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스님과 무소유

2010.03.14 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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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法頂)스님께서는 일찍이 무소유(無所有)를 깨달으시고 보통사람들이 느끼지 못하는 즐거운 수도(修道)의 길을 걸어가셨다.

일반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 욕심내지 않을 수 없는 사회에서 살고 있지만, 출가 승려공동체에서 살아가는 스님들은 돈을 벌려고 하는 욕심을 내지 않고 살아가니 무소유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 승려들은 승려공동체서 무소유의 삶을 살아가는 관행(慣行)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고, 법정스님께서는 “나는 없다.”는 무아(無我)의 도리를 깨달으시고, 내가 없으니 나에게 속할 수 있는 소유물이 있을 수 없음을 알게 되셨다. 이것이 바로 큰스님의 무소유의 깨달음이시고 그 ‘무소유’에서 자신의 자유와 평화를 얻으신 것이다. 자신이 체험한 자유와 평화를 사회에 보급하기 위해 무소유 사상을 사회에 널리 보급하는 글을 쓰신 것이다.

그 무소유의 내면에는 재물(財物)의 사유(私有)를 부정하고 공유(公有)를 주장하는 뜻이 있고, 재물의 공유(公有)사상은 바로 불교의 자비(慈悲)정신이고, 큰스님께서 남기신 수많은 글은 모두 이 깨달음에서 얻어진 지혜(智慧)와 자비(慈悲)정신의 현현(顯現)이다.

우리 승려들도 같은 무소유의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는 아직 깨닫지 못한 승려이고, 법정스님은 ‘나는 없다는 무아(無我)’를 깨달으시고 깨달으신 데로 살아오신 분이다.

 

소유(所有)를 중요시하는 현대사회 사람들의 생각과는 정반대의 삶이지만 알고 보면 소유와 무소유는 정반대가 아니라 같을 수도 있고 무소유가 오히려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대단한 소유일 수도 있다. 소유라는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라는 뜻이고, 무소유는 내가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불교에서 보는 소유는 욕심을 내서 갖는 것을 의미하고 무소유는 욕심을 내서 가지려고 하지 않고, 가진 것이 있으면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무소유 보살행의 공덕은 하늘 끝이 보이지 않듯이 무한한 과보를 받게 되는 것이니 아무리 많은 재물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이 무소유 공덕에는 비교될 수 없다.

이러한 불교 교설에 의하면 무소유를 깨달으시고 중생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무소유사상을 널리 펴 오신 법정스님께서는 이생에서 무량(無量) 무변(無邊)한 복을 지으시고 오신 곳으로 다시 돌아가신 것이다.

무소유를 깨닫고 수도(修道)하는 과정에서 법정스님께서는 더 큰 도(道)를 이미 깨달으셨다고 본다. 수행상에 무아(無我)의 지위 위에 있는 불고불낙(不苦不樂)의 지위에 들어가면 삶과 죽음이 고통이 아니라 항상 평온한 열반인 것을 깨닫게 된다. 마치 몸은 늙었어도 마음은 항상 젊은 것과 같이 차츰 차츰 죽음의 단계가 오더라도 마음은 평온한 것이다. 즉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것이다.

 

사실 우리 몸은 하루가 무섭게 윤회를 하고 있지만 마음은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 그리고 육체의 죽음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죽음이 아니지만 마음은 그것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깨달으신 분은 육체는 마치 소나무가 항상 푸르지만 실은 낡은 잎은 떨어지고 매일 같이 새 잎이 솟아나는 윤회를 하고 있지만 우리들의 마음은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소나무가 항상 푸르듯이 자기만은 항상 젊은 것처럼 느낀다. 죽음과 삶도 깨달으신 분의 눈에는 다시 오고가는 윤회의 과정이지만 우리들의 마음에는 죽음과 삶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느끼는 것이다.

법정스님께서는 이와 같이 순간순간에 일어나는 윤회와 죽음과 삶이라고 하는 큰 폭의 윤회의 진리를 깨달으셨으니 삶에 대한 미련도 없고 죽음에 대한 고통이나 두려움도 없게 된다. 이렇게 되었을 때 일체 고통(苦痛)에서 해방되었다고 하여 해탈(解脫)했다고 하고 열반에 드셨다고 한다.

열반은 살아생전에도 얻을 수 있는 세계인데 병(病)이나 어려운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바로 봐 괴로워야 할 일로 느끼지 아니하고, 즐거운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고(苦)의 상대적인 의미에서의 낙(樂)으로 느껴지지 아니하고 역시 바로 봐 즐거워야할 일로 편안을 얻는다. 열반의 경지에 있는 분에게는 어떠한 일이라도 즐거운 일로 바꾸어 놓을 수 있음으로 항상 즐거운 일로 충만하다.

 

도(道)를 닦는 수행자는 먼저 무아의 이치를 깨닫고 다음으로 불고불낙(不苦不樂)의 열반을 깨닫게 된다. 이 열반의 세계에서는 나고 죽음이 있되, 나고 죽음이 없고, 나고 죽음이 없으면서도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있다고 할 수도 없고, 없다고 할 수도 없는 그러한 경지인데 깨달으신 분이 아니면 이해하기 어려운 단계이다.

법정스님께서는 이 세상에 살아 계실 때 불고불낙(不苦不樂)의 열반의 세계에 이미 와 계신 것이었다. 이 세계를 법정스님께서 ‘맑고 향기로운 세계’라고 표현한 것이다. 맑다는 것은 이미 씻어야할 업장이 다 씻어진 맑음이고, 향기는 그 맑은 곳에서만 일어나는 기쁨이다. 이는 “반야심경”에서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고 표현한 대목과 같은 뜻이다.

법정스님께서는 이와 같이 이 세상에 살아계시는 동안 불고불낙의 열반에서 수많은 어려운 사람들에게 불고불낙(不苦不樂)의 열반의 세계에 가는 길을 가르쳐주시고 인도하여 주셨다. 다음 세상에서는 더 많은 어려운 사람들을 구원하는 길로 가시리라 믿는다.

 

대한불교조계종 시카고 불타사 주지 현성합장

201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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