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2.1 분석적 고찰 -1)관자재보살

2007.03.01 01:30

여해 Views:9200

제2장 입의분(立義分)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密多時
    ①관자재보살이 ②깊은 ③반야바라밀다를 ④행할 ⑤때

  이 부분은 반야심경에서 설명코자 하는 대의(大意)를 미리 요약해서 밝히는 부분중 능히 관하는 주체의 지혜를 밝히는(‘明能觀智’)부분이다. 즉, 주체로서 깨달은자의 지혜로운 실천을 밝힌 부분이다.


「조견 오온 개공 도일체고액」
    照見 五蘊皆空 度一切苦厄
    ②오온이 모두 공한 것을 ①분명히 알게되니 ③일체고액을 소멸하느니라

「관자재보살」은 본인이 깨달은 지혜의 실천을 일으키는 창조적 주체이고 그 지혜(智慧)에는 지체(智體)1)와 지용(智用)2)이 있고, 지체(智體)는 「행심반야바라밀다시 行深般若波羅密多時」에 해당한다. 지용(智用)은「조견오온개공 照見五蘊皆空」이며 지용(智用)의 결과로 얻어지는 이익(利益)이 「도일체고액 度一切苦厄」이다.  본 강의의 주제는 「관자재보살」의 지혜(智慧)의 지용(智用)과 지용의 이익(利益)부분이다.


1. 분석적 고찰

1)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

관자재보살은 설주(說主)이신 부처님께서 내몸의 병, 가정의 불화, 직업상의 고통, 삼재팔란 등 모든 액난을 어떻게 소멸할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 사리불에게 대답하실 때 등장시킨 액난을 소멸시키는 주인공이다. 부처님이 인용하신 가장 이상적인 인물이지만, 이상적인 이 인물은 바로 나의 주인공임을 직감할 줄 알아야 한다. 마치 우리들이 재미있는 영화를 볼 때에, 내가 그 주인공이 될 때가 있다. 그때 그 영화와 내가 둘이 아닌 경지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관자재보살과 내가 둘이 아닌 경지에 가도록 정성을 다하여야 관자재보살이 담고 있는 무한한 공덕이 원래부터 내가 가지고 있는 것임을 체험하게 된다. 이 공덕을 체험함에 따라 관자재보살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관자재보살의 공덕을 알아보자.

(1) 관자재보살의 뜻
 관자재보살은 반야 행을 일으키는 창조적 주체 역할을 한다. 인도 원문(산스크리트)을 번역하신 분이 원문을 보신 각도에 따라 관자재보살 혹은 관세음보살로 번역하였다.  

인도 원문은 Avalokiteśvara bodhisattva 이다. 음역하면 ‘아바로키태스바라 보디샅아’이다. 역경삼장(譯經三藏) 현장(玄奘)(599-664)은 관(觀) (Avalokita) + 자재(自在)(iśvara) 로 보아 관자재(觀自在)로 번역하였고 역경삼장 구마라습(鳩滅什)(Kumanajiva) (343-413)은 관(觀) (Avalokita) + 세음(世音)(svara) 로 보아 관세음(觀世音) 혹은 관음(觀音)으로 번역하였다. 구마라습은 모든 고통스런 소리를 듣을 수 있고 문제를 능히 해결 할 수 있는 의미로, 현장은 고통스런 소리뿐만이 아니라 모든 것이란 포괄적인 의미를 부여하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서는 관세음보살과 관자재보살을 둘 다 함께 사용하고 있지만 그 어원,  ‘아바로키태스바라 보디샅아’ ‘Avalokiteśvara bodhisattva’는 같다는 것을 알아두기 바란다.

가. 관자재보살의 관(觀) (Avalokita)
관(觀) (Avalokita): 내려다본다. 비친다. 직관력의 투시력. 공(空)한 경계와 현상계를 사무쳐 아는 초월적 지혜인 반야(般若).

나. 관자재보살의 자재(自在)(iśvara)
자재(自在)(iśvara): 마음대로, 걸림 없는.

