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2.1 분석적 고찰 -3)조견오온개공

2007.03.01 01:32

여해 Views:10033

3)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

(1)  조견(照見)
「관자재보살」이 이미 수행을 통하여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을 증득하였을 뿐 아니라 증득하였어도 증득한바 없는 무분별지(無分別智)까지 오르니 초월적 지혜(반야般若)가 샘솟아 이 세상에서 저 열반의 세계에 자유 자재로 갈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었다. 이 모든 이기심을 초월한 지혜에는 모든 실상(實相)을 비추어 볼 수 있는 자발광(自發光)1)이 있다.

 이 자발광으로 오온을 비추어보니 오온이 모두 공한 것을 알게 되었다. 즉, 모든 존재의 실상은 곧 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자발광(自發光)이란 모든 사물이나 인간의 실상(實相)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눈이다. 눈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들은 육안, 심안, 천안, 혜안, 법안, 불안 (肉眼, 心眼, 天眼, 慧眼, 法眼, 佛眼)이다.

육안(肉眼)은 우리들의 보통 눈이다. 눈앞에 종이 한 장이라도 막히면 볼 수 없는 눈이다. 개 같은 사람의 눈에는 개만 보이고, 돼지 같은 사람의 눈에는 돼지만 보이는 눈이다.

 심안(心眼)은 관념(觀念)의 마음이 능히 모든 현상과 실상을 비추어 볼 수 있으므로 심안이라 한다. 관무량수경에 「그 때에 대왕이 비록 유폐(幽閉)되어 있으나 심안(心眼)은 장애 되지 않아서 멀리 세존을 보았다.」하였고. 왕생요집중본(往生要集中本)에 「수행자는 심안(心眼)으로 자기의 몸을 보면 또한 그 광명(光明)가운데 있음을 안다」하였다. 심안(心眼)에 천안(天眼) 혜안(慧眼) 법안(法眼) 불안(佛眼)이 있다.

 천안(天眼)은 색계(色界) 사대(四大)로 만든 청정한 안근(眼根)이 거칠고 세밀하고 멀고 가까운 일체의 모든 색(色)과 중생의 미래에 있을 생사(生死)의 상(相)을 미리 아는 것이다. 즉, 사물에 매이지 않고 세상의 이치를 아는 눈이다. 사물의 경계가 무너지고 분별식이 바뀌니 현상을 바라보는 눈이 바뀌어 앞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리게 된다.

 혜안(慧眼)은 통달한 관(觀)을 혜(慧)라 하고, 혜는 능히 비추어 볼 수 있으므로 혜안이라 한다. 혜안은 시간을 초월하므로 과거와 미래의 시재(時齋)가 없어진다. 시재가 없으므로, 중생의 숙명(宿命), 중생들 업의 과보, 자질, 정신적 수준 등을 꿰뚫어 아는 지혜의 눈이 열리게 된다.

 법안(法眼)은 일체법의 실상과 현상을 분명하게 비춰 보아 그 이치를 아는 눈이다. 즉, 사물의 참 모습을 볼 수 있으므로 일체중생을 제도 할 수 있는 진리의 눈이다.

불안(佛眼)은 모든 법을 깨달아 모든 사물과 중생을 자비의 눈으로 보고 구제하는 각자(覺者)의 눈이다. 모든 법(法)의 실상을 비치는 눈이다. 즉, 모든 분별과 차별이 사라져서 걸림 없이 부처님을 만날 수 있는 부처의 눈이다.

이 열반의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지혜의 눈과 그 눈을 따라 나아가는 발이 필요하게 된다. 바로 그 지혜의 눈이 반야바라밀이다. 즉 정확한 인식과 이론에 입각하여 실천이 주어졌을 때만이 목적지에 도달할 수가 있는 것처럼, 반야바라밀행이라는 올바른 안목이 있을 때만이 열반의 언덕에 도달할 수가 있다. 이제 반야행자는 반야행이라는 분명한 안목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지혜의 눈이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다. 눈과 발 중 어느 한 가지만 없어도 열반이라는 청량지에는 도달할 수가 없다. 여기에서 반야바라밀의 안목을 따라서 목적지를 향해서 직접 걸음을 옮기는 발이 필요하게 된다. 소위 실행이 요구된다. 이 실행해 나가는 발을 경에서는 “오온(五蘊)은 모두가 공하였음을 분명히 본다.”고 설하고 있다.

