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2.2 현실적 고찰

2007.03.01 01:34

여해 Views:8827

2. 현실적 고찰

왜 우리는 괴로움과 재액을 받게 되는가?
혹시, 우리는 나 자신을 너무 모르고, 내 남편 혹은 내 부인을 너무 모르고, 내 자식과 딸을 너무 모르고, 내 부모를 너무 모르고, 나의 신앙을 너무 모르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것들을 내가 모른다면, 나는 과연 나의 주변사항에 대하여 무엇을 알고 있을까? 내가 나와 나의 주변사항에 대하여 잘 모른다면 나를 방어하고 수호하고 옹호하여 줄 힘과 지혜가 어디에서 나올까? 나를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나의 재앙과 액난을 물리칠 힘과 지혜가 없다면, 부처님은 나를 어떻게 도와 주실까? 나는 괴로움과 재액(災厄)의 포로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특히, 지금 나의 처지가 괴롭고 비관스럽다면, 하늘 끝이 보이지 않는 벽안에 감금되어 있는 포로임이 증명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선상에서 생각하여 보는 것이 무리일까?

중국에 승조스님(僧肇: 383-414)이란 천재에 가까운 스님이 계셨다. 20세에 출가하여 여러 가지 저술도 남겼는데, 31세때 누명을 쓰고 사형을 당하게 되었다. 이때 7일 동안 형 집행을 연기 받아 옥중에서 보장론(寶藏論)을 썼을 정도로 대단한 분이시다. 그분이 사형 당할 때 이런 시를 남겼다.

사대(四大: 몸)란 원래에 주인이 없으며,
이 몸과 마음도 본래 빈 것이니,
시퍼런 칼날로 이 몸을 치는 것도
불어오는 봄바람을  베는 것과 다름없네.」

옛날부터 삶을 찾는 사람은 죽고 죽음을 각오하는 사람은 산다.

「관자재보살께서는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실천할 때에 몸과 정신작용이 모두 비어 있음을 밝게 비추어 보시고 모든 괴로움과 재액으로부터 자유로워졌던 것이다.」

“몸과 정신작용이 모두 비어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나는 지금 한 푼이라도 돈을 더 벌려고 바쁘게 뛰어 다닌다. 나는 이것만이 내가 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돈이란 없어서도 안되지만 돈으로서 나의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을까? 나의 자식 문제와 그리고 나의 부인 문제를 돈으로 모두 해결하였다고 그것이 해결되었다고 보면 크나큰 오산이요 착각이 아닐까? 내가 만약 오욕칠정(五慾七情)1)의 병에 걸려 있다면 나는 이미 무서운 마귀에 정복당하여 빨래통에  잠겨 있는 빨래가 비누 거품만 내 품고 있는 신세와 무엇이 다를까? 나는 정당한 것은 아무 것도 제대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이미 상실한 비인간적인 인간이 되어 버린 것이 아닐까? 이것은 비어 있어야할 몸과 정신작용 속이  오욕칠정(五慾七情)으로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는 자기 자신을 성찰하는 사람이 되어야하지 않을까. 자기 자신을 알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되어야하지 않을까. 자기자신 홀로만은 성립(成立)할 수 없는 존재임을 알고 수행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자기 자신 홀로 만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절실히 알고 행할 때 오욕칠정에서 영원히 멀어 질 수 있다. 이와 같이 될 때 “몸과 정신작용이 모두 비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나를 어떻게 하여 비어있다고 하는가?
 내 몸은 물질에 의지하여 성립되어 있으므로 물욕(物慾)이 있고 물욕에서 오는 오욕칠정이 있다. 내 몸을 그대로 두고 물욕을 나로부터 빼버린다고 생각하면 오욕칠정이 사라지고 내것이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 이런 연고로 내 몸은 비어 있다고 한 것이요, 나의 정신작용도 물질에 의지하여야 작용이 가능하므로 내 정신 홀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므로 정신 작용도 비어 있다고 한 것이다. ‘나’라는 이 존재의 성립과정을 보더라도 나는 내 홀로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아니요 홀로 땅에서 솟아난 것도 아니다. 부모의 은덕으로 낳아져서 길러져서 오늘이 있는 것이다. 내 홀로는 성립이 불가능하므로 내 홀로의 정신과 육체는 비어 있는 것이다.  나의 아내(妻)가 있고 혹은 남편이 있고 자식 딸이 있음으로 삶의 의욕과 활력이 가정에서부터 나온다. 이것은 나 혼자만에 의하여 나오는 생명력도 활력도 용기도 아니다. 이런 연고로 나 홀로는 빈깡통과 같이 비어 있는 것이 옳은 것이다. 이런 도리를 모르는 사람은 오욕칠정(五慾七情)으로 가득 채워져 있어 오욕칠정이 낙이고 행복이라고 착각하고 살아가는 불쌍한 사람들이다.

