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오온(五蘊)과 공(空)과의 관계

 불교를 공부함에 있어 공(空)에 대한 개념이 바르게 잡혀 있어야한다. 경전에서 설명하고 있는 공(空)의 뜻을 간추려 본다.

① ‘현상(오온) 안에 공한 뜻이 있으므로 모든 존재가 생성될 수 있다.’ 즉, 현상의 존재에는 불변의 실체성이 없으므로 연기적 자립성이 있다. 이런 연고를 공은 자기를 죽여 색을 이룬다고 한다[廢己成他義].

 현상의 본체는 공(空)이요, 공(空)이 작용하여 구체화 된 것이 현상이다.

 현상(오온)의 본체를 공으로 본다함은 현상을 어떤 원인의 결과라고 볼 때, 원인을 공으로 보는 것이다. 결과와 원인, 결과 속에 원인이 있고, 원인 속에 결과가 있는 것이다. 즉, 라디오를 켜 한 채널의 방송을 들을 때(현상), 그 방송의 전파가 이곳까지 미치고 있음(空)을 아는 것이다. 방송이 되고 있을 때, 라디오 속에 전파가 있고 전파 속에 라디오가 있는 것이다.

 라디오 자체의 생성적인 의미에서 볼 때도 분해하면 더 이상 라디오가 아니므로 라디오는 분해 될 수 있는 공성을 가지고 있었고, 그 공성을 조립하면 라디오이다. 그러므로 라디오 속에 공성이 있고 라디오 자료의 공성에 의하여 라디오가 있는 것이다.

 얼음은 현상이다. 그러나 얼음이 녹으면 그 본체인 물이 된다. 녹은 얼음은 더 이상 얼음이 아니므로 공이다. 얼음의 녹는 성질이 곧 공이므로 얼음을 죽여 물을 이룬다. 얼음 속에 물이 있고 물 속에 얼음이 될 수 있는 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제 물이 현상이라고 볼 때, 물이 열을 받아 증발하면 증발한 수증기는 물이 아니다. 그러므로 물은 공하였다. 물의 증발되는 성질이 공인 고로 물을 죽여 증기가 되는 것이다. 물 속에 증기가 있고 증기 속에 물이 있다.

 이것은 모든 과학의 원리와 이 원리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을 때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있는 지혜가 생긴다.

② 물질에 대한 집착에 의하여 존재한다고 착각하는 것이므로 착각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색을 없애고 공을 드러낸다[泯他顯己義].

 현상의 물질이나 애욕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눈앞에 전개되는 물질이나 애욕의 현실이 영원하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아무리 돈 좋아하고 술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피곤기가 심하여 병원에가 진찰 받아 보니 간암이라고 한다. 이 순간 그는 사형선고를 받은 죄수와 다를 바 있을까. 그 순간 그가 백만 장자라도 염라대왕의 친구라도 무슨 소용이 있을까? 더 이상 술맛이 날까? 그 동안에 마누라 자식들 속 태운 것 후회한들 무슨 소용 있을까? 그 간암을 몇 천억(환자가 가지고 있는 전 재산全財産)을 쓰면 낫을 수 있다고 하여도 돈이 아까워 차라리 죽는 한이 있어도 돈을 쓰지 않겠다고 돈에 집착하는 사람이 있을까? 이것이 개인주의적 이기주의는 착각이라는 것을 교훈 하는 물욕에 대한 공(空)의 도리이다.

 처녀 때는 늘씬했던 몸매도 애욕에 집착하여 많은 남자와 접촉하다보면 번뇌 망상으로 괴로움과 고통은 물론이지만 몹쓸 병에 걸리기 쉽고 얼굴과 몸매도 많이 변한다. 그래서 목욕탕 거울 앞에 서면 「이럴 수가 있을까」 하고 좌절감에 빠진다. 옆에 있는 처녀를 부러워한들 이미 공해 버린 과거이다. 다시 돌릴 수 없다. 이것이 쾌락주의자에게 주는 공 도리의 교훈이다.

