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9.18 04:56
나에게 한 웅쿰의 햇차가 있어 그 향기가 코를 찌르니
그대는 속히 와서 나를 위해 이 맛을 감상(鑑賞)하게나.
一片新茶破鼻香 請君速來爲我賞
일편신차파비향 청군속래위아상
- 미상
선다(禪茶) 일미(一味)라는 말이 이 선시(禪詩)를 쓰신 분의 마음에 와 닿았다고 생각된다. 그 차 맛 속에 일체 모든 번뇌가 녹아들어 그 차 맛 외는 아무 것도 없게 되니, 그 차 맛이 곧 나요, 내가 곧 그 차 맛이 되어, 차와 내가 한 맛을 내고 있는 것을 느낀 것이다. 이 때, 이 차의 향기가 코를 찌르고 그 코의 진동이 일으키는 파장이 이 법계를 가득 채우고 있어 이 법계가 ‘나’와 하나가 되었을 때 느낄 수 있는 향기를 묘사한 것이다.
들고 있던 찻잔을 놓고 생각해보니 법계와 하나가 되는 차 맛이 얼마나 아름다운 향기였던가! 이 법계와 하나 된 그 맛을 누구와 같이 감상하고 싶고 전하여 주고 싶은 심정이 일어나서 그 심정을 나누기 위해 그와 같이 느낄 수 있는 사람이 지금 이 자리에 있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바라는 것이다.
아름다운 경치를 보면 보여주고 싶은 사람이 있고,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같이 먹고 싶은 사람이 있다. 여행을 가도 같이 하고 싶은 사람이 있는 것이 보통인데 차 한 잔을 앞에 놓고 일체가 텅 빈 광할한 도(道)에 들었을 때, 그 때는 모르겠지만 그 도에서 평상시의 의식으로 돌아왔을 때 그 맛을 함께 감상하고 싶은 사람이 어찌 없겠는가.
차를 음미하는 사이에 자신에게 끈질기게 따라다니든 괴로움, 우울함, 울분, 시비 등등이 모두 그 찻물 속에 녹아버리고 씻어졌다는 사실이다. 답답했던 감정이 씻겨져 나가 나를듯한 가벼움, 그 시원한 향기를 어디에 비할 수 있겠는가?
일체의 갈등이 사라진 그 자리에 길고 짧은 것이 어디에 있으며, 맛이 있고 없는 차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차 맛과 내가 둘이 아니고 하나도 아니라는 생각이나 말이 설 자리가 어디에 있으며, 누가 그 자리를 무엇이라 표현할 수 있겠는가? 다만 가장 가까운 도반에게 이 맛을 감상해 보라고 청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는 것이다.
선다일미(禪茶一味)라는 그 맛은 너무나도 주관적(主觀的)이라 누구에게도 전할 수 없는 맛이다. 누구나 자기가 직접 맛보지 않고는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 해도 전해 받을 수 없는 맛이다. 그 다도(茶道)의 정신을 이어받아 몸과 마음을 다하여 그 도법(道法)에 몰입해야한다. 몰입하기 위해서는 마음속에 잠겨 있는 갈등을 하나하나 꺼내서 찻물로 씻어버려야 한다. 한없는 세월동안 한없이 계속 하다보면 더 이상 씻으려야 씻을 것이 없는 단계가 오게 되면 저절로 도법에 몰입하게 되고 차와 내가 하나가 되면서 일체가 하나인 텅 빈 공간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한 잔의 차가 이와 같이 깊고 깊은 선(禪)의 도리를 맛보게 할 수 있으므로 다도(茶道)를 수행의 도(道)로 삼아왔던 것이다.
이 시를 다시 한 번 읊어 보겠다.
나에게 한 웅쿰의 햇차가 있어 그 향기가 코를 찌르니
그대는 속히 와서 나를 위해 이 맛을 감상(鑑賞)하게나.
차맛을 깊이 느낄 때 세상사를 잠시나마 뒤로 미룰 수도 있고, 그 일을 훨씬 바르게 세울 수도 있으며 마음의 여유를 향유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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