 이와 같이 나는 이웃으로부터 무한한 도움을 받아 이루어진 소중한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하고,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를 낳아주고 길러준 모든 연(緣)과 삶의 의욕과 동력을 주는 모든 인연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나를 사랑하고 이웃에 감사하기 위하여는,
 나를 알기 위한 꾸준한 정진과, 나의 가정의 중심을 이루는 부인 혹은 남편은 나와 하나라는 사유, 사상, 행동이 따르도록 세심한 주의와 노력이 있어야한다. 자식과 딸이 잘 자라고 있음에 감사하고, 좋은 친구를 만남에 감사하고, 잘 자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할 수 있음에 감사한다. 부모의 은덕에 감사하고 건강하고 편안히 사심에 감사한다. 형제에게 감사하고 스승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  이러한 마음 과 태도를 우리 불교에서는 공(空: 오욕칠정이 비어 있음)이라고 표현하고 무한한 신심과 정진으로 이루어진다. 마음속 깊이 확실히 이것을 알고 체험하여 얻은 신념이 이였을 때 앞에서 인용한 승조스님같이 죽음을 초월한 사람이 되고 또 관세음보살의 화현이 되어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 즉 모든 괴로움과 병고와 재앙과 액난이 접근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관세음보살의 화현이 되었음으로 다른 모든 사람들의 병고와 재액을 소멸하여 주기 위하여 보살행을 하는 것이고, 보살행을 통하여 우리는 성불하는 것이다.

 우리들의 현실 생활문제는 괴로움과 고독, 스트레스와 병고, 슬픔과 자학(自虐), 청소년문제, 노인문제 등이다. 이들은 주로 가정의〈부부의 문제〉에서 비롯된다.

 부부는 일심동체(一心同體)라고 하지만 결코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상대방이 관세음보살과 같은 존재이기를 바란다. 모든 면에서 완벽하길 바란다는 얘기이다.

 남편은 아내에게서 많은 것을 바란다. 살림도 잘해야 하고, 외모도 아름다워야 하며, 타인들 앞에서 정숙해야 하며, 그러면서도 재치있어야 하고, 나야 어떻든 복종해야 하며, 잠자리에서도 훌륭해야 한다. 그리고 내 하는 일에 간섭하지 않아야 한다.

어느 부인에게 남편이 하는 말이, “우아하고 그윽한 아내를 원했는데 당신은 툭툭 튀고 거칠고 목소리 큰 여자가 되었으니 내 그것이 안타깝소”라고 했다. 이 소리를 듣는 순간 부인은 어찌나 서럽고 억울하고 자기가 가엾은지 목놓아 울었다. 이제 나이 60이 다 되었으니 고쳐 살수도 없고 무를 수도 없고 내가 천하고 추하게 늙었다면 그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가고 억울한 생각이 들어 몇 날 며칠 가슴이 납덩이 되고 목이 꽉 막혀 끙끙 앓고 누었다고 한다.

아내도 마찬가지로 많은 것을 남편에게서 요구한다.

돈 잘 벌어와야 하고, 집에 들어오면 자상하여야 하고, 형제간이라도 손해보는 일 하지 말며, 직장에서는 비굴하지 말 것이며(그러면서도 사표제출은 안됨), 아내가 원하는 것은 우선적으로 들어주고, 같이 외출할 때는 남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신체도 항상 젊음을 유지해야 하며, 절대 완력을 쓰지 말고, 밤에도 만족시켜 주어야 한다.

