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화경]제목 해석

2007.10.26 2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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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해석

법(法)을 연화(蓮華)에 비유하여 묘함을 나타내시었다. 연꽃이 피자 곧 열매가 열리고, 더러움에 처하여도 깨끗함이 있으니 묘한 법이다. 이른바 일승(一乘)이란 성문(聲聞), 연각(緣覺), 보살(菩薩) 셋을 여의고 일승을 설한 것이 아니라, 셋을 다 모아서 하나로 돌아가게 하신 것이니, 추(麤)함을 버리고 정(精)함을 취한 것이 아니라 추함에 즉(卽)하여 정을 나타내심은 연(蓮) 꽃이 더러운 곳에 즉하여 깨끗함이 있는 것과 같다. 셋을 모아 하나로 돌아가게 하심은, 연꽃이 필 때부터 열매가 열리는 것에 비유하신 것이다. 이는 명상(名相)과 실상(實相)이 아울러 나타나는 연고로 이름하여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이라 하셨다.
법(法)을 증(證)할 자는 반드시 본래의 지혜로써 체(體)를 삼고, 묘(妙)한 행(行)으로 용(用)을 삼는다. 지혜를 비유한 것이 곧 연꽃이요 행(行)을 비유한 것이 곧 꽃의 열매이니 지혜와 행이 다 같이 온전함으로 묘함이 있다.    
혜조스님의 “우리말 법화삼부경” (운주사, 2006년, p12)에 의하면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은 기원전 1세기경에 인도의 서북 지역에서 부처님의 사리탑을 중심으로 신앙하던 대승불교 교단에 의해 성립되어,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에 전해졌다고 했다.
중국에 전해진 법화경은 서진(西晉) 사문(沙門) 축법호(竺法護)스님이 서기286년에 처음으로 한역(漢譯)할 때 『정법화경(正法華經)』이라고 번역하였고, 406년에 중국 후진(後秦) 홍시(弘始) 삼장(三藏) 법사(法師) 구자(龜玆) 사문(沙門) 구마라집(鳩滅什)이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이라고 번역하였다. 그 외 다수의 번역 품이 있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구마라집 번역의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많이 사용하는 편이다.
우리나라 고구려에 『법화경』이 전래되었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일본의 고승전(高僧傳) 성덕태자(聖德太子) 전(傳)에 의하면 고구려 고승(高僧) 혜자(慧慈)스님은 성덕태자의 스승이었다. 혜자스님은 일본 추고(推古) 3년(고구려 영양왕(嬰陽王) 6년, 서기 595) 5월에 일본으로 건너와 23년(영양왕 26년, 615)에 본국으로 돌아갔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으로 당시 고구려에 법화경이 전파되어 일본에까지 알려져서 혜자스님이 일본에 초청되어 왕사로 성덕태자를 가르쳤다고 추리할 수 있다. 백제와 관련된 문헌으로는 중국 송고승전(宋高僧傳)에 해동(海東) 웅주(熊州) 사람인 석현광(釋玄光)이 중국에 와 진(陳)나라의 남악(南岳) 혜사(慧思)(514-577)에게 배워 법화경 안락행문(安樂行門)을 은밀히 받고는 열심히 수행하여 법화삼매(法華三昧)를 증득하고 스승으로부터 인가(印可)를 받았으며, 그는 “본국으로 돌아가 선방편(善方便)을 베풀어서 화도(化度)하라”는 스승의 부촉을 받고 귀국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국내의 기록은 전혀 없다.
백제 제27대 위덕왕(威德王) 24년은 서기 577년에 해당하므로, 이 무렵에 귀국하여 웅주(熊州)에서 혹은 왕실에서 교화 활동을 하였을 것으로 추리한다. 우리나라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석혜현(釋惠現)은 출가후 법화경 독송을 업으로 삼았는데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청함에 영(靈)의 감응이 많았다. 때는 정관(貞觀)(627-647)초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으로서 백제에서도 법화경이 널리 수지 독송되었음을 추리할 수 있다. 신라에서는 법화경 독송, 법화도량, 법화신앙, 연구 등 다양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신라에서는 낭지(朗智)스님이 신라 법흥왕(法興王) 14년(527)에 양주(梁州) 하곡현 영축산(靈鷲山)에 들어가 법화경을 강송(講誦)하고 신통력이 있었는데 문무왕(文武王) 원년(元年)(서기661, 135년간 영축산에서 살았다)에 나이 어린 지통(智通)스님을 영축산에서 만나 그에게 법화경을 가르치고 원효스님도 그에게서 배웠다는 기록이 있다. 낭지스님은 구름을 타고 중국 청량(淸凉)산 청량사에 자주 가서 청강(聽講)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지통(智通)스님의 법화 설화가 있다.
