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성지 순례기(1)

2007.02.25 19:11

bultasa Views:7137

인도 성지 순례기(1) - (현성스님, 2005.2.20)


미국 시카고 불타사에서는 인도성지 순례를 위해 2004년 1년동안 준비하여 2005년 1월12일 시카고 시간으로 낮12시에 대한항공편으로 오해어(O'Hare)공항을 출발하여 13시간 정도 걸려 서울 인천공항에 도착하였다. 공항에서 4시간동안 대기한 후 다시 대한항공편으로 인도로 향하여 9시간 걸려 뭄바이(Mumbai)공항에 인도 시간으로 1월14일 금요일 새벽3시10분에 도착하여 숙소인 리란(Leelan)호텔에 도착하니 오전4시10분이었다.


우리 일행은 유명성행, 손예숙, 이해심, 이현숙, 원자현심, 김유심화, 조덕인화, 김수경심, 강창근, 이성자, 나 그리고 서울에서 합류한 두 분의 불자님과 이기만 금강여행사 사장을 합하여 모두 14명이었다.


호텔은 별등급이 7개(7 Star)라 고급이었고 호텔에서 처음 만난 인도 사람들은 친절하면서도 침착하게 보였다. 보살님들에 의하면 호텔에서 일하는 남자들이 모두 잘생겼다고 말씀하신다.


시카고 묘우 보살에게 전화하였다. 인도 시각으로 14일 금요일 새벽5시36분이 시카고는 13일 오후6시16분이었다. 시차가 인도가 시카고보다 12시간30분 빠르다. 예를 들면 시카고 아침6시가 뭄바이는 같은 날 오후5시30분이라고 알면 되겠다.


1월14일 금요일 오전8시30분 기상하여 9시에 호텔 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하였다. 부테스타일인데 다양한 메뉴와 음료수가 준비되어 있어 모두 식사를 즐겁게 먹었다. 아침10시에 간디박물관, 웨일즈박물관을 관람한 후 중국식당에가 점심을 먹었는데 별로 입에 맞지 않았다. 그 후 영국 조지(George)세자가 인도를 방문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인디아게이트(India Gate)를 보고 난 후 한 시간정도 배를 타고 엘레판트 섬에 있는 힌두교 석굴암에 갔다. 조각한 돌로 된 힌두신들과  남근(男根) 석상이 있었다. 그 가까이에서 남근을 쳐다만 보고 있는 우리들에게 그 곳 사람이 우리들에게 절을 하라는 시늉을 하여 우리도 합장 배례하였다. 남근을 만물의 창조신으로 숭상하였던 힌두신앙 시대를 보이고 있었다. 남녀의 사랑을 음양이 조화하는 창조의 과정으로 묘사하는 웅장한 조각이다. 아쉽게도 동굴안이 너무 어두워 사진기가 그것를 잡을 수 없었다.

간디박물관에서는 간디를 인도의 아버지로 숭앙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도 석가모니 부처님 이후 인도가 낳은 가장 위대하신 분이 간디가 아닌가 생각되어 미국에 돌아가면 그의 생애를 한 번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웨일즈박물관에는 돌로 된 조각품들이 많이 진열되어 있었는데 거기에는 불교, 자이나교, 힌두교 작품들이 섞여 진열되어 있었다. 주로 6-8세기 작품들인데 자연석을 채취하여 모양을 새기고 다듬어 진열한 것이었다. 한국에서 옛날에 바위에 새겨진 불상을 도굴하여 일본으로 가지고 갔다는 말을 듣고 어떻게 조각에 아무런 손상 없이 거대한 암석을 떼어낼 수 있었을까 생각했었는데 진짜 그렇게 할 수 있는 기술이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자이나교 불상과 불교 불상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똑 같았다. 다만 앞가슴의 두 젖꼭지 선과 가슴 중앙선이 만나는 점에서 약간 위에 위치한 조그마한 다이아몬드형 세모선이 있는 것은 자이나교 부처님 좌상이고 없는 것은 불교 부처님 좌상이라고 구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입상의 경우에는 자이나교 불상은 나체모양을 하고 있고 불교 불상은 가사를 걸치고 있기 때문에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오늘 느낀 점은 인도사람들이 주는 인상이었다. 너무나 사람들이 정중하고 공손한 모습, 그리고 불만이 없고 서두르는 모습이 없는 듯 보이는 점이다. 이들은 평화와 편안을 상징하는 아름다움으로 비춰졌다. 진실하게 살고자 하는 모습들은 이 나라의 미래를 약속하여 주는 듯 하였다. 하지만 한국에 6.25동란 시절 개천가에 줄지어 있던 난민들의 천막집같이 생긴 동네들이 수없이 많았다. 그렇다고 인도사람들이 다 이렇게 가난한 것은 아니다. 인도 사람들 가운데는 세계적인 재벌도 있기 때문이다.