 세상에 이런 남편, 이런 아내가 어디에 있는가? 그 어느 누구도 이렇게 될 수는 없지 않을까?

「자기 스스로가 완벽하다고 생각하고 또 완벽한 여자라야 결혼하겠다는 총각이 있었다.  온 집안 식구와 친구까지 총 동원되어 신부 감을 찾아 나섰다.  이런 처녀면 되겠지 하여 수많은 맞선을 주선했으나 그 때마다 총각은 퇴짜를 놓았다.  그러던 어느 날 총각은 드디어 마음에 흡족한 처녀를 만났고 데이트까지 하게 되었다. 데이트를 한 후 총각은 쾌재를 불렀다. 그런데 그 다음날 처녀 쪽에서 퇴짜를 놓았다. 왜냐하면 이 처녀가 완벽한 남자를 찾고 있었기 때문 이다.」

사랑을 하면 눈이 먼다고 했던가.
 사랑하기 때문에 눈이 멀어져 모든 것이 한없이 좋아 보여 결혼을 했다. 아들 딸 낳아 길러 가는 사이에 나도 몰래 점차 흠집이 보이게 되고, 남편은 아내가 메주덩어리도 이것보다 예쁘지 않겠나고 생각이 들 때도 있고, 부인도 남편보다 옆집 콩이 더 굵어 보일 때도 생기게 된다. 항상 상대방이 완벽해지길 원하지만 그 욕구는 결코 만족되지 않는다. 그러니 불만이 쌓이게 되고 부부싸움이 끊이지 않게 된다. (사람들은 그 재미로 산다고들 한다). 그런데 증상이 점차 심해지면 간혹(?) 남남으로 갈라서게도 된다.  그러면서 이제는 자식들 쟁탈전이 벌어진다.  구경 삼아 가정법원을 견학해 보면 그 전쟁을 목격할 수 있다.

 어떻게 하면 완벽한 상대자가 될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스스로가 그렇게 완벽한 상대가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이미 그런 결론에 도달했다면, 빨리 방향을 바꾸어야한다. 내가 완벽한 존재가 아닌 만큼 상대방의 단점을 이해하고 감싸주는 것이 중요하다. 나에게 불가능한 일은 상대방에게도 불가능한 것이다.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를 보라. 한 쪽이 튀어나온 것이라면 다른 쪽은 움푹 파여 있다. 이 상황이 서로 교환되면서 톱니바퀴는 마찰 없이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부부생활이 계속 되기 위해서는 바로 두 개의 톱니바퀴처럼 되어야 한다. 물론 두 사람이 지혜롭게 깨달음에 도달하고 관자재보살처럼 된다면 그것이 가장 좋은 것이다.

 우리에게는 철두철미하게 우리들 자신을 성찰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자기 혼자는 정신이고 육체고 완전히 비어있음을 체험을 통하여 실감하여야 한다. 그리고 이 비어있는 통은 한쪽이 상대방 쪽의 통을 채워줌으로서 자기 쪽의 통은 저절로 채워지는 관계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사업의 의욕과 그 의욕을 받쳐주는 동력과 지혜는 나의 상대인 내 남편 혹은 내 부인의 욕구 불만을 충족시켜 줌으로서 나의 욕구가 충족되는 관계임을 알아야한다.

나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하여 또는 편의를 위하여 상대가 있는 것 같은 착각과 실수를 하기 쉽다. 이렇게 실수하면 그 부인은 “나를 무엇으로 취급하느냐? 여기가 하숙집인줄 아느냐?, 다방인줄 아느냐? 세탁소인줄 아느냐? 욕망이나 충족시켜 주는 도구인줄 아느냐? 아기나 보는 탁아소인줄 아느냐? 청소부인줄 아느냐? 밤늦게 문이나 열어주는 시녀인줄 아느냐? 등 할 말과 괴로움은 너무나 많아진다. 남편은 나를 돈 벌어오는 기계로 취급하느냐? 나를 의심하느냐? 남자를 무엇으로 취급하느냐? 너의 잠자리나 봐주는 사람인줄 아느냐? 그것도 모르는 멍청이가, 하루종일 집에서 무엇을 했느냐? 등 할 말과 분통은 너무나 커진다.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우리는 누구도 홀로 존재할 수 없는 실상(實相)임을 다시 한번 잘 이해하여 주기 바란다. 위와 같이 괴롭고 불행한 현상은 혼자서 존재할 수 있는 양 자기 중심적인 이기주의에 빠져 자기의 상대는 자기 욕구를 충족시켜주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하여 오욕칠정(五慾七情)의 늪에서 헤매고 있거나 아니면 부부의 관계를 잘못 알고 있는 소치이다. 우리는 항상 스스로를 성찰하는 마음과 자세를 가져야 겠다.

