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의적정분(威儀寂靜分) 第二十九  (위의가 적정하다)

須菩提 若有人 言 如來 若來若去若坐若臥 是人 不解我所說義 何以故 如來者 無所從來 亦無所去 故名如來

“수보리야, 만일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여래가 만약 오고, 가고, 앉고, 눕는다’고 한다면 이 사람은 나의 설한 바 뜻을 알지 못함이니라, 왜냐하면 여래라는 것은 어디로부터 온 바도 없으며 또한 가는 바도 없으므로 여래라 이름 하느니라.”


설하신 맥을 이어 해석하기 위하여 앞 장의 설명을 다시 살펴보겠다.

제 26장 법신비상분(法身非相分)에서 약이색견아(若以色見我) 이음성구아(以音聲求我) 시인행사도(是人行邪道) 불능견여래(不能見如來)라고 하여 부처님을 부처님의 형상이나 음성에서 보려고 하는 사람은 삿된 짓을 행하는 사람이니 도저히 여래를 볼 수 없을 것이라고 하여 형상이나 음성에서 여래를 찾지 않을 것을 당부하셨다. 이것은 마치 공부를 지나치게 열심히 하느라 자기 건강도 돌보지 않는 학생에게 공부는 그렇게 하는 법이 아니라고 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제 27장 무단무멸분(無斷無滅分)에서 형상(形相)이나 음성에 집착하던 수자들이 형상이나 음성에서 여래를 볼 수 없다면 수행하는 것도 하나의 형상에 불과한 것이니 수행할 것도 없지 않느냐고 생각하여 단멸상(斷滅相)을 일으킴으로 깨달은 사람은 단멸상을 설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여 형상 속에 여래가 있음을 설하였다. 이것은 건강을 해치며 공부하는 법이 아니라고 하니 아애 놀기 만하고 공부하지 않는 학생에게 공부는 해야 한다고 하는 것과 같다. 제 26장에서 형상 속에서 여래를 볼 수 없다고 부정하시고 제 27장에서 그 부정한 형상 속에 여래가 있음을 설하셨다. 공부를 너무 지나치게 하는 것도 병이요 공부를 하지 않는 것도 병이라는 뜻이다. 너무 부지런한 것도 병 너무 게으른 것도 병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제 28장 불수불탐분(不受不貪分)에서 깨달은 사람의 행이 복덕을 받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구하고자 하는 마음에서나 탐착하는 마음에서 보살행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나 구하고자 하지 않는 마음이나 탐착하는 마음 없이 하는 보살행은 무아(無我)와 인욕바라밀을 증득한 지혜로운 행이기 때문에 무한한 복덕을 짓는다고 하는 의미이다. 제 26장에서 설하는 형상에 집착하는 마음도 없고, 제 27장에서 설하는 형상에 집착하지 않는 마음도 없이 보살이 중생을 위하여 오직 자기 할 일을 행할 뿐임을 설하신다.  

그리고 이 제 29장 위의적정분(威儀寂靜分)에서 여래는 어디에서부터 오는 것도 아니요 어디로 가는 것도 아니라고 하여 그 행이 고요하다고 하였다. 그 행이 고요하다고 하는 것은 오는 것도 아니요 가는 것도 아니요 앉는 것도 아니요 눕는 것도 아니라고 하여 여래의 행에서 여래를 볼 수 없음을 다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여래자(如來者) 무소종래(無所從來) 역무소거(亦無所去) 여래라는 것은 어디에서부터 오는 것도 아니요 또한 어디로 가는 것도 아니라고 하여 그 행이 항상 고요하다고 하는 것은 만약 어디에서부터 온 곳이 있으면 반드시 가는 곳이 있기 마련이다. 오는 곳이 있고 가는 곳이 있는 것이 약래약거약좌약와(若來若去若坐若臥)이다. 만약 왔으면 가야하는 것이고, 만약 갔으면 와야 하는 것이고, 만약 앉았으면 눕든지 서야하는 것이고, 만약 누었으면 앉든지 일어서야한다는 것이 약래약거약좌약와(若來若去若坐若臥)이다. 약래(若來)다음에 거(去)가 생략되고 약거(若去) 다음에 래(來)가 생략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래서 오고 감이 있다는 것은 생과 멸이 있다는 의미다. 따라서 약래약거약좌약와(若來若去若坐若臥)는 생멸법을 말하는 것이다. 생멸법을 행하는 것이 여래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여래의 뜻을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고 하는 것이다. 여래는 어디에서부터 오는 것도 아니요 가는 것도 아니라고 하는 것은 온 곳이 없으니 가는 곳도 없다는 이치이다. 온 곳도 없고 가는 곳도 없다고 하는 것은 생하는 것도 없고 멸하는 것도 없다는 불생불멸을 말하는 것이다. 불생불멸이니 여여부동(如如不動)하여 위의적멸(威儀寂滅)이라고 제명이 붙여지는 것이다. 즉 행(行)이나 상(相)이 적멸(寂滅)하다는 것이다.

