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사랑

2008.10.05 22:09

현성 Views:8388

 모든 동물들은 감정을 공유한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 감정들은 어느 것이나 모양도 없고 냄새도 없어서 그들의 표정과 언행(言行)에만 나타난다. 예를 들면 우리들이 느끼는 슬픔과 괴로움도 그 모양과 냄새가 없다. 그러나 그것들은 우리들의 표정에 그리고 말과 행동을 통해 나타나게 되는데 외로움, 두려움, 열등감, 죽고 싶은 심정 등에 빠진 사람이 표정관리를 하고 있는 한, 바로 옆에 있는 사람도 그의 심정을 짐작하기 어려운 심성(心性)이 있음을 우리는 가끔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반대로 행복하고 기쁜 감정이 일어날 때는 그 감정을 어떠한 방법으로도 표출하고자 하는 심성(心性)도 있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감정의 경험을 사람들이 어떠한 환경에 접할 때 각자가 과거에 지은 업(業)에 의해 현재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으로 나타난다고 본다. 어떠한 환경에 접하였을 때 슬프고 괴로운 감정이 일어나는 것은 내가 과거에 지은 업(業)의 눈으로 보고 느끼는 감정이다. 반면, 나와 다른 업을 가진 사람은 똑같은 환경인데도 불구하고 다른 감정을 느끼게 된다는 말씀이다. 즉 환경에 슬프고 괴로움이 있는 것이 아니라 보는 사람의 업이 슬프면 슬프게 보이는 것이요, 즐거운 업이면 즐겁게 보인다는 말씀이다. 즉, 인간이 느끼는 모든 감정은 그 사람의 업의 소산(所産)이니 기쁜 업을 많이 지으면 일어나는 일마다 기쁘게 보이는 것이고, 열등의식을 가지고 매사를 접하는 사람은 열등의식의 업이 심화(深化)될 수밖에 없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우리들의 복잡다단한 감정 중에서 유독 사랑은 부정과 긍정을 동시에 섭수(攝受)할 수 있는 신비(神秘)한 힘을 가지고 있다. 즉 사랑은 일체 외로움과 슬픔, 두려움과 우울함 등 모든 감정을 완전히 그리고 일시에 해소할 수 있는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민족, 국가, 연령, 종교, 성별(性別), 사상 등까지도 완전히 초월시킬 수 있는 신비한 마력(魔力)을 가지고 있다. 어떠한 이성적(理性的)인 논리로도 설명할 수 없는 미묘(微妙)함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렇게 위대한 힘을 가진 사랑도 과거에 지은 불순(不純)한 사랑이 업이 되어 의심과 불안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는 것이니 불순한 사랑으로 지은 업장소멸을 끊임없이 하도록 노력하지 않을 수 없다. 불순한 사랑의 업장이 완전히 소멸되었을 때 순수한 사랑이 활력(活力)을 받게 되고 그 순수한 사랑은 비로소 위대한 신비력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위대한 신비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인간 본래의 마음바탕이 사랑이기에 그 사랑은 모든 감정의 왕(王) 중 왕이 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 사랑을 항상 여여하게 있는 참된 마음이라 하여 진여(眞如)라고 하고, 우리들의 마음 그 자체라는 의미로 일심(一心)이라 하기도 하며, 참된 마음이라고 하여 진심(眞心)이라고 하기도 한다.
 
진여(眞如), 일심(一心), 진심(眞心) 등으로 표현되는 우리들의 참사랑이 어떻게 해서 과거에 지은 불순한 사랑의 업으로 현세에 의심과 불안을 일으키는 원인이 될까? 전생에 탐욕(貪慾)으로 말미암아 지은 신구의(身口意) 삼업의 결과가 현세에 사랑의 씨앗이 되어서 현세의 사랑이 삿된 업의 사랑으로 변질되어 있기 때문이다. 참사랑이 업의 사랑으로 포장되어 있을 때, 만나는 사람마다 의심하게 되고 불안한 감정이 일어나게 된다. 이러한 의심과 불안이 쌓임에 따라 극심한 부정적인 감정으로 격화되는 과정으로 윤회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남녀간의 사랑에는 순결(純潔)이 필수조건이지만 원래 우리들의 마음은 순결한 사랑을 그 본체로 하고 있기에 부부지간에 서로 배려하는 마음을 항상 유지함으로서 양자가 만족할 수 있는 사랑이 지속될 수 있는 진리가 있는 것이다. 가정은 사랑의 실천장이요 수련장(修鍊場)인 동시에 사랑을 가꾸고 기르며 새로운 업을 짓는 복밭이다.
 
사랑은 모든 생명의 원천이요, 어려움을 극복하는 힘이요, 필요한 것을 창조해내는 지혜의 샘이다. 가정사랑 수련(修鍊)의 극치는 마치 한 그릇을 다 채운 물이 흘러넘치듯이 가정사랑 테두리를 넘쳐흘러 사회의 사랑으로 꽃을 피우게 되는 것이다. 또 사람에 따라서는 가정사랑을 by-pass해서 ‘사회의 사랑’으로 바로 뛰어드는 사람도 있다. 이도 전생(前生)에 닦아놓은 업이 있기에 가능하다. 이 ‘사회 사랑의 꽃’이 불교에서 궁극적으로 희구(希求)하는 사랑인데 이를 자비(慈悲)라고 한다. 자비는 모든 아픔과 갈등을 치유할 수 있는 약 중에 약인데 모든 어려운 사람들에게 베푸는 사랑을 그 근본으로 한다. 그리고 이 근본이 바로 진여(眞如), 일심(一心), 진심(眞心) 등으로 표현되는 부처님의 마음이고 불성(佛性)이다.
 
불성(佛性)은 파사현정(破邪顯正)을 하는 부처님의 성품인데 앞에서 언급한 탐욕에서 일어난 삿(邪)된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을 파(破)하고 참사랑을 바르게 나타내 어려운 사람들에게 사랑의 자비를 베푸는 부처가 되는 성품이다. 그리고 이 성품은 일체중생 누구나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 자연의 이치라고 하셨다.
우리 모두 참사랑으로 가정을 따뜻하게 하고 사회를 훈훈하게 할 수 있도록 사랑 수련(修鍊)을 진심으로 그리고 간단(間斷)없이 열심히 해 나갑시다.
사랑의 자비가 사회에 넘쳐흐를 때 불국정토(佛國淨土)가 이루어지는 법이요, 극락세계인 천상(天上)에 오르게 되는 향(香)이 되는 것이니,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우리들의 참사랑의 향기가 시원한 바람타고 온 누리에 가득하게 하여지이다.

대한불교 조계종 시카고 불타사 주지 현성
2008. 10.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