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등 (불기2552년 부처님 오신날 법문)

2008.08.26 22:37

현성 Views:8537

연등


연등(蓮燈)은 연꽃 모양으로 장엄한 등(燈)이니 연꽃과 등의 합성어이다.

연꽃은 불교인의 의지를 상징하는 꽃으로 진흙탕 연못에서 그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아름답게 피어서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꽃이 될 수 있다는 뜻을 상징하는 것으로 어려운 환경에서도 부처님의 법에 따라 살아가고자 발심하고 그 의지를 지속적으로 유지함으로서 자신도 행복하고 이웃 사람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의미를 갖는다.

등(燈)은 어두움을 밝히는 등이다. 부처님의 8만4천가지 법문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등으로 표현할 수 있다. 등불이 있으면 공간이 밝아지고, 밝으면 어두움은 저절로 사라진다. 등불이 없는 것이 곧 어두움이다. 공간적인 차원에서 보면 등불은 촛불도 될 수 있고, 전등(電燈), 달빛, 햇빛 등 다양한 빛으로 어두움을 밝힐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의 어두움은 무명(無明), 즉 밝지 못한 마음으로 번뇌, 괴로움, 공포, 환상 등으로 나타나는 마음이다.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두려운 마음을 일으키는 마음은 마음의 어두움에서 오는 것이라 하시고, 어두움은 또 다른 어두움으로 지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시며 어두움을 없애기 위해서는 등불이 있어야 한다고 하셨다. 등불만 있으면 어두움은 저절로 사라지는 법이라고 하시고, 등불은 곧 지혜(智慧)의 대명사라고 하셨다.

등불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이 몸을 밝히는 등이고, 둘째는 극락을 밝히는 등이며, 셋째는 열반을 밝히는 등이라고 하셨다.


첫째, 몸을 밝히는 등이란 사람들이 자기 몸이 어디에서 왔는지, 몸이 움직이는 법칙이 무엇인지를 알지도 못하면서 안다고 착각하고 어리석게 살아가기 때문에 몸에 병이 생기고 뇌(惱)에는 번뇌(煩惱)가 일어나는 법이라고 하셨다. 부모로부터 받은 이 몸임을 인식할 때, 그 부모님들은 그 위 부모, 또 그 위 부모 즉, 조상 대대로 내려온 유전인자가 내 몸 안에서 생명으로 생동하고 있음을 인식할 때 부처님의 가르침의 효(孝) 사상을 바르게 인식할 수 있고, 효(孝) 사상을 바르게 인식했을 때 비로소 윤리도덕관이 바르게 세워지는 법이라고 하셨다. 이러한 법은 누가 가르쳐서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 눈으로 보고 인식하게 되면 저절로 믿어진다고 하셨다. 부처님께서는 믿으라고 해서 믿는 것은 미신(迷信)이라 진실(眞實)을 볼 수 없는 법이라고 하시며 일체법이 움직이는 법칙을 항상 살펴볼 것을 권하셨다.


모든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 자기 몸이 움직이고 있는 법칙을 관하여 그 법칙에 순응할 것을 권하셨다. 부처님께서 고행림(苦行林)에서 나오셔서 목욕을 하시고 수자타가 주는 우유죽을 드시고 원기를 회복하신 후, 보리수 아래 금강좌에 앉으시어 무상정등정각을 이루시고 하신 첫 말씀이 고행림에서 하는 고행은 고행을 위한 고행으로서 깨달음에 도움이 되지 못하고, 안락한 생활에서 수행하는 것도 깨달음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하시며, 수행의 중도(中道)를 선언하셨다. 이 수행의 중도(中道) 선언이 바로 이 몸이 움직이는 법칙, 지수화풍(地水火風)과 식(識)이 몸에서 움직이는 법칙을 잘 살펴 그에 순응하며 하는 수행법인데, 이것을 후에 위빠사나 선이라고 했다. 육체에 임의로 고통을 가하는 것은 이 법칙을 어기는 어리석음에서 오는 것이니 몸의 움직임을 관하여 지혜로서 어리석음을 밝히라고 하셨다.