행(行)이나 상(相)은 번뇌라고 할 수 있고 적멸은 고요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번뇌가 오고 감이 없으니 고요하다는 것이다. 번뇌가 오고 감이 없어 고요하다는 뜻은 선정(禪定)의 정(定)을 의미하고 정은 곧 삼매이다. 삼매는 지혜 광명의 모체가 되는 것이다.

약래약거약좌약와(若來若去若坐若臥)라고 하는 것은 혹 오는 것은 가는 것이요, 가는 것은 오는 것이며, 앉은 것은 눕거나 서는 것이요, 누운 것은 앉거나 서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곧 생한 것은 반드시 죽는 것이라는 의미와 같다. 이를 생멸법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이는 곧 슬픔이 오면 슬픔이 가는 것이요, 기쁨이 오면 기쁨이 가는 것이라는 의미가 되는 동시에 슬픔이 가면 기쁨이 오는 법이요, 기쁨이 가면 슬픔이 오는 법이라는 의미도 된다. 기쁨과 슬픔이 오고 가는 것은 반드시 번뇌의 자취를 남기고 윤회의 쇠사설이 된다.

이러한 기쁨과 슬픔의 윤회의 사설을 끊기 위하여 우리는 절에 보시도 하고 일요일에 절에 나와 기도도 하고 법문도 듣고, 수요일 저녁에 있는 강의도 듣고, 토요일 저녁에 절에 나와 참선도 하고 집에서 기도도 하고 염불도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내 몸이 오고 가고 앉고 눕는다고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지만 내 몸보다 내 마음이 이랬다가 저랬다하고, 이렇게 할까 저렀게 할까 망설이고, 자신이 없고 확신이 없고, 잘못 판단하여 이래야 할 것을 저렇게 하거나 이렇게 해야 할 것을 저렇게 하여 잘 되 가는 일을 망쳐놓는 경우 등 우리들의 생활상이 모두 약래약거약좌약와이다. 이러한 것을 모두 고쳐 무소종래역무소거(無所從來亦無所去)로 바꾸고자 하는 것이다. 오는 곳 없이 오고 가는 곳 없이 가는 것이니 오는 것도 오는 것이 아니요 가는 것도 가는 것이 아닌 것이다. 왜냐 하면 와도 가도 항상 그 곳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보통이다. 오는 곳이 없는 곳으로부터 오고 가는 곳이 없는 곳으로 간다고 하는 뜻은 우리들의 마음속에 항상 있다는 뜻이다. 우리들의 마음속에 항상 있으니 오는 곳이 없는 곳으로부터 오고 가는 곳이 없는 곳으로 간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즉 오고감이 없다는 뜻이다.

