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쟁(分爭)의 씨앗

2007.04.15 23:11

bultasa Views:6847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고 화목하며 평화롭게 살아가기를 원한다. 그러나 행복, 화목, 평화라는 것이 홀로 이룰 수 있는 일도 아니요, 내가 하고 싶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내가 상대를 위한다고 한 것이 오히려 화근(禍根)이 될 수도 있고, 별로 생각한 것 없이 한 말이 분쟁의 씨앗이 될 수도 있다.
평화를 위해 첨단 무기를 개발하고 군비를 확장하여 전쟁을 해야 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행복을 위해 남을 살해하거나 혹은 이혼을 해야 하는 수도 있고, 한 단체를 위해 혼신을 다 받친 일이 그 단체를 오히려 양분(兩分)시키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이러한 이율배반(二律背反)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사람은 나면서부터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심, 남이 가지고 있는 것을 자기가 갖고 싶을 때 빼앗고자 하는 욕심, 자기의 장난감이 많이 있는데도 남이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 더 갖고 싶은 충동 등을 생각해 보면 물욕(物慾)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가지고 태어나는 듯하다.
잘생긴 남자, 예쁜 여자를 한 번 더 쳐다보게 되는 애심(愛心)도 어쩔 수 없는 대다수 사람들의 마음 작용이 아닐까.
자기가 한 일을 남이 알아주지 않으면 섭섭한 마음을 금할 수 없고, 남이 잘하는 것을 보면 심술궂은 마음이 일어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사람들의 마음 작용이라 여겨진다.
이러한 마음 작용이 심하게 충동을 받았을 때 분쟁의 씨앗이 심어지는 것이 아닐까?

불교에서는 이러한 마음 작용을 몸으로 짓는 업, 말로 짓는 업, 마음으로 짓는 업의 소산이라 한다. 업(業)이란 한 가지 일을 계속 반복하다 보면 그 행이 마음속에 저장되어 유사한 환경에 접하면 그 행동이 저절로 일어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이 때 마음에 저장되어 반복되는 행이 일어나게 하는 인자를 업이라 한다. 어떠한 입장에 처했을 때 담배를 피우고자 하는 충동을 일으키는 인자가 업의 소산이다.
이렇게 쌓인 마음속의 업이 마치 유전인자와 같이 전생에서 금생으로 이전(移轉)되어 왔고, 금생에 지은 업은 내생으로 이전되는 인자(因子)가 된다고 한다. 초년에 지은 업은 청년기로 옮겨 오고, 청년기에 지은 업은 장년기, 장년기에 지은 업은 말년으로, 그리고 말년에 지은 업은 내생으로 이전 되는 것이라고 불교에서는 믿는다. 즉, 사람이 타고나는 성품이 바로 전생에 지은 업의 소산이라고 본다.
전생에서 싸우기를 좋아한 사람은 금생에 싸우기를 좋아하는 업을 가지고 태어났고, 시기, 질투가 심한 사람도 그와 같다. 애심(愛心)이 쉽게 변하는 사람이 새로운 애인을 만났을 때, 사랑했던 사람의 마음에 분쟁의 씨앗을 심어주게 된다. 그리고 이들이 사랑했을 때 낳은 아이들에게도 물론 분쟁의 씨앗은 심어져 어른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스트레스를 어린 아이들이 받게 된다. 모두가 자기의 행복을 추구하는 일이지만, 그 일이 반드시 자기와 인연된 사람들과 같이 행복을 나누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불행을 초래하게 되는 일들이 흔히 있다.

이러한 불행한 일이 반복하여 일어나게 되는 원인은 우리들의 마음이 순간순간 변하고 있는데 자신은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설사 느낀다고 해도 그 변화를 합리화시키는 마음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남편이 있는 한 여인에게 애인이 생겼을 때, 그 변화를 합리화시키는 마음이 일어나는 경우이다. 그리고 부인이 있는 한 남자에게 애인이 생겼을 때, 이 남자는 그 애인이 자기 부인보다 더 예쁘고 더 사랑스럽다고 생각해, 모든 희생을 무릅쓰고 연인의 관계를 유지하려고 할 수 있다. 이 때 이 남자가 느끼는 그 여인에 대한 사랑은 이 남자의 생각에는 참사랑이라고 느낄지 모르지만 이 남자가 가지고 태어난 업의 씨앗이 느끼는 참사랑이지, 외도를 좋아하는 업이 없는 남자가 느끼는 참사랑은 아니다.
김치를 좋아하는 업이 있는 우리에게는 김치 맛이 좋지만 김치를 좋아하는 업이 없는 사람은 김치 냄새를 싫어하는 이치와 같다. 하나님이 있다는 신념도 하나님이 없다는 신념도 이와 같은 업의 소산이다. 업의 소산이므로 분쟁의 씨앗이 있고, 분쟁의 씨앗이 있으므로 자유와 평화를 위해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 종교전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모순에 빠져 있는 것이 중동지역의 예이다.

나의 행복이 이웃의 행복도 함께 되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업으로 지어진 분쟁의 씨앗들이 완전히 지워져야 한다. 분쟁의 씨앗이 완전히 지워지면, 나와 남을 분별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일체를 내 몸과 같이 자비(慈悲)로운 눈으로 볼 수 있는 혜안(慧眼)이 열리게 된다.
전생에서부터 쌓여온 잘못된 업을 소멸하는 일만이,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여, 사견(邪見)이 없는 ‘나’, 정견(正見)으로 세상사를 볼 수 있는 ‘나’로 승화될 수 있다. 정견으로 승화된 ‘나’는 잘 잘못에 치우치지 않는 자신의 평정(平靜)을 이루기에, 분쟁(分爭)의 씨앗이 없는 가정의 행복과 사회의 태평과 세계평화에 기여할 수 있는 정견(正見)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2007. 4. 15
대한불교 조계종 시카고 불타사 주지 현성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