 남편은 부인의 필요를 만족시켜줌으로서 부인으로부터 남편의 필요를 만족하게 되는 것이요, 부인도 남편의 필요를 만족시켜줌으로서 남편으로부터 부인의 요구가  만족을 구하게 되는 것이다. 부인을 사랑함으로서 남편은 자기의 사랑의 욕구를 부인으로부터 만족시키게 되는 것이다. 남편을 존경함으로서 부인은 남편으로부터 자기가 무시당하고 있다는 느낌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랑을 받게 되는 것이다. 부인의 약점과 허점을 묻어 주고 감싸줌으로서, 남편의 약점과 허점이 부인에게 오히려 강하고 실속있게 보여지는 것이다. 서로가 약해지면 가여워 더 강하게 사랑하고파지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 불교의 공(空)의 사상 혹은 무아(無我)사상을 바르게 이해하여 실생활에 응용 할 때 무한한 삶의 지혜와 생명력을 소생하고 또 분출시켜, 감히 상상하지 못한 행복의 경지에 이른다. 부부의 화목과 가정의 평화는 사회의 안전과 국가와 인류 그리고 모든 중생의 평화의 요람(搖籃)이다. 마치 작은 돌 하나가 연못 전체에 파장을 일어 키는 것과 같이 한 가정의 평화는 모든 가정의 평화에 시발이 될 수 있다. 반대로, 한 가정의 불행은 모든 가정의 불행의 시발도 될 수 있다.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도 그러하고, 이웃끼리의 관계도 그러하며, 사회의 문제도 또한 그러하다.

 우리는 관세음보살의 비어있는 마음을 다시 관찰하며 우리는 지혜로서 나 자신을 알기 위하여 정진하자. 이 정진은 부처님을 믿는 믿음과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시작하자.

 1996 여름 방학 때 대만 영암산사에서 일박하고 산사에서 아침공양을 하였다. 공양은 서로 마주보고 먹도록 준비된 테이블 이였다. 아침 공양 전에 주지스님(중국스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기억난다:

주지스님:
여러분, 여러분이 어제 대만에 도착하셔서 오늘 아침 매우 시장하다고 가정하여 봅시다. 그리고 지금 이 식탁위에는 숟가락은 없고, 젓가락이 있는데 그것은 두자(二尺)정도 깁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공양을 드시겠습니까?

불교를 배우지 못한 사람들은 자기 앞에 있는 맛 있게 보이는 반찬을 옆에 사람이 먹기 전에 자기가 먼저 먹으려고 급하게 서둔다. 그러나 젓가락이 긴 탓으로 실로 자기 입에 들어가는 반찬이나 밥은 얼마 안된다. 젓가락 탓을 하며 열이나 신경질을 부리며 온갖 욕을 다하며 자리를 박차고 나간다. 결국 자기 배만 고프고 골치만 아플 것이다.

그러나 오늘 아침 여기 계시는 스님들이나 불법을 만난 불자들은 지혜가 있고 자비심이 있어 자기 앞에 계시는 분이 배가 고프시겠다고 여겨 긴 젓가락으로 음식을 집어 앞 사람을 먹이니 서로 교대하여 가며 이것을 드릴까요 저것을 드릴까요 물어보며 재미있게 담소하며 맛있게 기분 좋게 음식을 모두 나누어 먹었다. 이것을 불교의 지혜와 자비라고 한다.

부부의 관계도 이와 같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