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무소화분(化無所化分) 第二十五  (교화해도 교화를 받은 자가 없다)

須菩提 於意云何 汝等 勿謂如來作是念 我當度衆生 須菩提 莫作是念 何以故 實無有衆生 如來度者 若有衆生 如來度者 如來 卽有我人衆生壽者 須菩提 如來說 有我者 卽非有我 而凡夫之人 以爲有我 須菩提 凡夫者 如來說卽非凡夫 是名凡夫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하냐. 너희들은 여래가 ‘내가 중생을 제도하겠다’고 생각한다고 말하지 말라. 수보리야, 이런 생각을 하지 말지니라. 왜냐하면 중생 한 사람도 여래가 제도할 자가 실로 없기 때문이다. 만일 중생이 있어서 여래가 제도한다면 여래는 곧 아인중생수자가 있는 것이니라.

수보리야, 여래가 ‘내’가 있다고 설하는 것은 곧 ‘내’가 있음이 아니거늘 범부들이 ‘내’가 있다고 여기니 수보리야, 범부라는 것은 여래가 설한 범부가 아니라 그 이름이 범부니라.”


須菩提 於意云何 汝等 勿謂如來作是念 我當度衆生 須菩提 莫作是念 何以故 實無有衆生 如來度者 若有衆生 如來度者 如來 卽有我人衆生壽者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하냐. 너희들은 여래가 ‘내가 중생을 제도하겠다’고 생각한다고 말하지 말라. 수보리야, 이런 생각을 하지 말지니라. 왜냐하면 중생 한 사람도 여래가 제도할 자가 실로 없기 때문이다. 만일 중생이 있어서 여래가 제도한다면 여래는 곧 아인중생수자가 있는 것이 되느니라.


부처님께서는 자신에게 비유하여 앞 장에서 말씀드린 깨달은 사람에게 경계하는 말씀을 하신다고 생각한다. 깨달았다고 하여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생각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깨달은 사람이 제도할 중생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제도할 중생이 있다면 능소(能所)를 아직 버리지 못하였으니 그 깨달은 사람은 아직도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 장에서는 중생을 제도하는 용(用)의 입장에 있으나 체(體)를 여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중생을 제도하는 자는 화신(化身)이나, 화신이 법신(法身)에서 나왔음을 여읠 수 없다는 것이다. 법신의 입장에서는 일체중생이 평등하여 고하(高下)가 없다고 앞 장에서 말씀하셨으니, 화신이 중생을 제도한다고 하는 생각을 가지면 이치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우리들의 입장으로 낮추어 말하면 자녀들이 다 커서 활동할 나이가 되면 자기들의 근본이 부모에 있었음을 망각하기 쉬우나 그래서는 인간의 도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녀들이 다 커서 부모 말씀을 잘 듣는다고 자기들은 부모 말을 잘 듣는다고 생각하거나, 부모의 어려움을 돌보아 드린다고 자기들이 부모를 돌본다는 상을 내면 근본을 무시하는 도리라고 하는 것이다. 깨달은 사람이 중생을 교화하였다고 상을 내게 되면 곧 깨달은 사람이 되지 못하니 교화하였어도 교화하였다는 상을 내지 않는다는 생각조차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깨달은 사람은 육안(肉眼) 이상의 눈을 가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즉 최소한 천안이 열리기 시작하고 차례로 혜안 법안 불안이 열리게 된다. 천안이 열기기 시작한다는 것은 천안통뿐만이 아니라 천이통, 신족통, 타심통, 숙명통, 누진통 등 육통 삼명이 열린다.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보기 시작하고 귀로 들을 수 없는 것을 들을 수 있는 능력이 생기기 시작할 때 누구를 위해 무엇을 했다는 식으로 은근히 아상이나 인상을 세우고자 하는 생각을 내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체(體)의 입장에서 뿐만이 아니라 용(用)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일체가 연기하여 하나로 작용하고 있으므로 깨달은 사람이라면 이 우주 안에 존재하는 일체가 하나로 성립되어 있는 이치를 직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우주에 존재하는 일체가 하나로 연기하는 이치를 깨달았다면 자기가 하는 일이 특별히 유별할 것이 없는 것이고, 특히 상을 낼 것까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일체가 하나로 성립되어 있는 관계로, 우주는 내 마음 안에 포섭되고 우주 안에 있는 일체 존재도 모두 나의 마음 안에 포섭되는 것이니 내 마음 안에서 일체가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자녀들이 학교에 갔을 때나 남편이 직장에 갔을 때 그들이 엄마 옆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엄마의 마음 안에 있는 것이다. 그들이 그 곳에서 무엇을 하더라도 엄마의 마음 안에서 하고 있는 것이다. 설사 남편이 한국에 갔다고 하더라도 자녀들이 타주로 공부하러 갔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모두 엄마의 마음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직장에 간 남편 역시 부인이나 자녀들이 모두 남편의 마음 안에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시골 면장이 훌륭하신 분이라면 그 면에 살고 있는 사람이 살아가는 모든 사정은 그 면장의 마음 안에 있는 것이고, 군수이고 시장이고 도지사도 마찬가지이다. 한 국가의 대통령이라고 하더라도 모든 국민의 안녕이 대통령의 마음 안에서 작용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깨달은 사람의 마음은 국가의 개념을 초월하여 우주를 상대하는 마음으로 넓고 깊어지는 것이다. 그 범위에 한계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중생이 아프면 내 마음이 아픈 것이요, 중생이 둔하고 어리석어도 내 마음이 둔하고 어리석은 것이다. 반대로 중생이 기뻐하면 내 마음이 기쁜 것이요, 중생이 맑고 총명하면 내 마음도 맑고 총명한 것이다.

