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량심 결사 운동

2007.02.25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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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량심 결사 운동


지금 우리나라의 실업자(失業者) 수는 이미 200만이 넘는다고 한다. 실직이나 기업의 도산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은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국가 정책상 언제 해고당할  몰라 불안과 초조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을까?


이러한 상황에 직면한 종교계는 주로 해고당한 실직자룰 위한 대책에 집중하고 있는 느낌을 준다. 물론 반드시 해야 할 종교계의 사업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부처님은 현실적인 생고(生苦)의 원인을 찾아서 그 원인을 멸(滅)함으로서 구경에 열반(涅槃)을 얻는 법을 궁구(窮究)하시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200만이 넘는 대량 실업(失業)의 원인은 해고(解雇)에 있고, 해고(解雇)는 기업의 적자(赤字) 지출의 방지를 위하여 노임(勞賃) 지출의 유연성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이다. 임금(賃金)은 수입금(收入金)에서 배당되는 지출금액이고 총임금은 총 노동자 개개의 노임의 합이다. 총수입금에 비교하여 총 노동비의 지출이 과다(過多)하므로 감봉(減俸)을 하거나 감원(減員)을 하는 정책이 나온 것이다. 이것이 200만이 넘는 실업자가 생긴 고통의 원인이다.’ 과다(過多)한 봉급을 지급하거나 과다한 수의 노동자를 고용한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정치적 이유도 있을 것이고, 고용주로 인한 이유도 있을 것이고, 혹은 고용인으로 인한 이유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세 가지 원인 제공자들 중 고용인에서부터 문제를 풀어 가야 한다고 본다. 먼저 200만이 넘는 높은 실업자를 내게 한 고용인의 동기는 고용주에게 ‘봉급 인상을 얼마 하여 달라, 노동 조건을 어떻게 개선하여 달라, 아니면 총파업을 불사(不死)한다’는 슬로건을 내 걸고 노동조합이 고용주와 대립하여 극한투쟁 방법으로 지금까지 쟁취한 무리한 봉급인상이 오늘의 대량 실업의 큰 원인 중에 하나가 아닐까? 외국 투자자(投資者)들이나 외국 기업주들이 오늘 우리가 직면한 경제 위기를 초래한 원인이 ‘경직된 노동운동’이 그 중요한 원인이라고 보기 때문에 ‘노동의 유연성’ 즉 노동자의 수와 봉급을 자유롭게 조정할 수 있는 권한을 자기들의 투자 조건으로 내 걸고 있는 것이고 대통령은 이들의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는 판단하에 급속하게 구조 조정이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닌가. 결국 노동자들은 과거 강압적인 수단으로 몇 푼 더 받은 것으로 자승자박(自繩自縛)한 꼴이 되었다. 국민의 지금과 같은 위기 상황에서도 노동조합의 지도자들은 똑 같은 수법을 되풀이하여 국민을 더욱 불안하게 하고 있다.


외국 투자자들이나 외국 기업주들이 요구하고 있는 ‘노동의 유연성’의 본질을 분석하여 볼 필요성이 있다. 서양에서는 자유민주주의를 근본으로 한 자본주의와 자본주의에서 파생하는 모순을 보완하는 사회보장(복지)제도를 발전 시켜 왔다.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대립된 고용주와 노동자 양자(兩者)간의 경쟁을 자연적인 현상으로 본다. 이와 같은 배경에서 외국 투자가(投資家)들이 요구하는 것은 투자가의 필승(必勝)을 위한 조건이다. 그러나 불교적인 사유로는 자본가(資本家)가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하여 노동자를 착취하는 것도 모순이요, 노동자들이 단체 결사 권으로 고용주와 대립하여 투쟁적으로 노동자의 권리와 이익을 증가하고 옹호하는 운동도 모순이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콩 한 알도 나누어 먹던 공동체의식을 미덕으로 생각하여 왔으나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사고방식에서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자기중심적인 개인주의와 끝없이 내 것으로 만들어도 직성이 풀이지 않는 개인 이기주의 그리고 집단이기주의는 형제, 부자(父子), 친구, 도반, 사회단체, 정치 단체를 갈라놓아 대립과 경쟁과 질투와 투쟁과 몰락을 가져오게 하고 있다. 이제  사람은 없고 돈만 있는 사회가 되었다. 그리고 한탄 서러운 일은 돈을 벌기 위해서는 어떠한 인명 피해도 부끄럽게 생각할 줄 모르는 무자비한 행동이다. 현재 정부와 재벌과 노동계에서 하고 있는 구조 조정 방법은 이와 같이 돈을 추구하는 이기심 때문에 악화되어 가는 민심을 더욱 악하게 만드는 씨를 심는 것이라고 본다.  