그러므로 오늘을 귀중하게 공(空)의 도리를 공부하여 사(邪)된 것을 멀리하고 항상 건강하게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개발하여 생활에 크게 도움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③ 오온에 실체성이 없음을 공이라고 하나 이 공성은 동시에 색의 연기적 자립성이다. 그러므로 참된 공이란 자기와 색을 모두 존립시키는 뜻[自他俱存義]이다. 곧 공과 색이 서로 걸리지 않으므로 공과 색이 함께 존립하는 것이다. 공과 색이 서로 걸리지 않기 위해서는 평등성을 이해하는 지혜를 요한다.

 공(空)은 자(自)와 타(他)에 걸림이 없으므로 공(空)의 본성인 지혜를 나툰다. 지혜는 자(自)와 타(他), 타(他)와 타(他), 즉 만법의 평등함을 깨닫게 하고, 만물의 평등성은 자비행의 인이 된다. 자비행은 평화의 인이 되고, 평화는 더 깊은 지혜와 복덕의 인이 된다.

 인공위성은 어디에 있는가? 어느 것에도 걸림 없는 공(空)에 있지 않는가? 공(空)은 바로 이와 같은 작용과 역할을 할 수 있는 본질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인공위성은 지혜로서 만들어 졌으므로 지혜를 본체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이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인공위성을 만든 지혜가 어느 특정인에게 독점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주어져 있는 지혜라는 것이다. 마치 인공위성에서 발사하고 있는 전파는 누구나 그 기능을 가지고 있는 자에게는 평등하게 수신이 가능한 것과 같다.  여기에 가능은 우리들의 노력 여하에 따른 지혜의 정도인 것이다.

 인공위성은 인간이 창조한 것이지만 지구와 달, 그리고 은하계의 모든 별들 자연이 창조한 허공에 떠 있는 신비한 물체이다. 아무 것에도 막힘이 없다.

 공(空)이 걸림이 없어야 하듯이 우리들의 마음도 공(空)과 같이 걸림이 없어야 한다. 그러므로 변화 무상함이 허용되는 것이고 또 그것이 자연의 이치이다. 그러나 불자중에 어떤 사람이 관세음보살 염불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걸림이 있는 것이다. 걸림이 있는 것은 막힘이 있어 통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마음이 막히어 있는 것이며, 마음이 막혀 있으면 호흡의 흐름, 피의 흐름, 기의 흐름이 모두 막혀 결국 병의 원인이 된다. 우리 불자들은 염불(관세음보살, 지장보살, 화엄성중, 혹은 석가모니불 정근)을 통하여 마음의 막힘을 뚫고 호흡의 흐름, 피의 흐름, 기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유지하여야 한다. 이것이 나와 남이 함께 사는 길이다.  

④ 색을 착각하여 집착을 일으킴으로 그 존재를 부정한다. 색을 부정하면 공이 남는다. 이 공에 대하여는 허무주의에 빠지게되므로 이 공도 부정한다. 즉, 참된 공은 색과 공을 동시에 부정하는 뜻[自他俱泯義]이다. 색과 공의 대립적 모순을 부정하여 끊어버리고 서로 걸림 없고, 참된 공을 숨기고 드러냄이 자유로워서(眞空妙有) 서로 합하여 중도의 한 맛을 이루고 서로 뚜렷이 통해서 의지할 것이 없으니, 이것이 바로 『반야심경』이 보여주는 법이다.  

 진공묘유의 공(空)의 본성은 무엇에도 걸림이 없는 지혜이다. 지혜는 역사와 현실 앞에서 스스로 창조적 주체로 길어지는 인(因)이 되고 창조적 주체는 자리(自利)와 이타(利他)의 무한한 공덕의 원천을 지혜로 삼는다. 이 지혜는 불공(不空)에서 비롯된다.

 지금 급속도로 발달되고 있는 첨단 과학 기술들을 생각하여 보자. 창조적 주체는 초월적 예지의 소유자이다. 부처님은 우리들에게 여기에 도달하는(바라미타) 방법을 구구 절절하게 가르쳐 주셨다. 《반야심경》이 바로 그 가르침의 요약이다.

 한가지 주의 할 점은 현재 과학 문명은 이기적(利己的) 경향으로 말미암아 인류사회와 지구상에 많은 문제를 가져오게 하였다. 부처님의 제자들은 한층 더 높은 지혜로서 자리(自利)와 이타(利他)를 쌍수(雙修)로 하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