이치가 이와 같으니 누구를 기쁘게 하였다고 아상(我相)을 내거나 인상(人相)을 내는 것은 깨달은 사람이 체(體)와 용(用)의 도리와 능소(能所)의 도리에 통달하지 못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須菩提 如來說 有我者 卽非有我 而凡夫之人 以爲有我 須菩提 凡夫者 如來說卽非凡夫 是名凡夫

수보리야, 여래가 ‘내’가 있다고 설하는 것은 곧 ‘내’가 있음이 아니거늘 범부들이 ‘내’가 있다고 여기니 수보리야, 범부라는 것은 여래가 설한 범부가 아니라 그 이름이 범부니라.”


내 마음 안에 포섭되는 우주 안에 있는 모든 중생이 내 마음 안에서 살고 있다고 보는 것이 불교의 우주관이다. 이는 마치 내 몸 안에서 살고 있는 수많은 세포를 우리들의 관념 속에서 ‘나’라고 보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이 깨달은 사람은 내 마음 안에 포섭되는 우주 안에 있는 모든 중생들이 내 마음 안에서 살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 깨달은 사람이 ‘나’라고 하는 존재가 있다고 할 때 중생을 떠나 따로 존재하는 ‘내’가 있다고 설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한 범부들은 범부 각각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내’가 있다고 생각하여 상을 내지만, 깨달은 사람에게는 범부가 곧 성인(聖人)으로 보이는 법이니, 이름하여 범부라고 한다는 것이다. 용(用)에 입장에서는 범부도 있고 성인도 있는 것이지만 체의 입장에서는 모든 범부나 성인이 모두 체에서 나왔으므로 같은 근본을 가지고 있는 것이니 서로 간에 자만하거나 멸시하거나 하는 일 없이 공경하고 사랑하는 자비로서 대하여야 함을 설하고 있다.


달마대사는 위에서 설한 바와 같은 신통력이 있는 스님으로 유명하게 알려지니 수많은 수자들이 그를 찾아 와 법을 청하였다. 그 때마다 달마대사는 면벽하고 답을 하여주지 않으니 모두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가 면벽한지 9년 째 되는 해에 신광(神光)이라는 이름을 가진 젊은이가 찾아왔다. 신광은 달마대사가 조용히 앉아 계시는 모습을 방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자기도 한 자리를 정하고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밤이 되어 눈이 수북이 쌓이는데도 그는 달마대사와 같이 요지부동으로 앉아 있었다.