연광(緣光)스님은 신라 귀족 출신으로 진평왕(眞平王) 3년(581)경에 중국에 가서 천태(天台)  지자(知者)대사 지의(智顗) (538-597)스님에게서 법화경을 배워 홀연히 대오(大悟)하여 지자대사의 인가를 받고 그 곳에서 법화경을 강의하였다. 그의 명성이 높아 감에 ‘천제(天帝)께서 강경(講經)을 청하였다’고 한다. 그 후 그가 신라로 귀국하는 해상(海上)에서는 용궁의 해신(海神)이 그에게 법화경 강설을 청하였다고 한다. 신라에서 법화경을 널리 전파하고 80세에 생을 마감하여 화장을 하였는데 혀(舌)가 타지 않고 남았는데 그의 두 누이가 그 혀를 거두어 부처님께 공양하였는데 그 혀가 자주 법화경 독송하는 소리를 내었고 모르는 글자가 있어서 물어보면 모두 일깨워 주었다고 한다.
원성왕(元聖王)(785-799)대의 고승(高僧) 연회(緣會)는 일찍이 영취산(靈鷲山)에 은거(隱居)하면서 언제나 법화경을 독송하고 보현관행(普賢觀行)을 닦았는데, 그 뜰 앞 연못에는 연화(蓮花) 몇 송이가 항상 피어 있어서 춘하추동 사시(四時)에 시들지 않았다. 그 기이한 소문을 왕이 듣고 국사(國師)로 삼고자 한다는 소식을 듣고 피하였으나 문수보살과 변재천녀(辯才天女)의 말을 듣고 자기의 암자로 다시 돌아갔다. 그 후 왕의 사자(使者)가 와 그를 모시고 갔다. 국왕은 그를 국사로 봉하였다.
일본승(日本僧) 원인(圓仁)의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는 당(唐)의 문등현(文登縣)[중국 산동반도(山東半島)의 첨단(尖端)] 청령(淸寧)의 적산(赤山)에 자리한 신라 법화원(法花院)에서 신라 식으로 법화경을 강의하고 법화회(法花會) 모임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 기록에 의하면 당(唐) 개성(開成) 4년[신라 46대 문성왕(文聖王) 원년(元年), 839] 11월 16일부터 다음 해 1월 15일까지 2개월간 성림(聖琳)화상이 강경의 법주(法主)이고 돈증(頓證)스님과 상적(常寂)스님 두 분이 보조하시고 신도는 남녀 250에서 200명쯤 모여서 낮에는 강의 듣고, 저녁에는 예참(禮懺)과 독경을 하였다. 조석(朝夕)예참은 당풍(唐風)에 의하였으나 다른 의식과 강경은 모두 신라 식으로 하였다. 마지막 날에는 보살계를 주고, 오후 공양을 마친 후에 모두 헤어져 갔다. 이 절은 신라 장보고(張寶高)가 세운 절이고 일년(一年)에 500석 쌀을 생산하는 넓은 밭이 있다고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일본에 소장되어 있는 일본스님의 중국 법화원의 기록에 의하여 신라에서 그 이상의 법화 활동이 있었음을 추리 할 수 있다. 이 기록으로서 그 당시 오늘날 법회와 같은 법화법회, 법화강의 및 독경, 신도회(法花會) 등 조직적인 체계가 이루어져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원효대사가 저술한 ‘법화경종요’, 법화경방편품료간, 법화경요약, 법화약술 등이 있고 경흥(憬興)스님의 법화경소, 순경(順憬)스님의 법화경료간, 현일(玄一)스님의 법화경소, 의적(義寂)스님의 법화경논술기 외 다수가 있고 도윤(道倫)스님의 법화경소, 태현(太賢)스님의 법화경고적기 등이다. 이와 같은 방대한 자료들 중 전해오고 있는 것은 몇 가지되지 않지만 당시 신라에서는 법화경의 연구, 독경, 강의, 신앙 등이 대단히 활발하였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 의천스님(1055-1101)이 숙종임금 때 국사로 있으면서 천태종을 국교로 하고 승려 과거시험 출제의 소의 경전을 법화경으로 하였다. 이와 같은 점을 감안하여 볼 때에 우리들의 조상들이 법화경을 여러 경전 중에서도 귀중하게 여겨온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이 우리들과 이 법화경 강의와의 인연을 맺어준 동기가 된 것이다. 열심히 공부하여 부처님의 법을 항상 바르게 배워 실천하는 제자가 되기를 기원하며 선조들의 법화 정신을 조금이나마 찾아보고자 한다.

도림스님이 국역한 『법화경(妙法蓮華經)』(불기 2550(2006)년, 사리탑)을 교제로 하고 구마라집 한역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참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