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體)로 하여 용(用)을 일으키는 나를 비무아(非無我)


시작이 없고 끝이 없는 것은 생과 멸이 없는 것이므로 불생불멸을 의미합니다. 불생불멸하는 진리를 우리는 실상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실상의 경지를 이해할 수 있는 나는 어떠한 나인가 알아보겠습니다.


“유아(有我), 내가 있다”고 하여도 눈 가운데 티가 들어간 것이요, “무아(無我), 내가 없다”고 하여도 피부에 부스럼이 난 것과 같습니다. 유아(有我)라고 해도 바른 답이 되지 못하며 무아(無我)라고 하여도 우치(愚痴)함이 됩니다. 내가 없다면 아무 것도 할 일도 없습니다. 이것은 양변(兩邊)을 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아에도 무아에도 양쪽에 다 섭(涉)하지 않는 “나”라야 바야흐로 여여(如如)에 계합하는 “나”가 되는 것입니다. 양쪽에 다 섭(涉)하지 않는 “나”는 바로 나의 본성(本性)이고 성(性)이 곧 “나”입니다. 성(性)이 곧 나라고 하는 것은 업아(業我)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듣고 보는 것은 업에 따라 듣고 보는 것입니다.


내가 과거에 본 습관에 따라 보고 듣고 맛보고 느낍니다. 김치를 좋아하던 습관에 따라 김치를 좋아하고, 농담을 좋아하던 습관에 따라 농담을 좋아하고, 남을 희롱하기 좋아하던 습관에 따라 남을 희롱하기 좋아합니다. 음악을 좋아하는 것도 미술을 좋아하는 것도 과학을 좋아하는 것도 모두 자기 과거의 습관에 따라갑니다. 좋은 습관이든 나쁜 습관이든 우리들의 습관이 우리들의 본성을 가리고(덮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흔히 본의 아니게 잘못을 저지르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자기의 잘못된 습관이 저지르는 과오를 그때그때 인식해서 그러한 습관들을 고쳐나가야 합니다.


불교에서 유아(有我)라고 하는 의미는 이러한 습관에 젖은 나를 유아(有我)라고 합니다. 이러한 습관에 젖은 나, 습관에 의하여 구속되어 있는 나에서 완전히 탈피한 나를 무아(無我)라고 합니다. 무아(無我)의 경지에 이르게 되면 무아(無我)의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궁한 지혜의 공덕을 체험하는 새로운 자기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을 아무 것도 없다는 의미에서의 무아(無我)가 아닌 ‘나’라고 하여 비무아(非無我)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습관과 업의 덩어리인 나를 유아(有我)라고 하고 이 습관과 업에서 벗어난 나를 무아(無我)라고 합니다. 이 무아(無我)는 나의 진성(眞性) 본성(本性)에 의한 ‘나’입니다. 그러나 나의 본성에는 무아(無我)라고 하여 아무 것도 없느냐 하면 그것이 아니고, 바다 밑에 있는 보배처럼 무궁한 보물이 있습니다. 이 보물의 입장에서 볼 때 무아(無我)는 무아가 아니라 보물이 있다는 비무아(非無我)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글자에만 집착하여 무아(無我)는 내가 없다라고만 해석하여 허무주의에 빠지는 단견(斷見)을 갖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관습을 벗어버린 진정한 의미에서의 무아(無我)에서 나의 진성(眞性)이 들어나게 됩니다. 이 나의 참된 성품을 나의 본성이라고도 합니다. 이 본성에서 무궁한 지혜공덕을 우리는 체험하게 됩니다. 이 본성을 체(體)로 하여 용(用)을 일으키는 나를 비무아(非無我)라고 합니다. 무아(無我)는 체(體)이고 비무아(非無我)는 용(用)이 되는 것입니다. 즉 비무아(非無我)는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자비행을 자유자재로 행하는 ‘나’이고 무아(無我)는 나로 하여금 그 자비행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근본, 근원입니다.


유아(有我) 무아(無我) 비무아(非無我)를 벼이삭과 쌀과의 관계에 비유하여 설명하여 보겠습니다. 벼이삭이 벼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껍질을 ‘나’라고 생각합니다. 이 껍질을 가진 나를 유아(有我)라고 합니다. 이것은 여러 가지 업을 가지고 있는 나를 나라고 생각하는 우리들에게 비유됩니다. 여러 가지 껍질을 가진 벼는 그것이 자기라고 집착하여 벼로서 남아 있으려고 전력을 다하여 고집하지만 방앗간에 한 번 갔다 나오면 벼는 흰쌀이 되어 나옵니다.

이 흰쌀은 벼에 입장에서는 내가 아닙니다. 이것을 비유아(非有我) 혹은 줄여서 무아(無我)라고 합니다. 흰쌀은 우리들의 심성(心性)에서 모든 이물질(異物質), 모든 업장(業障)이 제거된 상태에 비유됩니다. 이 모든 업장(業障)이 제거된 상태의 나를 무아(無我)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아(無我)는 내가 나라고 생각했던 나의 모든 습관, 업장, 이물질(異物質)들을 나로부터 완전히 제거한 ‘나’이므로 쌀에 해당합니다. 벼이삭이 나라고 생각했던 내가 아니고, 모든 껍질을 벗겨 버리고 나니 쌀이 남았습니다. 벼이삭일 때는 그것이 나라고 굳건히 생각하고 모든 것을 벗겨 버리면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쌀이 남았습니다. 벼이삭의 입장에서는 벼이삭은 유아(有我)이고 쌀은 무아(無我)인 것입니다. 벼이삭은 벼이삭대로 용도가 있지만 쌀의 용도에 비교 되겠습니까.

이제 이 쌀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종류의 밥도 될 수 있고 떡 인절미 송편도 될 수 있고 요즈음에는 케익도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가능성은 벼이삭일 때는(有我) 그 벼이삭 속에 내포되어 있기는 했지만 그것이 들어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삭의 모든 껍질을 벗겨버리고 나니 쌀(무아)이 남았습니다. 벼이삭을 나라고 생각하였으므로 쌀은 내가 아니라고 표현하여 비유아(非有我) 또는 무아(無我)라고 합니다. 이제 쌀이 무아(無我)가 되었습니다. 쌀인 무아(無我)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쌀이 떡이 되었을 때는 더 이상 쌀이 아니기 때문에 비무아(非無我)가 되는 것입니다. 이 비무아(非無我)는 무궁한 쌀의 가능성을 이용해서 모든 중생에게 가장 유익한 음식물을 만들어 공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입니다. 비무아(非無我)는 관세음보살님이나 부처님의 지위에 해당하는 ‘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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