이윽고 달마대사가 그를 향해 묻는다. “왜 왔느냐?” “도를 얻으러 왔습니다.” “그런 얕은 마음을 가지고 어떻게 도를 구할 수 있느냐?”이에 신광이 품에서 칼을 꺼내어 자기 한 쪽 팔을 서슴없이 탁 잘라 달마대사에게 던지었다. 신광은 대사에게 도를 얻으려는 자신의 진심은 몸 하나 버려도 추호도 아깝지 않다는 결의를 보인 것이다.  


달마대사는 신광에게 질문을 계속하였다.

“그대는 무엇을 얻고자 하느냐?”
“마음이 편안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대의 마음이 어때서 그런가?”
“예, 제 마음이 불안합니다.”
“그래, 그렇다면 그대의 불안한 그 마음을 내 놓아 보라. 내가 편안히 해주겠다.”

이 물음에 신광은 머리를 얻어맞은 듯 했다. 그동안 불안하다고 생각해왔는데 막상 그 불안한 마음을 내 놓으라는 물음 앞에서 “그 불안한 마음”을 찾을 수 없으니 말문이 완전히 막혀버린 것이었다.

“그 불안한 마음을 내 놓아 보라는데 무엇을 하고 있느냐?”
그는 그 불안한 마음을 도저히 찾을 수 없어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대사가 “그렇다면 내 이미 네 마음을 편안하게 했노라”고 말하자 신광은 번개처럼 스쳐가는 깨달음을 얻었다.

이리하여 달마대사는 신광이 깨달음의 길로 들어갈 근기가 있다고 판단하여  자신의 제자로 받아들이고 그의 법명을 혜가라고 명하였다.

내가 불안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불안한 것이고, 내가 슬프다고 생각할 때 슬픈 것이다. 내가 불안하거나 슬플 때 문덕 기뻤던 일이 생각나면 기쁜 마음에 잠긴다. 내가 기뻐하고 있다가도 슬픈 생각이 들면 다시 슬퍼지는 것이다.

신광의 경우 어떠한 이유로 불안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달마대사가 그 불안한 마음을 내 놓으라고 하는 말을 듣고, 그 불안한 마음을 찾을 때는 그 불안한 마음을 찾는 마음이 일어났으므로 불안한 마음이 사라진 것이다. 나에게 다시 불안한  마음이 일어나면 불안한 마음을 찾는 마음은 사라진다. 나에게 불안한 마음을 찾는 마음이 다시 일어나면 불안한 마음은 사라진다.

이와 같은 이유로 기쁘다 슬프다 불안하다 편안하다 좋다 나쁘다고 하는 것 등은 실체(實體)가 없다, 고정된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신광이 깨달았다고 하는 것은 불안한 마음을 찾는 마음이 일어났으므로 불안한 마음이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역으로, 불안한 마음이 일어나면 불안한 마음을 찾는 마음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니 불안하다 불안하지 않다고 하는 것은 실체(實體)가 없다고 한다. 실체가 없다는 말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가변(可變)적이라는 것이다. 즉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변할 수 있는 것이므로 ‘불안한 마음’을  우리가 의지적으로 변화시키면 변화가 가능하다는 이치가 나오는 것이다.

이 이치가 바로 참선 수행법이고 염불 수행법인 것이다. 우리가 화두를 잡고 참선할 때 화두를 잡고 있는 동안에는 잡념이 안 생긴다. 그러나 잡념이 들어오면 화두를 놓지는 것이다. 화두를 다시 불러 오면 잡념이 사라진다. 그리고 화두를 잡고 있는 동안은 편안하다. 그리고 위빠사나 수행에서도 자기가 동작하는 발이나 손이나 호흡을 관하게 한다. 동작이 움직이는 것을 관하고 있는 동안에는 잡념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잡념이 일어나면 동작을 관하는 마음은 사라진다. 동작을 관하는 마음을 다시 불어오면 잡념은 사라진다. 동작을 관하는 동안은 마음이 편안하다.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을 염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관세음보살을 염하는 동안에는 잡념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잡념이 일어나면 관세음보살이 사라진다. 관세음보살을 다시 불러오면 잡념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리고 관세음보살을 염하는 동안에는 잡념이 일어나지 않으므로 편안하다.