(2)  오온(五蘊)
온(蘊)이란 산스크리트 말 스칸다 〈skandha〉의 뜻 번역으로 구역(舊譯)에서는 음(陰)으로 번역하였고 신역(新譯)에서는 온(蘊)으로 번역하여 〈쌓아 모음〉의 뜻으로 통용되고 있다.

오온(五蘊)이란 생물이다. 오온(五蘊)은 색온, 수온, 상온, 행온, 식온 (色蘊, 受蘊, 想蘊, 行蘊, 識薀)의 다섯 가지의 〈쌓아 모음〉이란 뜻이다. 색온은 물질, 수상행식온은 정신을 의미한다. 즉, 오온은 정신과 물질의 쌓아 모음이다. 정신과 물질이 쌓아 모인 것은 ‘나’와 인간은 물론 모든 생물과 자연이다.

 불교에서 넓은 의미에서 모든 것은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색온(色蘊)에도 설명을 하기 위하여 정신작용(受想行識)을 분리하지만 실제는 색온에도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정신작용이 내재하여 있다고 봐야한다. 이런 관점에서 오온은 우주의 모든 만물을 구성 요소적 입장에서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공(空)과의 관계는 이상의 오온이 인연으로 화합하여 이루어 졌으므로 인연이 다하면 흩어진다. 그러므로 ‘나’라는 실체는 없다. 이런 까닭에 오온은 현상그대로 공한 것이요 공한 것은 오온을 곧 조작하므로 공은 공거대로 오온이라고 한다.

 색온(色蘊)이란 물질이 쌓아 모아졌다는 뜻이다. 물질이란 먼저 우리들의 감각 기관도 물질로 구성되어 있고, 감각의 대상도 모두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 이 물질이란 어느 것이나 나고, 머물고, 쇠하고, 멸(生住異滅)하거나,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과정을 윤회한다. 죽거나 멸하면, 땅, 물, 불, 바람(地水火風=四大)의 기운으로 흩어져 버린다. 그러므로 끝없이 지수화풍 네 가지 성분을 보충해 주어야 한다. 매일 음식을 먹어야 하고, 물도 마셔야 하며, 온도도 맞추어야 하고, 호흡도 끝없이 계속해야만 한다. 이 조화가 깨어지면 갖가지 병이 들고 또 보충이 중단되면 곧 흩어져 버린다.

 그러므로 사대(四大)에 의지하지 않은 ‘나’를 감히 생각할 수 없으므로 불교에서는 ‘나’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고 본다.

색(色)은 산스크리트 어 루파(rūpa)의 번역으로 물질적 현상으로 존재하는 것을 말한다. 루파는 ‘모양을 만든다, 형성한다’는 의미를 지닌 rup에서 만들어진 말로 ‘형상적인 것’을 의미함과 함께 ‘파괴된다’는 뜻을 지닌 ru에서 만들어진 것이라 하여 ‘변화하는 것’이라는 뜻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색(色)은 형상과 색채를 포함한 일체의 형상적 존재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수온(受蘊)이란 우리들의 감각 기관이 어떤 대상과 접촉하였을 때 느끼는 정신작용이다. 본인의 감정에 순조롭게 느껴질 때 즐겁고, 거역할 때 괴롭게 느껴지고, 순조롭지도 거역하지도 않을 때 중간적인 무관(無關)한 느낌을 갖는다. 수온(受蘊)은 주로 이 세 가지 느낌으로 분류된다.

 우리는 한 순간에 죽고 싶도록 세상이 괴롭다고 느끼지만 다른 한 순간 이 세상이 눈물이 날 정도로 기쁘다고 느낀다. 이 양극사이에 하루에도 여러 번 왔다 갔다 한다. 어느 ‘나’를 나라고 할 수 있는가?  

