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고 심무가애 (보살의 세계)
菩提薩唾 依般若波羅密多故 心無罣礙
《보리살타가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니》
1) 보리살타(菩提薩唾)
제 1장의 14쪽에서 설명하였다. 요약하면
보리(菩提)(bodhi)는 깨달음(覺)이다. 이 깨달음을 위하여 부처님의 가르치신 바에 따라 수행 정진한다. 그 결과로서 얻어 지는 것은 반야이고, 반야는 초월적 지혜이다. 내가 초월적 지혜를 얻는 것이므로 이것을 자리(自利)라고 한다.
살타(薩唾)(sattva)는 중생(衆生)이다. 중생이란 생명 있는 유정(有情)이다. 나도 중생중에 하나이지만 발심하여 내가 하화중생할 수 있는 위치에 오르도록 노력하라는 뜻이다. 하화중생(下化衆生)은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한다, 구제한다는 뜻으로 보리(菩提)를 얻은 내가 중생에게 행하는 자비바라밀이다. 중생을 위하는 것이므로 이타(利他)라고 한다.
이 보리살타(菩提薩唾)는 이미 저 열반의 언덕에 뛰어 넘을 수 있는 반야를 구족하고 자비행을 하는 보살이다.
『팔천송반야경』「초품」은 보리살타를 이렇게 말한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보디사트바라고 말씀하시는데 그 보디사트바는 무슨 뜻입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온갖 법이 걸림 없음을 배우고 또한 실속있게 온갖 법을 알면 이것을 보디사트바의 뜻이라 한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만약 온갖 법의 참모습을 아는 것이 보디사트바의 뜻이라면 다시 무슨 뜻으로 마하사트바(maha-sattva)라고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마땅히 대중의 윗자리가 되어 대중에게 헌신하면 마하사트바라고 한다.’
사리불이 말하였다. ‘저도 또한 기꺼이 마하사트바라고 하는 뜻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말하고 싶으면 곧 기꺼이 말하라.’
사리불이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보디사트바는 나라는 생각(我見), 너라는 생각(人見), 중생이라는 생각(衆生見), 목숨이 있다는 생각(壽者見)을 끊고, 있다는 생각(有見), 없다는 생각(無見), 아주 없어진다는 생각(斷見), 늘 항상한다는 생각(常見)을 끊고 대중을 위해 진리를 설해주므로 그것을 마하사트바라고 합니다. 이렇게 대중을 위해 설법할 때도 마음 가운데 집착하는 바가 없으므로 마하사트바라고 합니다.’1)
『팔천송반야경』에 의하면 보디사트바, 마하사트바는 바로 일체법의 참모습을 바로 보는 인식과 대중을 해탈의 길에 이끌어 들이는 설법행의 실천에 의해 마하사트바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이 뜻은 다시『팔천송반야경』에서 보디사트바를 내는 모태(母胎)와 산실(産室)이 육바라밀행이라는 말로 재구성된다.
아난다여, 보디사트바가 위없는 깨달음을 얻으려면 마땅히 여섯 가지 바라밀행을 잘 배워야 한다. 왜 그런가. 아난다여, 여러 가지 바라밀행이 바로 보디사트바의 어머니이니 육바라밀행이 모든 붓다를 낸다. 만약 보디사트바가 이 여섯 가지 바라밀행을 배우게 되면 반드시 위없는 깨달음을 이룰 것이다.2)
2) 의 반야바라밀다 고(依般若波羅密多故)
「반야바라밀다」에 관한 설명은 제 1장의 6쪽에서 설명하였다. 요약하면:
「반야」란 생명의 실상을 바로 볼 수 있어 생명체의 안과 밖을 있는 그대로 보는 안목이다.
「바라밀다」란 저 언덕에 도달한다. 즉, 괴로운 이 삶에서 벗어나 열반과 같은 즐거운 나의 인생으로 뛰어 넘기 위한 생사를 건 정진이다.
「의반야바라밀다고」는 <불안하고 괴로운 이 환상의 세계를 뛰어 넘어 열반과 같이 평화롭고 자유스러운 삶을 살아 갈 수 있는 광대 무변하고 무애한 초월적 예지를 통하기 때문에>라고 뜻풀이 된다.
「보리살타 의 반야바라밀다고 심무가애
菩提薩唾 依 般若波羅密多故 心無罣礙」는
<불안하고 괴로운 이 환상의 세계를 뛰어 넘어 열반과 같이 평화롭고 자유스러운 삶을 살아 갈 수 있는 광대 무변하고 무애한 초월적 예지를 갖추신 보리살타가 반야를 실천하기 때문에 마음에 일체 걸림이나 장애가 없이 본래의 진면목을 나타나게 한다>라고 뜻풀이 된다. 「의반야바라밀다」의 「의(依)」는 지팡이에 「의지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가 아니다. 「수행한다」라는 의미로 보디사트바와 반야바라밀다를 서로 규정한다. 전체적으로 「보살의 세계」를 묘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