모든 수행이 바로 이 이치를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치를 우리들의 생활상에 응용하여보자.

어떤 사람이 하루 일당으로 2백불을 벌었을 때 “야! 오늘은 2백불이나 벌었다”고 생각하면 기쁘고, “야! 오늘은 2백불밖에 못 벌었다”고 생각하면 서운한 것이다. 이와 같이 그 때 그 순간 같은 조건에서 내 마음 가짐 여하에 따라 기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것이다. 기쁜 것을 금방 슬프게도 할 수 있고 슬픈 일을 금방 기쁘게도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이유로 긍정적인 사유를 하라고 권하는 것이다.

남의 잘못을 찾아내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항상 남의 잘못을 찾아냈을 때 기쁘고 시원한 기분을 느낀다. 이런 맛에 남의 잘못을 꼬집어내는 것을 좋아한다. 이와 같은 것을 보고 좋아하는 사람은 기쁜 마음을 가질 수는 있지만 그것이 자기에게 이익이 되기보다 오히려 해가 된다. 왜냐하면 자기 스스로 그러한 잘 못에 점점 빠져 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남이 잘하는 것을 잘한다고 칭찬하여주고 함께 기뻐하면 상대방은 더욱 잘하도록 노력할 것이니 이롭고 자기도 좋은 습을 쌓아가니 이로운 것이다. 이와 같이 기쁨과 이익이 함께하는 긍정적인 사고방식이 우리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사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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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금강경]2.32 응화비진분(應化非眞分) 第三十二 (응화는 참이 아니다) 여해 2007.03.01 15542
34 [금강경]2.31 지견불생분(知見不生分) 第三十一 (자기 소견을 내지 않음) 여해 2007.03.01 12313
33 [금강경]2.30 일합이상분(一合理相分) 第三十 (하나로 합하는 이치의 모양) 여해 2007.03.01 13023
32 [금강경]2.29 위의적정분(威儀寂靜分) 第二十九 (위의가 적정하다) 여해 2007.03.01 12565
31 [금강경]2.28 불수불탐분(不受不貪分) 第二十八 (받지도 않고 탐내지도 않다) 여해 2007.03.01 12334
30 [금강경]2.27 무단무멸분(無斷無滅分) 第二十七 (끊을 것도 없고 멸할 것도 없다) 여해 2007.03.01 13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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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금강경]2.23 정심행선분(淨心行善分) 第二十三 (청정한 마음으로 선(善)을 행하다) 여해 2007.03.01 12070
25 [금강경]2.22 무법가득분(無法可得分) 第二十二 (가이 얻을 법은 없다) 여해 2007.03.01 12152
24 [금강경]2.21 비설소설분(非說所說分) 第二十一 (설함 없이 설한다) 여해 2007.03.01 11353
23 [금강경]2.20 이색이상분(離色離相分) 第二十 (색과 상을 여의다) 여해 2007.03.01 12303
22 [금강경]2.19 법계통화분(法界通化分) 第十九 (법계를 다 교화하다) 여해 2007.03.01 11974
21 [금강경]2.18 일체통관분(一體同觀分) 第十八 (일체를 동일하게 보다) 여해 2007.03.01 12754
20 [금강경]2.17 구경무아분(究竟無我分) 第十七 (구경에는 내가 없다) 여해 2007.03.01 12493
19 [금강경]2.16 능정업장분(能淨業障分) 第十六 (능히 업장을 깨끗이 하다) 여해 2007.03.01 12654
18 [금강경]2.15 지경공덕분(持經功德分) 第十五 (경을 수지한 공덕) 여해 2007.03.01 12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