 상온(想蘊)은 한 대상(對象)이 주는 느낌(受)을 분석하여 어떻게 할 까하는 생각을 여러 가지로 일어 키는 심성작용(心性作用)이다.

 이 또한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하는 생각이 매 순간마다 변하고 있어서 그 중 특정한 것을 지칭해 ‘나’라고 할 수 없다.

즉, 그 대상(사물이나 사람)의 상(相)을 심상(心上)에 떠올려서 앞으로 해야할 말이나 몸을 일으키는 원인으로 삼는 것이다. 구사론사(俱舍論四)에 「상(想)이라는 것은 대경(對境)에서 차별상을 취하는 것을 말한다.」고 하였고, 유식론삼(唯識論三)에 「상(想)은 대경(對境)에서 상(像)을 취하여 성(性)을 삼고 갖가지 이름을 붙여 업(業)을 삼는 것을 말한다.」라고 하였다. 즉, 어떤 개념을 붙이거나 어떤 모양을 떠올리는 작용이다.

 행온(行蘊)은 상온의 작용이 인이 되어 행동으로 옮기고자 하거나 지속화시키려는 일종의 의지작용이다(의지적 충동이나 행위를 말함).

 같은 것을 놓고도 느낌과 생각이 바뀜에 따라 의지 작용도, 말도, 행동도 바뀐다. 어느 행동의 ‘나’가 진짜 ‘나’인가?    

구사론 1에 의하면 색, 수, 상, 식온 이외의 모든 마음의 작용이 행온에 포함되므로 오온중 가장 광범위하다.    

 식온(識薀)은 눈 등의 여러 식(識)(眼識 등)은 경계에 대해서 요별(了別)하는 까닭에 식(識)이라고 부른다. 유식(唯識)은 팔식(八識)이 심왕(心王)이 된다. 심왕은 갖가지의 차별이 있는데 육입(六入)으로 들어오는 모든 경계를 인식하고 분별 정리하는 단계이다.

 우리들의 인식작용은 같은 대상에 대하여도 시간에 따라 변한다. 어떠한 인식작용을 가지고 ‘이것이 바로 나다’라고 할 수 가 없다.

(3)  개공(皆空)
 오온(五蘊)은 정신과 물질이 연이 되어 화합한 것의 작용이므로 오온은 중생의 다른 이름이다. 중생의 식온이 스스로 내적인  경계(물질과 정신)와 외적인 경계(물질)에 대한 변계소집성(遍界所執性)을 갖는다.

변계소집성(遍界所執性)이란 이기적인 망정(妄情)되어 주변의 모든 경계를 계탁하고 집착하는 성품이다.

계탁(計度)이란 의식의 작용으로 갖가지 사물(事物)을 이기심으로 헤아리고 재고 추측하는 사량(思量) 분별하는 것이다.

사량(思量)이란 사물을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이기심을 가지고 헤아려보고 이리 저리 생각해 보는 것이다.

모든 이기심을 초월한 초월적 지혜 광명으로 바라보면(照見) 중생은 다섯 가지 요소가 인연 따라 화합하여 집합(오온五蘊)된 것임을 알게 된다. 다섯 가지 요소의 끝임 없는 변화는 중생이 성(盛)하고 쇠(衰)함을 좌우하고 결국 연이 다하면 오온은 사대(四大)(흙, 물, 불, 바람기운)로 흩어지고 만다. 이 진리를 깨닫고 이기심을 멀리하고 이 진리를 긍정하는 성품을 의타기성(依他起性)이라고 한다.

의타기성(依他起性)이란 자기 혼자만으로는 날(生)수 없고, 반드시 다른 연(緣)을 의지하여 일어나는 물심(物心)의 모든 현상의 성질이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무자성(無自性)이라고도 한다.

무자성(無自性)은 스스로 독립해서 홀로 존재할 수 없는 성질이다.

