2008.10.21 8294
100 불교와 사랑 현성 2008.10.05 8387
99 보시와 부드러움 현성 2008.09.09 77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