그리고 마음은 몸이 일으키는 탐욕인 줄 알지 못하고 사물이나 애정(愛情)에 탐을 내는 것이 고난(苦難)의 원인이 된다고 하셨다. 이렇게 몸으로 인해 일어나는 고난을 없애기 위해서는 자신의 몸과 마음이 시시각각으로 변해갈 뿐만 아니라 돈이나 명예, 욕락도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바로 보고 바로 알라고 하셨다. 이를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하셨는데 이 법을 스스로 인식할 수 있을 때 자기 자신을 위해 구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구하는 마음이 사라지면 너와 나의 상대적인 개념(槪念)이 끊어지고 무념(無念) 무상(無想)에 들게 되는데 이 세계가 바로 등불의 둘째 의미인 극락을 밝히는 등이라고 하셨다. 불교의 극락세계는 바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국이고, 천주교회에서 말하는 천당이다.


그리고 보통 사람들의 마음은 자기 몸이 자기라고 생각하고, 그 몸의 자존심을 유지하기 위해 남과 차별화 하려하고, 그 몸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남을 업신여기기도 하고, 남이 잘 되는 것을 싫어하고 질투하기도 한다. 이러한 마음은 남을 의식하는 마음으로 항상 남과 자기를 이원화(二元化)하는 마음인데, 이원화된 마음이 곧 이기심의 원인이고, 이기심은 자기의 이익을 위해 경쟁심을 일으키고, 그 경쟁이 격화되면 투쟁 혹은 전쟁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은 이 우주 만물의 일체, 즉 지수화풍(地水火風)과 식(識)이 서로 연기하고 있음을 모르는 어리석음에서 오는 것이고, 극심한 고통의 원인이 된다. 이 몸 자체도 지수화풍(地水火風)과 식(識)의 인연(因緣)으로 전생에서 금생으로 윤회한 것이고, 현재 유지되고 있으며, 어느 때 인가 연이 다하여 지수화풍과 식이 흩어지면 이 몸은 다시 다음 생으로 윤회 한다. 이러한 인연으로 이 몸이 있고, 이 몸이 있으므로 내가 있는 법이니, 나라고 할 만한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모른다. 이 인연법을 부처님께서 제법무아(諸法無我)라고 하셨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나는 없다’고 하는 무아(無我)의 의미이다. 이 무아의 경지가 바로 극락의 경지이다.


부처님께서는 ‘내 말을 믿지 말고 죽은 사람을 잘 살펴봐라. 네 눈으로 네가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내 말을 믿으려고 하지 말고 네 스스로 보고 깨치도록 하여라. 이 세상에 일체 법이 연하여 생하고, 멸하는 이치를 스스로 깨치게 되면 연(緣)을 조합하여 원하는 물건을 만들어 낼 수도 있고, 원하지 않는 물건을 분해할 수도 있는 지혜를 얻으리라.’고 하셨다. 제법무아(諸法無我)의 법칙을 깨달아 무아(無我)가 되면 욕망의 세계를 떠난 것이 되니, 몸으로 인해 구속받는 세계를 밝혀 몸이 일으키는 욕구에서 해탈하여 다음 단계인 극락세계에 든 것이다.

그리고 연(緣)을 조합하여 무엇인가 원하는 것을 만들어 낼 수 있고, 원하지 않는 것은 분해하여 흩어내는 등의 지혜는 능히 생하게 할 수 있는 능생(能生)과 능히 소멸할 수 있는 능멸(能滅)의 지혜를 증득한 것이니 이를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무상정등정각, 반야바라밀, 법성, 열반 등이라 하여 최상의 깨달음이라 한다. 이 지혜를 증득한 ‘나’는 이미 너와 나의 상대적인 개념이 소멸되고 능소(能所)가 없는 이치를 깨달은 다음 이 우주와 하나가 되었으니, ‘나’ 속에 이 우주가 있고, 우주 속에 내가 있게 된다. 이를 법성게에서 일중일체(一中一切) 다중일(多中一)이라고 했다. 이것이 셋째 열반을 밝히는 등불인데, 이 세상 혹은 우주를 밝히는 등불이란 의미도 있다.