나(我)는 내 혼자 존재할 수 없으므로 의타기성이고 무자성(無自性)이다. 무자성(無自性)인고로 내안에(內我) 있는 어느것 하나 내것이라고 주장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배 고프면 밥먹여 주어야지, 가려우면 긁어주어야지, 병나면 약 먹여 주어야지, 피곤하면 쉬어 주어야지, 죽기 싫어도 죽어야지. 만약 다른 연에 의지하지 않고 내 홀로 존재할 수 있다면, 이 법계를 주재할 수 있는 주재자가 될 수 있고, 감기 스톱하면 감기가 당장 나아야 할 것이지만 우리는 법계를 주재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감기 하나도 내마음대로 못하는 독자성이 없는 존재이다. 독자성이 없는 연고로 무아(無我)이고, 무아(無我)인 연고로 아공(我空)이다라고 이해하여 깨닫게 된다.

아무리 좋은 화장품으로 화장을 한다해도, 아무리 큰 다이아반지와 팔찌로 이 몸단장한다 해도, 아무리 좋은 고대광실(高臺廣室)안에 넓은 금색 침대에서 이 몸 쉬게 한다해도 무아(無我)인 자성(自性)을 면할 수는 없는 연고로 아공(我空)인 나의 실상(實相)을 하루 속히 인정하고  체달(體達)함만 못하다. 아공을 체달하면 고급 화장품, 다이야 반지, 고대광실, 금색 침대, 고급차(自動車), 애욕(愛慾) 등 내가 상대하는 모든 것은 별체(別體)가 없다. 혹 어떤 사람이 “나는 그런 것 죽어도 용서 못해”라고 하는 의지작용이 별체가 있다면 그 의지작용은 변할 수 없이 고정(固定)되는 것이다. 그러나 다행이 그러한 의지작용에 별체가 없으므로 과거에도 변하지 않았고 미래에도 변하지 않는 고정적인 것이 없다. 고정적인 것이 없으므로 결국 성(盛), 쇠(衰), 멸(滅)하여 지수화풍(地水火風)으로 돌아가게 되고 새로운 것이 생하게 된다. 이것을  무상이라고 한다. 무상(無常)한 것은 자성(自性)이 없고 자성이 없으므로 법공임을 알게 되고 체달하게 된다(法空).

우리 주체 의식(心과 法)이 객관현실을 매개하여 일어나고, 객관현실이 또한 주관 의식에 의해 알려지고, 주체 의식의 변화에 따라 객관현실 또한 변하고, 객관현실의 변화는 주체의식의 변화를 가져온다. 그런고로 아(我)도 법(法)도 공(空)하였고; 아(我)와 법(法) 혹은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은 상응성(相應性)을 가지고 있다. 때로는 사람들이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의 상응성(相應性)을 보지 못하여 주관 관념론적(觀念論的)인 편향에 떨어지거나(신의 창조론 혹은 기복신앙) 유물론적(唯物論的) 편향을 갖게 된다(물신론物神論, 물질만능주의, 공산주의).

  법마저 공한 줄 알 때 아공(我空)인고로 안으로 얻는 바가 없고 법공(法空)인고로 밖으로 구할 바 없게 되어(內無所得 外無所求) 안과 밖이 밝게 사무치게 되며(內外明徹), 법마저 공한 줄 알 때 인간주체는 걸림이 없는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존재로 주체적인 세계를 정립하게 된다.  그러므로 깊은 지혜로 아我와 법法이 모두 공한 줄 사무쳐 알 때 주체는 세계에 발붙이고 있되 세계의 질곡에 갇히지 않는 무애(無碍)한 창조적 주체로 될 것이고, 주체의 모든 행위는 세계와 역사를 토대로 하되 세계와 역사를 올바로 인간화하는 바라밀행으로 현전할 것이다.