다. 관자재보살의 관자재(觀自在) 혹은 관세음(觀世音) (Avalokiteśvara)
 관자재(觀自在): ‘걸림 없는 지혜의 마음으로 자유자재로 관찰한다’는 뜻이다.
 관세음(觀世音): ‘세상의 소리를 관찰한다’는 뜻이다.

 “관자재”이든 “관세음”이든 우리는 말에 걸리지 말고 고유명사로서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보며, 여기에는 두 가지의 뜻이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하나는 사물의 연기적 이치와 이치의 연기적 현상이 서로 걸림 없는 존재의 실상〔理事無碍之境〕을 깊이 통달하여 자유로우므로 ‘살펴봄이 자재하다〔觀自在〕’는 것이다. 이것은 “관자재”를  초월적 지혜(반야)로 해석한 것이다. 둘째 의미는 이사무애(理事無碍)의 지혜로서 중생의 수준과 요구를 살피어 그들에게 가서 구제해 줌이 자유롭고 걸림이 없으므로 ‘살펴봄이 자재하다’고 이름한 것이다. 이 해석은 “관자재”를 자비로 해석한 것이다. 즉, “관자재”는 반야와 자비의 두 가지 의미를 포함한다. 이와 같은 “관자재보살”은 부처님의 경지에 오른 반야와 그 실천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람들의 고통을 자유자재로 꿰뚫어 보시고 그 고통을 구원코자하는 부처님의 화신(化身)이다. 또 우리가 성취해야할 이상적인 인격이다.

라. 관자재보살의 보살(菩薩) (bodhisattva)
보살은 보리살타(菩提薩唾)의 준말이다.

보리(菩提)(bodhi)는 깨달음(覺)이다. 이 깨달음은 남의 깨달음을 의미하고자함이 아니다. 내가 보리를 얻기 위하여 상구보리를 하여야함을 의미한다. 상구보리(上求菩提)는 위로는 깨달음을 구한다는 뜻이다. 이때, 깨달음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은 반야이고, 반야는 초월적 지혜이다. 내가 초월적 지혜를 얻는 것이므로 이것을 자리(自利)라고 한다.

살타(薩唾)(sattva)는 중생(衆生)이다. 중생이란 생명 있는 유정(有情)이다. 중생은 나도 중생중의 하나라는 뜻이 아니고 내가 하화중생을 하는 위치에 있어야함을 의미한다. 하화중생(下化衆生)은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한다, 구제한다는 뜻으로 보리(菩提)를 얻은 내가 중생에게 행하는 자비바라밀이다. 중생을 위하는 것이므로 리타(利他)라고 한다.

이상으로서 “관자재”와 “보살”은 동격(同格)임을 관찰하였다. 그리고 이 경지는 부처님의 화현(化現)의 경지임을 알았다.

마.  보살(菩薩): 일반적으로 활용되는 의미에는 세 가지가 있다.
①  자기도 성불하고 남도 성불시킬 목적으로 수행하는 사람으로서의 “보살”. 여신도(女信徒)들을 “보살”이라고 부르는 것은 여기에 준한다고 본다.
②  수행이 완성된 “보살”로 중생구제를 목적으로 하는 성자(예: 지장보살)
③  부처님의 화현으로서의 “보살”(관자재보살,  문수보살)

(2) 관자재보살의 영험

일반적으로 반야심경 사경을 하거나 관음기도를 하는 불자들의 심정은, “관자재(관세음)보살”의 영험에 전적으로 의지하여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마음일 것이다. 지극한 마음으로 기도를 한다면 물론 기도는 성취된다.  그러나 그 기도의 성취가 꼭 처음에 원했던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기도하는 사람의 소원이 모두 다 바른 것이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도나 사경(寫經)의 효과가 있었다고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두 가지 유형으로 정리된다.

 첫 번째의 형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일이 이루어지는 경우이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가정문제나 건강문제, 사업문제 등이 지극한 기도 혹은 정성어린 사경 끝에 해결되는 것이다.