이 최상의 깨달음을 얻은 ‘나’가 바로 하느님이 되는 것이지만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이나 천주교에서 말하는 천주님에 비교할 수 없는 위없이 높은 분이 된다고 하셨다. 왜냐하면 이 우주에는 어떠한 것도, 형(形)이 있는 것이든 형이 없는 것이든, 연(緣)이 없이 홀로 독생(獨生)할 수 있는 하나님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이 최상의 법을 깨달으시고 말씀하시기를 ‘내가 깨닫고 보니까 사람 뿐만이 아니라 일체 중생의 마음에 이 세 가지 세계가 있다. 처음 것이 욕계(欲界)요, 둘째가 색계(色界)이고, 셋째가 무색계(無色界)이다. 이것을 불성(佛性)이라 하는데 너희들에게 이 불성이란 보배가 있으니 이를 활용하여라. 그러면 항상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이 불성은 내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내가 이 세상에 오기 전에도 있었고 그 후에도 늘 있을 것이다.’라고 하셨다. 즉 불성(佛性)의 자연성(自然性)을 말씀하셨고 이에 도달하는 길을 밝히셨다.


4월 초파일 연등을 우리들이 밝히는 이유는 바로 어느 성인도 밝히시지 못한 우주의 진리를 깨달으시고 그를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신 부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받들어 봉축하는 의미와 동시에 그 가르침을 받들어 실천하겠다는 원력(願力)을 세우는 의미도 있다.

이것이 4월 초파일 모든 불자들이 연등을 밝히는 연유이다.

그리고 4월 초파일 연등과 더불어 올리는 평상등(平常燈)이 있다. 평상등은 평소에 올리는 등이란 뜻인데, 우리 절에서는 법등(法燈)이 있다.

이 법등의 의미는 위에서 설명한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우리들의 마음에 있는 세 가지 세계를 실제로 우리들 스스로 밝히고자 하는 원력을 세우는 지혜의 등이다.

원력의 지혜란 한 달 수입에서 지출의 순위를 정할 때 법등비를 지출순위 1번으로 정하겠다는 의지가 원력의 지혜이다. 육바라밀에서 보시바라밀을 제일 순위로 한 의미가 바로 원력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며, 그 원력을 세우는 마음이 곧 지혜이니 원력지혜가 되는 것이다. 이 원력지혜는 자녀들에게도 어릴 때부터 교육시키는 것이 자녀들의 장래를 축복해 주는 길이 될 것이다. 이 원력지혜는 또 하루에 108배를 꼭 하겠다든가, 참선, 사경 혹은 독경을 매일 하겠다고 원을 세우는 것도 역시 원력지혜에 속하고, 자기가 가진 악습(惡習), 특히 화냄을 깨달아 그를 끊겠다는 의지도 원력에 속한다. 


원력을 세웠으면 원력으로 결정된 그 마음을 지속적으로 유지해 가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그 원력을 실천하는 마음이 바로 정진(精進)지혜이다. 어떠한 고난과 어려움이 와도 어떠한 유혹이 있어도 굴함이 없이 그 원력을 지속하는 지혜가 정진지혜이다. 자기 몸을 관찰하는 가운데 부모로부터 받은 자기 몸과 생명에 대해 감사한 마음이 우러나게 되고, 그 마음에서 부모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과 이웃을 공경하는 마음의 싹이 트게 되고, 그 마음에서 윤리 도덕관이 정립되고 실천하게 된다.