개공(皆空):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을 증득하고, 한 층 더 나아가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의 경지에 올랐어도 올랐다는 생각조차 잊은 경지에 가면 개공(皆空)을 성취한 것이다. 개공(皆空)을 성취한 연고로 분별심이 없는 데서 생기는 무분별지(無分別智)가 소생한다. 이 무분별지(無分別智)는 이기적인 망정(妄情)으로 가려진 식(識薀)의 맑아지는 정도가 최상에 달하게 하여 원성실성(圓成實性)을 이루는 것이다. 실성(實性)은 후득지(後得智)이다.  

원성실성(圓成實性)이란 개공(皆空)[二空(我空 法空)과 無分別智]를 원만히 성취하여 모든 법의 진실한 체성을 들어내 보임을 뜻한다. 즉, 진여, 실상, 법계, 법성, 열반 등으로 표현되는 것을 증득한 것이다. 원성실성(圓成實性)은 대원경지(大圓鏡智)에 해당하고 대원경지의 하위는 평등성지(平等性智), 평등성지의 하위는 묘관찰지(妙觀察智), 묘관찰지의 하위는 성소작지(成所作智)이다. 즉,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을 하면 원성실성(圓成實性) 할 수 있는 안목(眼目)을 갖게 된다. 이 안목(眼目)은 천안(天眼) 혜안(慧眼) 법안(法眼) 불안(佛眼)을 증득하는 안목이다.

(4) 공(空)
 불교를 공부함에 있어 공(空)에 대한 개념이 바르게 잡혀 있어야한다. 경전에서 설명하고 있는 공(空)의 뜻을 간추려 본다.

① 현상의 본체를 공(空)으로 본다. 현재의 나는 본체인 공(空)의 작용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작용 이전의 나의 원래의 모습은 공(空)이고 이때의 공(空)을 진여, 본체, 실상, 열반, 해탈, 무장애(無障礙), 허공(虛空), 평등, 광대(廣大), 청정(淸淨), 부동(不動), 유(有)를 부정(不定)하는 뜻으로서의 공(空), 공(空)을 부정하는 뜻으로서의 공공(空空) 혹은 不空, 진공(眞空) 묘유(妙有)로서의 공(空) 등으로 묘사한다.

② 현상의 물질이나 애욕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눈앞에 전개되는 물질이나 애욕의 현실이 영원하다고 착각하여 공(空)한 근본을 모르기 때문에 일어 키는 환상(幻想)이다라고 공(空)도리를 설한다.

③ 공(空)은 자(自)와 타(他)에 걸림이 없으므로 공(空)의 본성인 지혜를 나툰다. 지혜는 자(自)와 타(他), 타(他)와 타(他), 즉 만법의 평등함을 깨닫게 하고, 만물의 평등성은 자비행의 인이 된다. 자비행은 평화의 인이 되고, 평화는 더 깊은 지혜와 복덕의 인이 된다.

④ 공(空)의 본성은 무엇에도 걸림이 없는 지혜이다. 지혜는 역사와 현실 앞에서 스스로 창조적 주체로 길러지는 인이 되고 창조적 주체는 자리(自利)와 이타(利他)의 무한한 공덕의 원천을 지혜로 삼는다. 지혜는 공(空) 혹은 불공(不空)에서 비롯된다.

『대품반야경』〈도수품〉제71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모든 것은 인연이 화합해서 생기는 까닭에 사물에는 제 성품[자성(自性)]이 없는 것이다. 만약 제 성품이 없다면 이것을 법이 없음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까닭에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일체 모든 것[일체법(一切法)]은 본성이 없다고 알아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일체 모든 것은 본성이 공한 때문이니, 이러한 까닭에 일체 모든 것은 본성이 없다고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대품반야경』〈삼가품〉제7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예를 들어 신체의 한 부분을 머리라고 하지만 이것 역시 이름만 있는 것처럼, 목덜미․어깨․팔․겨드랑이․넙적다리․종아리․발뒤꿈치도 전부가 여러 가지 요소가 모여서 된 것이어서, 이러한 부분 및 이름은 나는 것도 아니고 없어지는 것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세간의 이름을 가지고 그렇게 부를 뿐이니, 이 이름은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밖에 있는 것도 아니며, 중간에 있는 것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