이러한 상황에서 불교계의 지도자는 과연 무엇을 하여야 옳은가? 먼저 우리의 교리를 살펴보자. 불교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는 불일불이(不一不異)의 관계이다. 즉 고용주와 고용인은 분명히 서로 그 역할이 다르다. 이런 점을 불일(不一)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역할이 다르다고 하여 서로가 다른 남도 아니다. 이런 점을 불이(不異)라고 한다. 그러므로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는 불일불이(不一不異)의 사상적 기반을 가지고 육성시켜야 한다.

위와 같은 서양사상을 바탕으로 한 노동조합의 지도층은 일반 노동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을 빙자하여 극한투쟁으로 자기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위선적인 새로운 집단이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어렵다. 국민이 선출한 많은 공직자들이 일단 당선이 되면 ‘너와 나는 다르다(不一)’는 서양식 사고의 물을 마시며 자기의 이익을 챙기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서양 사상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현재의 노동운동을 결성시킨 ‘너와 나는 다르다’는 불일(不一) 사상을  ‘너와 나는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는 불일불이(不一不異)사상으로 개혁하지 않으면 안된다.  ‘너와 내가 다르다는 불일(不一)사상’에서 개인의 창의력, 자유, 평등, 인권, 사유재산, 이기적 욕망추구의 자유 등이 보장되고 신장된다. 그러면서도 이 ‘불일(不一)사상’은 ‘너와 나는 다르지 않다는 불이(不異)사상’에 의하여 견제된다. ‘불이(不異)사상’은 너와 나는 동질성을 가진 동체라는 깊은 깨달음에서 솟아 나오는 마음이다. 이 마음이 바로 대자대비심(大慈大悲心)을 일으키는 근원이고, 자비희사(慈悲喜捨) 사무량심(四無量心)의 근본이 된다. 소아적(小我的)인 나를 버리고 대아(大我)를 위하여 무량한 자비심을 행하려 할 때 그 원(願)을 성취시킬 지혜력을 동반하는 것이다.


현재 당면하고 있는 난국 타개의 정신적 바탕으로 서구의 개인이기주의를 척결하고 우리의 정통적인 정신인 사무량심 사회화 운동을 전개할 것을 제안하는 것이다. 이 운동의 이름을 ‘사무량심 결사 운동’이라고 칭하고 각 사찰이 있는 지역 직장 단위의 불자모임에 지도 법사를 정기적으로 보내어 ‘사무량심 결사운동’을 시행하도록 권하고 전파함이 바람직하다고 느낀다.

①종단에서는 정부로부터 ‘사무량심 결사운동’이 노동운동을 할 수 있는 단체로 인정받도록 필요한 지원을 하여주고, 지도 법사는 직장의 불자모임이 사무량심을 바탕으로한 노동운동도 겸할 수 있도록 지도하고,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를 사무량심 사상에 의하여 유지하도록 유도하고, 사원(社員)과 사원 사이에 있어서도 사무량심에 의하여 전체의 감봉(減俸)으로 고통 분담을 할지언정 강제적인 해고는 없도록 함으로서 회원간에 일체감을 갖고 경안한 마음을  갖도록 노력한다.

②‘사무량심 결사 운동’은 투쟁적인 방법으로 봉급 인상을 요구하지 않고 이치에 맞는 합리적인 방법으로 봉급 인상을 요구할 것이다. 외국 투자가들이 요구하는 ‘노임의 유연성’에 위배되지 않는다. 오히려 많은 실업자로 인한 사회의 불안 요소를 제거함에 절대적인 도움이 될 것이다.

③‘사무량심 결사 운동원(運動員)’이 기업주에게 요구할 것은 기업경영의 투명성과 이윤의 증가에 따른 총 노임의 증가 스케줄이다. 이 기업경영의 투명성은 외국 투자가들도 요구하고 있는 것이므로 처음부터 별다른 문제가 없는 요구이다.

④노동자가 부처님이 뜻하시는 대로 사심(私心)을 버리고 ‘사무량심 결사 운동’을 전개하면 가까운 시일에 기업주도 외국 투자가도 숭고한 이 운동에 동참하게 될 것이다. 이 운동은 ‘달라’는 운동이 아니고 ‘주기’위한 운동이기 때문이다.  

⑤정치 경제 사회 교육 전반에 이 운동이 전파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으며, 금권(金權)에 구속된 동남아 모든 불교 국가에도 급속히 전파 될 수 있다.

⑥‘사무량심 결사 운동’은 궁극적으로 인간성과 불성을 회복하기 위한 운동이다.


불기 2542. 7.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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