계속해서 몸의 움직임을 관찰하다보면 몸이 요구하는 것들을 알아차리고 절제할 것은 절제하고, 들어 줄 것은 들어 줄줄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끊임없이 노력하는 정진하는 지혜는 법등에서 나온다. 몸이 요구하는 것 중에는 편식, 음료수, 담배, 술, 약물, 애욕(愛欲), 물욕(物慾), 불안(不安), 화냄 등 다양하다. 그리고 몸이 필요로 하는 것은 음식을 다양하게 섭취해야하는 것과 각종 운동을 필요로 하는 것 등이다.


이렇게 정진하는 지혜로 마음을 조절할 수 있을 때 자기 이익을 위해 구하는 마음을 일으키는지 아닌지를 분간할 수 있게 된다. 어떠한 생각도 자기 이익을 위한 생각은 허상(虛想)이고 망상(妄想)이 됨을 알아 차려야한다. 왜냐하면 제행이 무상하기 때문이다. 즉 자기 이익을 챙기려하는 마음은 아직 제행이 무상함을 실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제행이 무상함을 실감하고 자기 이익을 위한 생각을 일으키지 않게 되면, 이것이 곧 구하는 마음이 없는 마음을 실현한 것이다.

자기의 이익을 위해 구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그동안에 있었던 근심 걱정할 소재가 모두 없어지고 평온한 마음을 얻게 된 사람이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은 곧 무념(無念), 무상(無想), 무아(無我)에 들게 된다. 제법무아를 체험하였으니 반야지혜의 문이 열리게 되는 데, 이도 법등에서 나오는 힘이다. 이 때 이 몸에 극락의 등불이 마음의 평안을 밝혀 주게 된다.

반야지혜는 혹은 열반의 지혜의 등불은 능소가 해소 되고 내 마음이 곧 우주를 포용할 수 있는 마음이 되어 일체중생을 자비로 포용하는 마음의 등불이 열리고 그들의 고통을 해소해 줄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 보살행을 하는 보살이 되는 것이니 자비지혜의 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법등의 힘은 자비지혜의 근원이 된다.

법등은 평상등으로서 법등을 키는 불자들의 마음에 원력을 일으키는 지혜를 갖게 하고, 원력을 가지면 정진하는 지혜를 갖게 하고, 정진을 하면 반야지혜를 갖게 하고, 반야지혜를 가지면 자비지혜를 갖게 하는 등불이 되는 것이니 성불의 동력이 되는 등불이 곧 매월 여러분들이 정성 드리는 법등에서 나온다.


등불을 물에 비유하여 다시 한 번 설명 드리면, 사람이 몸의 욕구를 밝혀 집착을 끊게 하는 것은 얼음이 얼음에 집착하는 것을 끊게 하는 것에 비유한다. 사람이 몸의 욕구를 밝혀 해탈하여 대자유를 얻는 극락을 얼음이 녹아 물이 되어 어떠한 형태에도 구속받지 아니하고 자유자재로 무엇이나 수용하는 능력이 있음을 보인다. 극락의 등불은 완전히 상대적인 개념을 떠나 능소(能所)가 소멸되고 공(空)으로서 우주와 하나가 되는 반야지혜를 낳는다. 이는 물이 증발하여 대기(大氣) 즉 공(空)과 하나가 되는 모습이다. 반야지혜의 등불은 중생을 제도하는 자비지혜로 화하는데, 이것은 공중에 모인 증기가 다시 비가 되어 만중생에게 생명력을 돋우어 주는 것에 비유되는 것이니 우리의 발원은 연등의 이 세 가지 의미를 깊이 이해하고 평상등으로서 원력을 세우고 생활 속에서 정진해 연등의 세 가지 의미를 구현하는데 있다.


대한불교 조계종 시카고 불타사 주지 현성

불기 2552(2008)년 5월 1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