우리들의 마음 중에서도 오고감이 있는 마음과 오고감이 없는 마음이 있다. 오고감이 있는 마음을 우리는 번뇌라고 한다고 앞에서 이미 말하였다. 우리들의 마음 중에 오고감이 없는 마음을 찾아보자. 우리는 이 오고감이 없는 마음을 앞에서 설한 선정에서 체험할 수 있으나 선정을 경험하기 어려운 것이 우리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매일 잠을 잔다. 잠에서 꿈도 없이 깊이 숙면(熟眠)하는 경험을 한다. 이 깊은 숙면에 잠겨 있을 때 우리들의 마음은 무엇으로부터 온 바도 없고 어느 곳으로 가는 바도 없는 것이다. 모든 오고 가는 망상이 모두 사라졌을 때 그 마음속에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숙면은 내 몸과 마음이 가지고 있는 모든 병을 치유하는 대의왕(大醫王)이다. 누구도 치료할 수 없는 병을 치료할 수 있는 대의왕(大醫王)인 것이다.

이 자리가 바로 법신불(法身佛)의 자리요, 우리 각자의 주인공(主人公)이 머무는 곳이다. 이 주인공 법신은 오고 감이 없는 것을 본질로 하기 때문에 아무리 미세한 번뇌나 생각이 일어나도 숨어버리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수행에서 화두를 잡는다는 생각조차도 허용하지 않으며, 관세음보살을 염불한다, 아미타불을 염불한다는 생각조차도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화두를 안 놓친다는 생각 염불을 한다는 생각마저 비워야 참다운 선정에 들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앞 장에서 형상에 집착하는 것도 버리고 집착하지 않는 마음도 버리고 오직 보살행을 할 뿐이라고 한 것이다.

이러한 수행을 위해 노력하면 수행 시에 선정에 들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잠에서 숙면을 이루게 하는데 크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잠에서 숙면을 이룰 수 있으면 수행에서 선정에 드는 것보다 훨씬 유익한 경험을 할 수 있다. 피로가 회복되고 정신이 맑아지고 하루 일이 순조롭게 풀리고 하는 것 등을 우리는 경험한다.

어떤 사람들은 숙면 중에 있었던 꿈이 용하게 맞는 사람도 있고 어지러운 사람도 있다.  

숙면과 참선에서 말하는 선정과의 차이는 숙면에서 일어나는 일에 의식이 전혀 관여하지 못하고 또 숙면에서 일어난 일을 의식에서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선정에서 일어나는 일은 의식이 어느 정도 지배할 수 있고 선정에서 일어난 일은 선정에서 나와도 우리들 의식이 기억할 수 있는 것이 다르다고 보겠다. 몸을 치유하거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능력은 숙면 쪽이 훨씬 더 깊다고 본다.  

이러한 숙면이나 선정을 잘 이루지 못하는 원인 중 가장 심한 것은 부부나 애인 사이에 애정에 대한 믿음이 깨어지고 의심이 생기기 시작할 때, 돈 거래가 있는 상대로부터 믿음에 금이 가고 돈을 받지 못할까 의심이 생기기 시작하고, 저 돈을 받지 못하면 내가 갚아야 할 돈을 어떻게 갚을까 하는 경우이다. 믿음이 깨어지고 의심이 생기기 시작하면 우리들의 머리 속에 오고가는 번뇌가 심하게 일어나게 된다. 생과 멸의 윤회가 심하게 일어나 고요함을 밤이고 낮이고 얻지 못하고 방해 받게 되는 것이다.              