한국말을 잘하는 인도사람 안내자의 말에 의하면 인도에는 지금 힌두교도가 65%로 점차 하향세를 보이고 있고 이슬람교도는 35%로 증가세를 보이고 있으며 불교도는 0.5% 정도라고 했다.


1월15일 토요일 오전6시에 기상하여 아침식사를 먹은 후 뭄바이 역을 출발하는 기차편으로 5시간 걸려 오랑가바드 역에 도착하여 다시 버스로 갈아타고 엘로라 석굴사원로 향하였다.

도중에 잘 꾸며진 큼직한 식당에 들러 밥과 김치, 라면 등으로 점심을 먹기 위해 기다리는 중에 화장실이 어디 있는지 물으니 밖을 가리켰다. 문 밖을 나가 보니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 화장실이 없다고 하니 우리 안내원이 자연화장실을 이용하라고 했다. 우리 일행은 인도에 도착한 후 처음으로 넓고 시원한 자연화장실을 이용하게 되었는데 그 곳은 바로 식당 밖의 넓은 밭이다. 확 트여 누구나 볼 수 있는 공간에서 볼 일을 보지 않을 수 없는 우리들은 제각기 알아서 볼일을 보고 돌아와 의자에 앉아 자연화장실이 얼마나 시원하고 좋았는지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재미있는 광경이 벌어졌다. 유심화보살이 “저기 봐! 청소부가 와서 청소하고 있다”고 했다. 손을 가리키는 쪽으로 밖을 쳐다보니 정말 돼지가 와서 우리들이 볼 일 본 것을 맛있게 먹고 있었다. 이를 본 우리는 모두 폭소를 금할 수 없었다. 이 곳에는 돼지를 놓아기르는데 볼일 본 냄새를 맡고 돼지들이 모여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 큰 식당에 어떻게 화장실이 없나 했더니 자연의 섭리를 이용하는 자연화장실이 여러 가지 시설이 필요한 현대식 화장실보다 환경적인 측면에서는 오히려 깨끗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돼지가 우리들 입맛을 돋우어줘 안내원이 준비한 밥, 김치, 라면, 그리고 시카고에서 준비해 온 밑반찬 등을 너무나 맛있게 먹었다.

점심 공양 후 5시간 걸려 엘로라(Ellora) 석굴사원에 도착하였다.


이 석굴은 거대한 바위산에 인조동굴을 만들어 그 안에 불상을 조각하여 모셨고, 대중 집회를 하는 법당 그리고 스님들이 공부하고 휴식하는 방들이 있었다. 불교 동굴이 1번에서 12번까지 12개 동굴이 있고, 힌두교 동굴이 13번에서 29번까지 17개, 자이나교 동굴이 30번에서 34번까지 5개 동굴로 모두 합쳐 34개의 동굴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동굴들은 서기 4세기경에 불교 석굴사원이 조각되기 시작하였는데 인도 왕조의 바뀜에 따라 불교석굴 사원건축이 12번째에서 중단되고 힌두사원 건축이 시작되어 150년간에 걸쳐 조성된 후 7세기 경에는 자이나교 사원 건축이 조성되기 시작되었다고 한다.

사진을 통하여 약간이나마 볼 수 있지만 우리는 그 규모의 웅장함, 건축술, 조각술 등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인조동굴 하나가 넓이 5천 sq ft, 높이 15 feet 정도는 되어 보였다. 불상을 모신 상단이 있고, 상단을 중심으로 좌우 벽에 스님들이 거처하는 방들이 연이어져 조성되어 있고, 낭간이 있고, 낭간과 법당 사이에 천장을 받치는 돌기둥이 있으며, 좌우 기둥 사이가 법당인데 법당 넓이가 아마도 3천 sq ft는 되어 보였다. 법당은 물론 대중 법회에 사용하는 공간이다. 불상은 결가부좌상이 아니라 의자에 앉아 있는 좌상이었다. 어떤 부처님은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뜻을 상징하는 무외시수인, 삼매수인, 설법수인 등을 하셨다. 천장은 돔 형식으로 된 것도 있고 평평한 것도 있는 데 평평한 것에는 부처님의 생애 혹은 보살상 등이 그려져 있고, 기둥에도 연꽃 보살상 혹은 신장상 등이 조각되어 있었는데 4세기 경에 어떤 공구를 가지고 이렇게 거대한 암석을 뚫고 파내어 동굴을 만들었고 그 안에 이런 위대한 조각 작품을 만들었을까.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신앙의 위대성과 신비성을 체험할 수 있었다. 그기에 비하면 시카고에 반반한 절하나 없는 것이 너무나 부끄럽게 여겨졌다.

이와 같이 위대한 종교의 유산을 두고도 종교 의식을 집행하는 성직자들은 없고 다만 제복을 입은 경비원 2명만이 사원을 지키고 있어 아쉬운 감이 있었다.

  

< 사진은 일반게시의 기본 앨범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