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멸을 떠나서 적멸(寂滅)을 구하는가?

2008.08.26 22:45

현성 Views:9604

<31> 생멸을 떠나서 적멸(寂滅)을 구하는가?


대혜(大慧) 종고(宗杲) 선사는 1089-1163년 당송대의 선사로 공안 참구법인 간화선의 시조이신데, 이 선사의 글을 모은 서장에서 선사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생멸을 떠나서 적멸을 구하는가?’ 라는 게송이 있는데 즉,


만약 고요한 곳이 수행처로서 옳은 곳이 된다면

시끄러운 곳은 틀린 곳이 된다.

이것은 곧 세간의 모습을 깨뜨려서

실상(實相)을 구하는 것이니

생멸을 떠나 적멸을 구하려는 것과 같다.


원문은 :

若以靜處爲是 요處爲非 則是壞世間相 而求實相 離生滅 而求寂滅

약이정처위시 요처위비 즉시괴세간상 이구실상 이생멸 이구적멸 이다.


불교 수행처가 꼭 고요한 산중(山中)이 되어야 한다면, 사람들이 모여 사는 번잡한 도시(都市)는 수행처로서 적합하지 못하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모여 사는 모습들을 모두 부셔버려야, 사람이 사는 실상(實相), 즉 참된 모습을 구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곧 나고 죽는 것을 떠나서 적멸(寂滅)을 구하려는 것이다.


이는 대혜선사께서 역설적인 논법으로 적멸은 생멸 속에 있고, 세간의 실상은 세간 속에 있으며, 시끄러움 속에 고요함이 있는 진리를 말씀하신 것이니, 즉 생멸 속에 적멸이 있는 법인데 어떻게 생멸을 떠나 적멸을 구할 수 있고, 세간(世間)에 세간의 실상(實相)이 있는데 어떻게 세간을 떠나 실상을 구할 수 있으며, 시끄러운 가운데 고요함이 있는데, 어떻게 시끄러움을 떠나 고요함을 구할 수 있느냐? 라고 하시며, 공부하는 환경을 탓하지 말고 공부하는 목적과 방법을 바르게 잡아 일념으로 정진하라는 교훈이다.


생멸 속에 적멸이 있다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생멸이란 나고 죽는 것이고, 적멸이란 일체 나고 죽는 감정이 사라진 고요함인데, 나고 죽는 것은 식물의 종자처럼 또 나고 죽는다. 나고 죽고 또 나고 하는 동작이 상속하여 일어나는 것을 윤회라고 하는데, 한 생각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또 이에 이어 또한 생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생각의 상속도 생멸작용이다. 이러한 생각의 연속작용을 번뇌 혹은 망상이라 하는데, 번뇌(煩惱)라는 것은 괴롭고, 답답하고, 번거롭고, 귀찮게 느끼는 마음의 표현이고, 망상(妄想)이란 허망한 생각, 거짓된 생각으로 나를 망(亡)하게 하는 생각이란 뜻이다.

사람마다 생멸하는 생각의 궤도(軌道)가 있는데 이것을 습관적인 생각이라 하여 관념(慣念)이라 한다. 이러한 습관성이 있는 생각의 틀은 많은 병의 원인이 되기도 하고, 하고자 하는 일에 장애(障碍)가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러하기에, 우리는 수행을 통해서 이러한 번뇌나 망상을 소멸하고자 하는 것이다.

여러 가지 수행을 통해서 이러한 번뇌 망상을 소멸시키게 되면, 습관적인 생각의 상속이 끊어지게 되므로, 생각의 윤회에서 해탈(解脫)한다고 한다. 모든 생각을 멈출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으니, 이 경지를 ‘모든 생각이 끊어져 고요하다’하여 적멸(寂滅)이라 하는 것이다.


이치가 이러하니 생멸을 멈추면 적멸이지만 적멸을 떠나 생멸이 있는 것이 아니며, 적멸에서 또 생멸하는 생각이 일어날 수 있으니, 생멸을 떠나 적멸이 있는 것도 아니고. 더욱이 생멸하는 이 몸을 떠나 적멸이 있는 것이 아니니, 생멸과 적멸은 서로 상통하는 것이며 필요에 따라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을 때 생사열반상공화(生死涅槃常共和)가 된다. 열반이 곧 적멸인데, 생사와 열반이 항상 서로 함께 화합(和合)한다는 말씀이기도 하다.

수행을 산중에서 하든 저자거리에서 하든 마음이 번거러우면 고요한 산중도 번거롭고, 마음이 한적하면 시끄러운 저자거리도 한적할 수 있으니, 수행자의 마음 상태의 문제이지 수행처의 문제가 아니라는 뜻을 대혜선사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다시 한번 게송을 읽어보면,    


만약 고요한 곳이 수행처로서 옳은 곳이 된다면

시끄러운 곳은 틀린 곳이 된다.

이것은 곧 세간의 모습을 깨뜨려서

실상(實相)을 구하는 것이니

생멸을 떠나 적멸을 구하려는 것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