신도님들 중에 이렇게 번뇌스러운 일이 생길 때 절에 찾아오는 경우가 많지만 절에서는 이러한 일이 처음부터 일어나지 않도록 막아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절에서 하는 일이고 부처님의 법이다. 어떻게 하면 믿음을 증가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여래(如來) 약래약거약좌약와(若來若去若坐若臥)를 화신불과 보신불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화신불과 보신불은 상대에 따라 왔다 갔다 하기 때문이다.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행하고자 기도를 열심히 하는 분에게는 화신불이나 보신불이 나타나 그를 수호하여주고 가피를 내린다. 그러나 그가 바르게 생각하지도 않고 바르게 행하지도 않고 바르게 기도하지도 않으면 화신불과 보신불은 나타나지 않거나 나타났다가도 가버린다. 예를 들면 스님이 바르게 살고 기도를 열심히 하면 보신불과 화신불이 그 절을 수호하여 주시지만 그렇지 않고 기도도 잘하지 않고 술이나 마시러다니고 하면 보신불과 화신불이 절을 떠나고 절에는 불화가 생기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화신불고 보신불의 차이는 같은 성질을 가지고 있으나 화신불은 일반적인 소리에 응하는 부처님이고 보신불은 한 가지 일을 성취하게 하는 부처님이다. 예를 들면 학업 성취, 사업 성취, 불사 성취, 성불 등 꾸준한 노력 흔들리지 않는 노력이 필요한 일을 성취하게 하는 부처님이시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관세음보살님께서 화신불과 보신불의 역할을 하시는 것으로 믿고 기도한다. 우리가 관세음보살님 기도를 하면 오시지만 기도하는 마음이 사라지면 관세음보살님도 가 버린다는 뜻이다. 즉 생멸이 있는 부처님이고 생멸이 있는 관세음보살님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의 마음에 생멸이 없는 부처님이 계시니 그 부처님이 법신불이고 이 장에서 무소종래(無所從來) 역무소거(亦無所去)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 법신불은 항상 우리들의 마음에 있으나 번뇌가 일어나면 그 번뇌에 가려지는 성품을 가지고 있다. 번뇌가 일어나면 가려졌다가 번뇌가 사라지고 고요하여지면 우리가 그 법신불의 활동을 인식할 수 있는 경우들이 많다. 고요할 때 잊어버린 물건이 어디 있다고 가르쳐주시는 것이라든가, 학교에 갈수 있었는데 왜 안 갔느냐든가, 절에 가야하지 않느냐든가, 누구를 만나보라든가 하는 등 우리는 내 마음이 고요할 때 긴요한 가르침을 받을 때가 많다. 특히 무엇 무엇을 하는 것이 위험하다든가, 무엇 무엇을 안 하는 것이 바르지 않다든가 하는 등 가르침을 받게 된다. 이 가르침을 잘 받아 행하게 되면 화신불과 보신불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법신불은 내 마음의 상태와 관계없이 우리들의 마음속에 항상 존재하는 부처님이므로 여래자(如來者) 무소종래(無所從來) 역무소거(亦無所去), 여래라는 것은 오는 곳도 없고 가는 곳도 없다고 하고, 불생불멸이라고도 하고, 참된 부처님 진불(眞佛)이라고 부르고, 화신불과 보신불은 우리들의 마음의 상태에 따라 오셨다가 가시기도 하고 가셨다가 오시기도 함으로 우리들의 마음이 생멸(生滅)함과 같이 생멸함으로 여래 약래약거약좌약와(若來若去若坐若臥)라고 하고, 생멸하는 부처님임으로 참된 부처님이 아니라고 하여 비진(非眞)이라고 한다.

밖으로 뛰어나게 활동하시는 부처님은 내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응하여주시는 관세음보살님, 보신불 화신불이니, 내가 딴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관세음보살님, 보신불, 화신불은 가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법신불이 내재하여 있다가 고요한 기회를 타서 내가 그렇게 딴 생각을 하면 되느냐하고 일깨워주시는 역할을 하시는 것이다. 그러면 내가 엉뚱한 생각을 했구나 하고 기도를 열심히 하면 또 관세음보살님, 보신불 화신불이 그 소리를 듣고 응하여 주시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어려울 때 부처님을 찾지 않고 오히려 부처님을 원망하며, 절에 가서 빌어라고 하는 마음이 솟아오를 때마다 이를 억압하고 자기 식대로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 있다. 이러한 사람은 자기 마음 속 깊이 있는 여래의 소리를 무시하는 아집이 있기 때문에 점점 더 깊은 고통의 늪에 빠져들어 가는 것이다. 이 법신불의 소리를 들을 줄 아는 사람을 견성(見性), 자기의 성품을 볼 수 있다고 하는 말로 통한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이유로 부처님의 제자들은 염불을 하던 참선을 하던 자기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자하는 것이다.          

제 26, 27, 28장에서 이어지는 맥으로 보아 제 29장의 여래(如來) 약래약거약좌약와(若來若去若坐若臥)는 보신불과 화신불로 보고, 여래자(如來者) 무소종래역무소거(無所從來亦無所去)는 법신불로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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