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존재의 본질은 무엇이며 삶의 가치는 무엇일까?


영혼(靈魂)을 불교에서는 아뢰야식 혹은 제8식(第八識)이라한다. 나의 영혼이 전생에 지은 과보에 따라 금생에 부모를 만나 ‘나’라는 이 몸을 받아 이 세상에 태어나 부모의 보호를 받으며 자라 현재에 이르렀다. 그러나 삶을 위한 생활에 바빠 나의 존재의 본질이나 삶의 가치를 미처 생각할 겨를도 없이 오늘에 이르렀다.


‘나’라는 존재의 본질은 과연 무엇일까? 무엇이 ‘나’를 이 땅에 사람으로 태어나게 했을까?

좋은 사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해서 자녀 낳아 기르고 돈 많이 벌어 잘 살다가 가려고 이 세상에 왔을까? 수 없이 많은 고역을 겪으며 파란 많은 인생을 살다 가려고 이 세상에 태어났을까? 아니면 무슨 뜻을 펴보려고 이 세상에 왔을까? 뜻을 펴보려고 왔으면 무슨 뜻을 가지고 왔을까?

이 ‘존재의 본질’은 살기 위해 사는데 있는 것일까? 목숨이 붙어 있으니 사는 것인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사는 것인가? 돈 벌기 위해 사는 것인가? 저 세상에서 올 때 가지고 온 뜻을 펴기 위해 사는 것인가? 가지고 온 뜻을 펴는 삶을 본질로 한다면 나는 과연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인가?


불교에서 나의 ‘존재’는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에 의해 표현된다. 색은 몸이고, 수는 눈, 귀, 코, 혀, 몸이 사물과 닿았을 때 일어나는 느낌이고, 상은 그 때 일어나는 생각, 행은 그 생각에 의해 일으키는 결정, 식에 영혼(제8식)이 포함되어 있으니 전생에 지은 업에 따라 느낌, 생각, 결정을 하여 말이나 행동이 일어나고 그 느낌 생각 결정 말과 행동은 다시 식에 저장되어 미래의 행의 본질이 된다.

이와 같은 업의 작용에 따라 말이나 행동은 과거의 업을 상속받아 일어나므로 과거의 업에 의해 현재의 말과 행동이 구속받아 일어나는 것이고, 현재의 말이나 행동은 미래의 말이나 행동을 구속한다. 이와 같이 현재의 말과 행동은 과거의 말과 행동에 의하여 구속받고, 미래의 말과 행동은 현재의 말과 행동에 의해 구속 받게 됨으로 우리들에게는 말과 행동의 자유가 실제로는 없는 것이다.


오늘 ‘나’의 존재는 과거에 지은 업에 의해 생(生)을 받음으로서 이루어진 것이니 ‘나’의 말과 행동은 과거에 지은 업의 소산(所産)이다. 그러므로 ‘나의 존재의 본질’은 내가 지은 과거의 업에 있고 ‘나의 현재의 존재’ 자체가 업보(業報)이다. 이러한 인연으로 내가 짓는 모든 악업은 시간과 비례하여 증가할 뿐이고 악업의 증가는 곧 고통의 증가인 동시에 원인이다.

이러한 업보의 쇠사슬을 모두 끊어버리는 것이 바로 모든 구속에서 해탈하여 비로소 말과 행동의 자유를 향유하는 대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운명 결정론을 부정(不定)하고 각 개인이 자기의 업을 혁신(革新)함으로서 스스로 운명을 바꾸어 새로운 사람이 되어 삶의 가치를 향상시킬 수 있다는 것이 불교의 신앙적인 사상이다.


우리의 마음의 작용을 면밀히 관찰하여 볼 때 말과 행동은 내 마음에서 ‘결정’한 결과이고 ‘결정‘은 ’생각‘의 결과이며 ’생각‘은 ’느낌‘의 결과이다. ’느낌‘은 눈, 귀, 코, 혀, 몸이 사물과 접촉하는데서 일어난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눈, 귀, 코, 혀, 몸이 사물과 접촉했을 때 일어나는 ’느낌‘의 단계나 ’생각‘의 단계에서 지극한 정성으로  마음을 착하게 쓰려고 정진하고 중생에게 이익 되는 일이 아니면 악업을 짓기보다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는 굳은 결심을 가지고 실천하면 착하고 이익이 되는 결정을 하게 되고, 착하고 이익이 되는 결정을 하면 착하고 이익이 되는 말과 행동이 나오게 된다. 현재의 착하고 이익이 되는 느낌 생각 결정 말과 행동은 식(識)에 저장되어 미래의 말과 행동이 현재의 말과 행동을 상속받아 미래에는 더욱 쉽게 착하고 이로운 말과 행동을 하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사수관을 통해서 과거에 지은 그릇된 업장을 소멸하여 현재 우리의 느낌, 생각, 결정, 말과 행동이 자연스럽게 선(善)하고 이롭게 할 수 있는 지혜를 얻어 존재의 본질과 삶의 가치를 바르게 이해하고 실천하여 내생에는 만 중생을 위해 더욱 착하고 이로운 일을 할 수 있는 존재가 되기를 염원하고 실천한다.


마음속에 저장된 모든 업을 소멸하였을 때 이것을 위없이 청정한 도를 이루었다고 하기도 하고, 대각(大覺)을 이루었다고 하기도 하며, 내 본래 고향에 돌아왔다고 표현하기도 하고, 본성(本性)을 보았다고 하기도 하며, 열반에 들었다고 하기도 하고, 진여(眞如) 혹은 무아(無我)라고도 한다. 더 이상 소멸할 업이 없으므로 이 세상에 다시 생(生)을 받지 않는 열반에 든다. 그러나 업을 완전히 소멸한 사람이 이 세상에 다시 와서 중생제도를 하겠다는 보살심을 발할 때는 보살심의 선업(善業)이 있으므로 이 세상에 원하는 생을 택할 수 있다. 업에 의해 구속된 생이 아니라 자유의사에 의한 생을 받게 된다.

이와 같은 염원을 실천하기 위해 우리는 오늘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관하는 사수관”을 통해 현재 내 존재의 본질과 삶의 가치를 심사(尋思)하고 부정(不淨)한 것을 정화(淨化)하여 삶의 의미를 더욱 넓고 깊게 하여 모든 중생을 포용할 수 있는 지혜를 구족하고자 함에 있다.


2006. 5. 24.
불타사 주지 현성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