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각사 보각국사비(麟角寺 普覺國師碑)

 

한국고대사라는 학문에 미쳐 방학기간뿐만 아니라 주말에 평일까지 이용하면서 유적지 곳곳을 찾아 답사하던 대학시절 때의 일이다. 보통 답사기간 동안에 숙박은 가장 싼 여관방에서 해결하곤 했다. 하지만 때때로 대학교 간판을 내세우거나, 또는 학과의 유명한 교수님 존함을 팔아서 스님들께 자비로운 숙박(?)공양을 얻어내기도 하였다. 한국에서 불교대학에 다닌다는 점은 가끔 이런 혜택도 누릴 수 있게 하였다.

한번은 경상북도 군위군에 있는 인각사에서 여장을 풀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7에 의하면, 이 절 이름의 유래를 인각사 입구에 바위 벼랑이 우뚝한데, 속세에 전해 오기를 기린이 이 벼랑에 뿔을 걸었으므로 인각사라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절 서쪽 산자락에 828미터 높이의 화산이 우뚝이 자리잡고 있다. 우리가 인각사로 답사를 간 까닭은 이 절이 신라 선덕여왕 11(642)에 의상대사에 의해 창건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무엇보다도 이곳에 유명한 보각국사비와 그의 부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 지금의 가물가물한 기억에 남은 것은 그 당시 인각사에서 보았던 이 비가 아니라, 우습게도 그 날 별똥별 떨어지던 야밤에 답사의 하이라이트랄 수 있는 깡소주에 새우깡을 절 앞 도로길에서 몰래 들이켰다는 것뿐이다. (당시 스님들께 죄송할 따름이지만, 여하튼 그 혈기왕성했던 20대 초반에 누구든 무모한 짓들을 많이 했으리라 믿고 이해해주십사 한다.) 그러나 그 답사의 본 목적이 한국고대사를 연구하는 데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역사서 『삼국유사(三國遺事)』와 관련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이 인각사의 보각국사비는 일연스님(一然, 1206~1289)의 공덕을 높이 찬양하기 위해, 그의 제자인 운문사 주지 청분 스님이 스승 입적 후 6년 뒤인 1295 8월에 세웠다. 현재 보물 428호로 지정된 이 비는 높이 181cm, 106cm의 담흑색 수성암으로 만들어졌는데, 당시 고려 충렬왕은 중신 민지(閔漬)에게 비문을 짓게 하였고, 그 글씨를 제자인 죽허 스님에게 명하여 중국 역사상 최고의 달필이라 일컬어지는 왕희지(王羲之)의 글씨로 집자(集字)하게 하였다. 허나 보각국사비가 세워지는 데에 6년이나 지체된 것은 이 비문을 지은 민지가 자신의 낮은 학식으로는 도저히 한 생을 빛낸 어른의 덕을 찬양하기에 부족하다면서 비문의 작성을 미룬 탓도 있지만, 그가 지혜의 태양이 황혼에 들려는 것을 다시 돌리어 신령한 빛을 발하여 우리나라에 빛낸 이는 오직 우리의 국존(國尊)일 뿐이다라고 했듯이, 일연스님이 당대에 미친 영향에 보답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정성을 다해 이 비를 만들려고 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일연스님은 학문연구에 매우 용맹정진하여 불교뿐만 아니라 유교 및 여러 학문에도 정통했던 것 같다. 비문에 의하면 선의 기쁨을 수행하는 여가 시간에 대장경을 재차 읽고 여러 대가의 장소(章疏)를 깊이 연구하였으며, 한편 유가(儒家)의 경서를 섭렵하였고, 아울러 백가(百家)에 관통하였다. 이에 의하여 방편에 따라 사물을 이롭게 하고, 종횡으로 묘용(妙用)을 발휘한지 무릇 50년간 법도(法道)의 우두머리로 불렸다고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비문에는 일연스님이 생애에 쓴 많은 저서들이 새겨져 있다. 저술한 것으로 『어록(語錄) 2, 『게송잡저(偈頌雜著) 3권이 있고, 편수한 것으로 『중편조동오위(重編曹洞五位)2, 『조파도(祖派圖) 2, 『대장수지록(大藏須知錄) 3, 『제승법수(諸乘法數) 7, 『조정사원(祖庭事苑) 30, 『선문염송사원(禪門拈頌事苑)30권 등 모두 100여권에 이른다.

그런데 스님의 저서를 나열한 이 비의 부분에는 『삼국유사』가 없다. 일연스님의 업적을 널리 알리기 위해 고심해서 세워진 이 보각국사비문에 우리가 아는 스님의 대표작으로 여겨지는 『삼국유사』는 왜 없는 것일까?

장효정(12/12/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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