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법연화경 제4권

제9 수학무학인기품(授學無學人記品)

부처님의 십대(十大) 제자 중 다문(多聞) 제일 아난과 부처님의 아들이고 밀행(密行)제일 라후라가 수기를 받는다. 그리고 학무학(學無學)이라 함은 글자대로 해석하면 배우는 사람과 배우지 않는 사람이다. 불교에서 무학(無學)이라 함은 공부를 다 하여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 이를 지칭하는데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한 사람이다. 그러하니, 이 품의 뜻은 아라한과를 증득한 사람이나 아직 증득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수기를 주시는 품이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너는 오는 세상에 반드시 성불하리니, 그 이름은 산해혜자재통왕여래(山海慧自在通王如來), 응공, 정변지, 명행족, 선서, 세간해, 무상사, 조어장부, 천인사, 불세존이리라”고 하시고,
라후라에게는 도칠보화(蹈七寶華)여래, 응공, 정변지, 명행족, 선서, 세간해, 무상사, 조어장부, 천인사, 불세존이라 하리라고 수기하셨다.
그리고 세존께서는 아직 배우는 이와 다 배운 이 2천인이 그 뜻이 부드럽고 고요하고 청정하여 한결같은 마음으로 부처님 우러러 봄을 보시고 아난에게 “이 많은 사람들은 반드시 50세계의 티끌 수(미진수(微塵數))만큼 많은 여러 부처님 여래를 공양하고 공경하고 존중하며 법장을 받들어 가지다가 끝내 한꺼번에 시방국토에서 각각 성불하리라, 그때 이름은 모두 한 가지로 보상(寶相)여래, 응공, 정변지, 명행족, 선서, 세간해, 무상사, 조어장부, 천인사, 불세존이리라”고 하셨다.
이 품에서는 수기를 받는 조건으로 아직 아라한과를 증득하지 못하였다고 하더라도 오랫동안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 지니고 행하려고 노력하며, 부처님께 깊이 귀의하여 일심으로 부처님을 공경하고 공양하는 것이다.
그리고 수기를 받은 후에 육십 이억의 많은 부처님께 공양하고 그 부처님의 가르치심을 후세에 전하는데 노력하면 부처님과 같은 지혜를 갖추게 되고 필경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 성불하게 된다고 하셨다.
지금 배우고 있거나 이미 공부를 마친 2,000명의 제자에게 모두 수기하셨다는 부처님의 뜻을 어떻게 해석하여야 할 것인가?
‘지금 배우고 있는 부처님의 제자’는 이미 부처님의 문중에 들어온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일단 부처님의 문중에 들어온 중생이면 잘나고 못나고 아름답고 추하고 부지런하고 게으르고 하는 차별 없이 누구나 다생 겁을 통하여 여러 부처님을 공양하고 존중하며 법장(法藏 경전)을 받들어 가지는 사람은 결국에는 모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 부처가 된다고 하는 확신을 우리들에게 심어준다.
여기에서 불법(佛法)의 보편성, 평등성, 절대성을 엿볼 수 있다. ‘중생 누구에게나’라는 의미에서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적용된다는 불법(佛法) 보편성(普遍性)을 볼 수 있다. 누구나 ‘성불할 수 있는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다’는 말씀에서 불법(佛法)의 평등성(平等性)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한 사람에게 이와 같은 보편성과 평등성을 가지고 있지만 ‘누구나 다생 겁을 통하여 부처님께 귀의하여 여러 부처님을 공양하고 공경하고 존중하며 법장을 받들어 가진 사람은 절대적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 한 국토에서 부처가 되어 중생을 교화할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절대로 부처가 되지 못한다는 양면의 절대성(絶對性)이다. 우리는 우리들 각자의 생명에 유한한 육신의 생명과 육신을 만들어 내기도 하고 멸하게 하기도 하는 무변하면서도 영원한 생명의 주인공이 있음을 똑똑히 알아야 한다. 인류 역사의 태초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종교의 유무를 막론하고 죽음 앞에선 숙연하여 지며 누구나 죽은 자의 명복을 비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가는 곳이 있기 때문이며 가는 곳이 있으므로 오는 것이요 오는 곳이 있으므로 가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들의 고귀한 생명의 순환이요 윤회라고 이름 지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각자의 영원한 생명 앞에서 우리 스스로의 육신과 마음을 괴롭히는 그 어떤 것을 반성하여 찾아내야할 숙명적인 책임이 있다. 이 책임을 자각하는 것에서부터 불법(佛法)을 바로 보는 우리의 생명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