 두 번째의 형태는 마음에 변화를 일으킨 경우이다. 절박한 심정에 외골수 생각으로 반야심경 사경이나 기도를 시작했지만, 지극한 정성으로 사경이나 기도를 하는 과정에서 절박한 마음이 풀리면서 전혀 새로운 길이 보이게 되는 경우이다.  

 이러한 사경이나 기도의 영험은 관자재보살(관세음보살)의 두 가지 면이 아래와 같이 확실하게 나의 마음과 영합이 될 때 이루어지게 된다.

가. 내 자신의 관음(觀音):〈나의 내재적 관음 內在的 觀音〉

 나에게는 맑고 깨끗하고 참된 성품이 있다.  이 성품은 부처님의 성품과 같다. 이것이 누구나 불성(佛性)이 있다고 하는 교리의 근거이다.

우리가 모든 집착과 번뇌에서 자유로워졌을 때 이 성품이 스스로의 빛을 비추어 모든 것을 자유자재로 관찰하며, 아울러 나와 남을 구분 짓는 한계성을 벗어나 참다운 자비를 베풀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에게는 무한한 능력이 있으나 스스로 만든 장애들 때문에 능력을 발휘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갖가지 수행(반야심경 사경, 기도)에 의해 지혜와 자비의 힘이 드러날 때 나 자신의 관음이 성취되는 것이다. 이때 불가능이 가능으로 화하는 위신력의 영험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나. 부처님의 화신으로서의 관음:〈외재적 관음外在的 觀音〉

 부처님이나 보살님들에게는 수행과 원력에 의해 갖추어진 무한한 힘이 있다.  그러나 이 힘은 중생들로서는 알 수 없다.  이 세상에는 전기(電氣)의 힘이나 자기(磁氣)의 힘, 전파(電波)의 힘 등으로 가득차 있지만 특수한 장치를 하지 않고는 그 힘을 알 수가 없다.
 사실 전기에 의해 에어컨도 작용하고 방송전파에 의해 TV도 보지만 전기나 전파 그 자체를 볼 수는 없다.

 이렇듯 불∙보살의 힘도 우주에 가득하지만 중생들은 알 수가 없다. 각자의 근기에 따라 받는 것이다. 반야심경 사경을 할 때나 기도할 때 반야심경에 담겨있는 관자재보살의 원력을 정성껏 관함으로써 관자재보살의 원력으로 각자의 사사로운 생각을 놓아 버릴 수 있다. 이 때, 자신의 근기와 힘은 상대적으로 높아지는 것이다. 이 힘이 점점 높아짐에 따라 우주에 충만한 불∙보살의 힘과 영합할 수 있는 영역에 나 자신이 진입하는 것이다. 이것이 내 자신의 관음과 외부의 관음이 둘이 아닌 경지에 들어가는 순간이다. 이 때 내가 “나”라고 믿었던 “내”가 무너지는 변화가 나에게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체험하게 된다. 나의 아상과 아만이 무너지면서 내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과 일체 사물이 모두가 다 나를 돕고 옹호하여 주고 나의 창조적이고 행복한 삶을 이루게 하는 조건들이고 이들이 곧 부처님의 화신임을 체험하게 된다.  

(3) 경전에서 설명하는 관세음보살

 법화경(法華經)의 관세음보살보문품(觀世音菩薩普門品)에서 관세음보살에 대해 가장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부록> 참조.3)

(4) 관세음보살의 수행상의 양면성

 천수천안(千手千眼)관자재보살님이 천안으로 살피시고 나의 슬픔과 괴로움을 천수로서 멀리 여의게 해주시기를 기원(祈願)할 때도 있고 내 스스로 천수천안 관자재보살이 되고자 자각(自覺)을 위한 수행의 목표로서 이상적인 보살상으로 보는 경우이다. 우리는 어느 편에든 한 쪽에 치우치지 않으며 양면을 자유로이 출입하면서 기원(祈願)과 자각(自覺)이 상조(相助)하는 조화를 이루는 우리들의 수행생활, 불교 생활화는 발전을 거듭하게 되는 것이며 양면을 통하여 창조적 실천의 주체는 지혜와 덕으로서 소원 성취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