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행심(行深)반야바라밀다시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은 깨달은 자로서 능히 관할 줄 아는 지혜를 가지고 있다. 이 「관자재보살」의 지혜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지혜의 체이고 하나는 지혜의 용이다. 지혜의 체는 “행심반야바라밀다시”이고 지혜의 용은 “조견오온개공”이다. 여기에서는 “행심반야바라밀다시”를 설명하고자한다. 「관자재보살」이 “행심”을 하는 주체이다.

(1) 행(行)
  “행”은 의지작용을 의미한다. 여기에서는 수행하고자 하는 의지작용을 뜻한다. 수행이라면 “연기”, “삼법인”, “사성제”, “팔정도”, “육바라밀” 등을 닦아 번뇌장(煩惱障)1)과 소지장(所知障)2)을 멸하여 무아(無我) 무법(無法)을 증득하여 열반적정에 이르는 길(道)이다. 무아(無我)는 아공(我空)3)이요 무법은 법공(法空)4)이다. 아공(我空) 법공(法空)을 이공(二空)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과정에는 수행의 정도(程度)로서 지혜의 정도(程度)를 의미하는 여러 가지 계위가 있다. 반야(초월적 지혜)는 팔식(八識)이 모두 정화된 지혜를 의미하므로 성소작지,5) 묘관찰지,6) 평등성지,7) 대원경지8) (成所作智, 妙觀察智, 平等性智, 大圓鏡智) 등 사지(四智)를 증득하였음을 의미한다. 즉, “행”은 반야에 가는 길이다.

(2) 행심(行深)
  “행심”이란 이공(二空: 我空 法空)을 증득하여 모든 분별을 여의고, ‘행’해도 행하는 것이 없고 행함을 받는 것도 없는 행의 상을 “행심”이라고 이름한다.

『대품반야경』에서 설하기를 분별하지 않는 지혜(無分別智)에 올라 “행”해도 행하는 것을 접하지도 못하고(不見行), 행하지 않는 것도 접하지 못하는 것(不見不行)을 이름하여 보살이 “행심반야”한다고 한다.

『대품반야경』〈문지품〉제45에 의하면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사리불아, 선남자․선여인은 항상 자신이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글로 쓰고 내지 수행함이 시방제불의 위신력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사리불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그렇다면 선남자․선여인이 기 깊은 반야바라밀을 글로 쓰고 내지 수행함은 이것이 부처님의 위신력 때문이고, 이 사람은 마땅히 제불의 옹호를 받고 있다고 알아야 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사리불아, 만약 어떤 선남자․선여인이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글로 쓰고 내지 수행함은 이 모두가 부처님의 위신력 때문이고, 제불의 옹호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3) 반야(般若) (Prajṅā) : 6쪽 참조

(4) 바라밀다(波羅密多: pāramitā) : 10쪽 참조
『대품반야경』〈권학품〉제8에 의하면,
세존이시여, 보살마하살이 보시바라밀을 원만히 갖추려고 하면 반드시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합니다. 지계바라밀․인욕바라밀․정진바라밀․선정바라밀․반야바라밀을 원만히 갖추려고 하면 반드시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합니다.

『대품반야경』〈등학품〉제63에 의하면,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배워서 모든 바라밀을 모두 포섭하고, 모든 바라밀로 하여금 늘게 하며, 모든 바라밀을 낱낱이 따르게 한다. 왜냐하면 이 깊은 반야바라밀은 모든 바라밀을 낱낱이 가운데에 들여 놓기 때문이다.

비유컨대 나라는 소견(所見) 가운데에 예순두 가지(62) 소견(所見)을 낱낱이 포섭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수보리야, 이 깊은 반야바라밀은 모든 바라밀을 낱낱이 포섭하는 것이다. 비유컨대 사람이 죽으면 명근(命根)이 없어지는 까닭에 다른 감각기관이 전부 따라서 없어짐과 같다. 이와 같이 보살마하살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모든 바라밀이 전부 따르는 것이다.

이렇게 깊은 반야바라밀이란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을 포섭하고 있는 바라밀이다. 그래서 일체의 불법은 반야바라밀의 인도를 받을 때 비로소 목적지를 향해서 갈 수 있는 눈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들은 우리 자신들의 수행법을 되돌아보게 된다.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크신 위신력을 갖추게 되었듯이 우리들도 마찬가지로 다른 수행법이 아닌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수행함에 의해서 그러한 위신력을 가질 수 있고, 따라서 일체의 고액에서 벗어날 수가 있는 것이다.

(5) 시(時)
 관자재보살이 행심반야바라밀다를 성취하여 무상(無上)한 보리를 깨달아 사물(事物)과 그 진리를 꿰뚫는 (理事無碍한) 지혜를 얻어 중생의 근기와 고통에 따라 스스로 걸림 없이 (自在無碍하게) 구제(救濟)할 수 있는 자비를 행할 모든 준비가 다 갖추어 졌을 때라는 의미이다.

『대품반야경』〈습응품〉제3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나는 반야바라밀을 행하고 있다, 반야바라밀을 행하고 있지 않다, 반야바라밀을 행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행하고 있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는 생각을 갖지 않는다.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닦으면, 이것을 반야바라밀과 상응하는 것이라 한다. -<중략>-왜냐하면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나라고 하는 관념[아상(我相)]․중생이라는 관념[중생상(衆生相)] 내지 아는 것이라는 관념[지자상(知者相)]․보는 것이라는 관념[견자상(見者相)]을 내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중생은 본래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중생은 나는 것도 없고 없어지는 것도 없으며, 아울러 어떤 것이든 난다는 모습도 없고 없어진다는 모습도 없는 것이다. 어찌 법에 반야바라밀을 행함이 있겠느냐! 이처럼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중생을 보지 않는 것이 바로 반야바라밀을 행함이 된다. 본래 중생은 감각이 없고 실체가 없으며, 중생은 붙잡을 수 없고 고유의 특질을 여의어 있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을 행함이 된다.

이렇게 반야바라밀을 수행한다는 것은 스스로 반야바라밀을 행한다고도 행하지 않는다고도 보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일체의 관념이 사라진 자리가 반야바라밀행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