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물건(一物)

2009.01.18 02:29

현성 Views:11773

여기에 한 물건이 있으니 본래부터 밝고 신령스러워

일찍이 생긴 것도 아니요 일찍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라

이름 지을 수도 없고 모양 그릴 수도 없네.


有一物於此  從來以來  昭昭靈靈

유일물어차  종래이래  소소영령


不曾生不曾滅  名不得狀不得

부증생부증멸  명부득장부득


- 선가귀감, 청허 휴정 대사


청허 휴정 대사는 조선 중기에 불교 중흥을 위해 일생을 바치신 서산대사이다.


“여기에 한 물건이 있으니 본래부터 밝고 신령스러워

일찍이 생긴 것도 아니요 일찍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라

이름 지을 수도 없고 모양 그릴 수도 없네.”


여기에서 한 물건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진여(眞如), 우리의 본성(本性)을 의미한다. 우리의 본성은 본래 어두움을 모르는 밝고 그 작용함이 너무나 신령스럽다.

우리들이 밥 먹으면 몸이 소화해서 우리들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게 해 주는 것도 얼마나 신령스러운 일인가. 저녁이 되면 자고 아침이 되면 일어날 수 있는 것도 생각해 보면 신령스러운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애인을 만나고 사랑하는 것도 신령스러운 일이고, 자녀를 얻고 키우는 것도 신령스러운 일이다.


이 모든 일을 주관하는 한 물건이 있는데 그 물건이 바로 일체 중생의 본성이고 참되게 여여하게 존재하는 것이라 하여 진여(眞如)라고 부른다.

참되게 여여하게 존재하는 것을 “일찍이 생긴 것도 아니요 일찍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라.”고 한 것이다. 새로 생기는 것이 아니므로 없어지는 것도 아니요, 없어지는 법이 없으므로 생기는 법도 없다. 이러한 것을 참되게 여여하다고 하여 진여(眞如)라고 한다. 불교에서 이를 진여라고 부르지만 다른 종교에서 다르게 불을 수도 있고 또 어떠한 이름을 붙여도 그 한 물건을 바르게 상징하는 의미가 될 수 없을 수도 있다.


이러하기에 “이름 지을 수도 없고 모양 그릴 수도 없네.” 라고 했다. 이 한 물건은 필요와 상황에 따라 자유자재로 변신(變身)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장군을 제도할 필요가 있을 때는 장군으로, 상인이 되고자 하면 상인으로, 정치가가 되고 싶으면 정치가로 변신할 수 있는 전능(全能)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한 물건이다. 미녀로 태어나고 싶으면 미녀로 건강하게 태어나고 싶으면 건강하게 태어날 수 있는 한 물건이다. 그리고 쓰고 또 쓰도 다 쓸 수 없고, 쓰지 않는다고 없어지거나 약해지는 법도 없다. 언제나 어디서나 소소영영(昭昭靈靈)하게 그 자리에 있다.

수많은 생애를 지나오면서 있었던 일들을 어디에 저장하는지 고스란히 기억하기도 하고,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측해 주기도 하며, 글을 읽고 쓰기도 하고, 이렇게 글을 짓는 것도 할 줄 알고, 배고프면 밥 먹어라 하고, 피곤하면 쉬라고 알려주는 것을 소소영영(昭昭靈靈)하다고 했다.


이 게송 역시 서산대사께서 아주 높은 경지에서 느낄 수 있는 말씀을 하셨다. 우리는 이 높은 경지까지는 아니더라도 일상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소소영영하게 알아차리는 공부를 부단히 해가야 한다. 이렇게 하다보면 어느덧 서산대사의 경지의 문턱에 가 있음을 느낄 수 있는 때가 올 것이다.

모름지기 우리는 우리들의 생활 속에서 생활 그 자체를 수행 처로 삼아 마음 다스리는 법을 익혀가야 한다. 하면서도 하는 줄 모르고 하는 단계가 되면 일체 수행이 쉬운 줄 모르게 쉬워진다. 

다시 한 번 대사의 게송을 읽어본다.


여기에 한 물건이 있으니 본래부터 밝고 신령스러워

일찍이 생긴 것도 아니요 일찍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라

이름 지을 수도 없고 모양 그릴 수도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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