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인가 둘인가

2010.03.08 11:35

현성 Views:7003

우리는 살기 위해 많은 공부를 한다. 유치원에서 시작해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박사학위를 받을 때까지 공부를 계속한다. 따지고 보면 모두가 살기 위해 직업을 위한 공부이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히 옳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자기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참기 어려운 압박감을 받게 된다. 이 압박감의 주된 원인은 자기가 공부한 것 밖에 모르기 때문이다. 자기가 공부한 것밖에 모르니 생각하는 테두리가 좁고, 더욱 심한 것은 멀리 있는 것은 잘 보이고 좋아 보이지만, 가까이 있는 것은 잘 보이지 않아 좋은 것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예를 들면, 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대학에 가면 꿈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대학을 졸업하고 보면 막연하다. 그래서 대학원으로 진학해서 박사학위 공부를 한다. 박사학위를 받고 보면 역시 마찬가지이다.

남녀 간에 결혼 대상을 택함에서도 가까이 있는 사람보다 멀리 있는 사람을 택하는 경우가 더 흔하다. 가까이 있는 사람들 가운데는 볼만한 사람이 없기 때문에 멀리 있는 사람을 찾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결혼을 하고 보면 이제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은 아주 아주 가까이 있는데, 가까이에서는 아무런 아름다움을 서로 느낄 수 없는 것이 문제이다.

이렇게 가까이 있는 남편이나 부인이 좋아 보이지 않으니 가정불화(不和)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 멀리 두고 볼 때는 좋은 사람, 사랑스런 사람, 편안한 사람이었는데 가까이 두고 보니 좋은 사람도 아니고, 사랑스럽지도 않고, 편안하기보다 오히려 속만 뒤집히게 하고, 끓게 하니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으니 헤어지자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혼율을 높이는 주된 원인이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해서 좋은 직장에서 일한다고 해도 부부지간에 화목과 행복이 없으면 모든 것이 다 의미 없는 일이 되고 만다.

 

이러한 추세는 과학이 발달하면서 더욱 더 깊어져 간다. 과학을 전공하는 두 사람사이에서는 화목을 얻기 더 어렵다. 일어나는 일들이 모두 과학적인 논리와 결론으로 증명되기를 서로 기대하고 말하기 때문이다. 현대교육을 받은 모든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지만 불자(佛子)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지 않다. 특히 부부사이에서는 더욱더 그러하다.

과학적인 사고에서는 생각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불교에서는 생각을 놓으라고 가르친다. 왜냐하면 생각은 생각일 뿐이지 실제와는 정반대일 수 있기 때문이다. 과학적인 사고에서는 현재의 생각에 이르게 된 말다툼의 경과를 반드시 밝혀서 서로간의 잘 잘못을 따지고 결론을 내야 하지만 불교에서는 과거는 이미 지나간 것이니 다시 되돌릴 수 없는 것, 놓아 ‘버려라’ 고 한다.

그러고 과학적인 사고에서는 시(是)와 비(非)를 가려 시는 시로 비는 비로 결론이 나야 다음 단계로 갈수 있다고 생각해 시비(是非)를 반드시 가리려 하지만, 그러다보면 두 사람 사이가 오히려 더 악해지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시비(是非)를 가리는 것은 무의미(無意味)하다고 본다.

과학적인 사고에서는 보고 들은 것, 문헌으로 증명될 수 있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불교에서는 그렇지 않다. 이와 같이 불교는 현대인들의 과학적인 사유와 정반대이다. 그러나 올바른 과학적인 사유자(思惟者)와 불교적인 사유자는 서로 상통하고 보완성이 있다.

 

불교에서는 어떠한 생각을 어떤 사람이 할 때, 그 생각이 비록 크고 작은 것이라 하더라도 그 생각은 그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고, 그 마음은 그 사람이 그 동안에 쌓아 온 습(習)에 의한 것이다. 무엇을 들었다, 봤다, 옳다 그렇다는 것도 모두 그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고, 그 마음은 그 사람의 습성(習性)에서 비롯되는 것이니, 그 사람이 어떠한 논리를 세우고 결론을 내린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 사람의 습성(習性)일 뿐, 문제가 된 일의 본질은 아니다.

예를 들면, 남편이나 부인의 잘못이 보일 때, 그것이 사실 일 수도 있지만 먼저 남편의 잘못이 부인인 나의 마음의 거울에 비쳐진 나의 습(習)의 모습이라고 볼 줄 아는 것이다. 남편도 역시 부인의 잘못이 자기 마음의 거울에 비쳐진 자기 습의 모습이라고 볼 줄 아는 것이다.

한 사고 현장을 보는 사람들은 그들 각자의 업(業)에 따라 그 현장의 모습을 봄으로 느끼는 감정이 다 다른 것이다. 이들의 느낌은 그들 각자의 느낌일 뿐이지 사고의 본질은 아닌 것이다.

남편의 잘못을 따져서 남편이 그 잘못을 인정하고, 참회하고 고쳐야 한다고 보는 것이 과학적이라면, 바로 남편의 잘못이라고 보이는 것은 내 마음의 거울에 비쳐진 모습이고, 그 모습을 하게 된 원인 제공은 내가 한 것이니, 내 잘못을 인정하고, 참회하고, 그 업을 고치기 위해 수행하는 것이 불교적이다.

이것이 바로 모든 것을 밖에서 구하지 말고 안에서 구하라고 하신 불법(佛法)이고, 그 마음의 거울에 비쳐진 자기 습의 모습을 참회하고 지워버리기 위해 불도(佛道)를 닦아 나가는 것이 수행이다.

 

이와 같은 불교 수행론에 의하면 문제를 접근하는 방법이 자기에서 시작해서 자기에서 끝나게 되므로 상대방과 논리를 전개하기 위한 생각이 필요 없고, 상대와 다투어야 할 이유도 없으며, 불화(不和)의 요인도 없다.

과학적인 문제 접근은 시발부터 사실과 다른 근거에서 비롯해 일어나므로 대화가 되지 않고, 시비를 가리다보면 서로 옳다고만 주장하게 되어 온 가족이 공포에 쌓이게 되는 경향이 있다.

현재 학교에서 배우는 과학적인 공부는 이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학문이지만 궁극적으로 행복(幸福)해 질 수 있는 방법은 아니다.

그러나 자기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나 이룰 수 있는 무한한 능력이 자기에게 이미 있음과 그에 접근하는 방법을 가르치며, 가까운 것을 바로 보게 하는 불교에서 인생(人生)을 먼저 배우고 익히면 과학적인 공부도 더 잘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보람 있고 희망찬 현재를 남편이나 부인의 사랑을 받으며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

이와 같이 수행 하고 난 후의 ‘나’와 그 전의 ‘나’는 같을까 다를까? 다르면 얼마나 다를까?

 

대한불교조계종 시카고 불타사 주지 현성 합장

2010. 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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