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각국사비의 수난
『삼국유사』에 대해서 쓰기로 결정한 뒤, 나는 집에 있는 모든 책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우선 관련된 자료들을 확보하여 『삼국유사』에 대한 막연한 내 지식을 충족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집에 가지고 있는 책들에서 얼마나 찾을 수 있을까 의심부터 하면서, 현재 어느 대학의 도서관도 사용할 수 없는 내 처지를 아쉬워하기만 하였다. 하지만 지금은 옆에 놀라울 정도로 꽤 많은 자료들을 차곡차곡 쌓아 놓고 있다. 전에 “읽지도 않는 책들을 집에 쌓아만 논다”고 어머니께 받던 구박(?)에 대한 보답을 받는 듯하다. 물론 그 중 어머니께서 최근까지 미국으로 공수해주신 최신 자료들도 몇몇 포함되어 있다.
그 가운데 특별히 보각국사비를 복원한 탁본 자료(박영돈, 「부록: 인각사 보각국사비 복원가묵본」, 『불교미술』 16집, 동국대 박물관, 2000년)는 나를 매우 놀라게 하였다. 그 이유는 첫째 ‘내가 이런 자료도 가지고 있었구나’라는 우스운 점도 있었지만, 둘째 보각국사비에 새겨진 왕희지 필체의 아름다움이었으며, 셋째 이 필체를 하나씩 수집하여 약 4천자나 되는 비문을 완성한 일연스님을 향한 그 제자들의 정성에 대한 것이었다. 사실 원하는 글자를 찾아 일일이 나열하는 것도 매우 어려울 뿐 더러, 정자체도 아닌 필자체까지 그 돌에 획을 살리면서 조각해야 하는 이 비문의 제작 과정, 그 자체가 제자 스님들의 큰 인내심을 요구하는 하나의 수행이 아니었나 생각되는 것은 나 뿐만일까?
허나 13세기 불교계를 주름잡았던 일연스님의 이 비는 대부분이 파손되어 극히 일부만 남아 있다. 그 모든 원인은 비문을 왕희지의 명필로 집자한 데에 있다. 조선 후기 기록인 허형도(許亨道; 1567~1637)의 『동계집(東溪集)』에는 정유재란(1597) 때 절이 불타면서 이 비가 파손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미 임진왜란(1592) 때부터 명나라 사람들이 왕희지 글씨를 얻기 위해, 이 유명해진 비의 탁본을 수도 없이 요구하였고, 손상된 이후에도 그 청탁이 끊이질 않았다고 한다. 어떤 기록에는 왜구들이 좀 더 편하게 탁본하기 위해 그 비석을 땅에 넘어뜨렸다가 실수로 뜨거운 불바닥 위로 떨어져 조각나기 시작하였다고도 하며(『범우고(梵宇考)』), 또 이 비의 글자를 갈아 마시면 반드시 과거에 급제한다는 헛소문을 믿은 조선 선비들이 더욱 손상시켰다고도 한다.
한편 국내외로 끊이지 않는 탁본 주문에 시달린 승려들이 일부러 비를 깨뜨려 절 밑에 감추었다고 추측하기도 한 홍양호(洪良浩, 1724~1802)의 『이계집(耳溪集)』에는 이 비문의 필체를 다음과 같이 아주 잘 표현하고 있어 여기에 옮겨본다. “글씨의 점이나 획이 완전한 것은 아름답고 영롱한 빛깔이 펄펄 뛰어 마치 움직이는 듯 영화풍(永和風)이 완연하니 신묘하고 기이한 일이다.” 현재 보각국사비의 남아 있는 부분은 높이 122cm, 폭 105cm, 두께 18cm 정도라 한다. 하지만 2006년에 인각사에서는 일연스님의 탄생 800주년을 기념하여 이 비문을 재복원하였다니 그나마 다행일 뿐이다.(www.ingaksa.org)
일연스님에 대한 연구의 시작은 대부분 이 보각국사비문에 대한 해석에서부터 시작한다. 따라서 지금까지 2편을 할애하여 보각국사비에 대해 써보았다. 하지만 여기서 강조하고자 한 것은 무엇보다도 왜 『삼국유사』가 이 비문에 새겨져 있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궁금하실 줄로 알지만, 이에 대한 답은 일연스님의 행적을 쓰고 난 다음에 밝히고자 한다. 그래야만 그 답이 더 뚜렷하게 보일 것 같기 때문이며, 어찌 보면 내가 아직 더 읽고 정리해야 할 시간을 벌기 위함이라 하면 너무 속보이는 말일까?
장효정(12/24/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