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 수 행 법 - 1. 나를 찾아서

2007.02.24 03:40

bultasa Views:7231

선 수 행 법

1. 나를 찾아서

우리는 모두 평화롭고 조화로운 삶을 살기를 원하지만 평화롭고 조화로움은 우리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행복한 삶을 원합니다만 행복은 이루어지기 어려운 희망이고 목적사항에 불과합니다. 오히려 우리들의 삶에서 불만족스러운 일들을 자주 경험하게 됩니다. 이러한 불만은 때로는 충격적이고 자극적이어서 흥분을 금지 못하고 삶의 조화를 상실하게 합니다. 조화를 상실한 삶이 곧 고통스러운 삶인 것입니다.

혹 지금 이 순간 이러한 모든 불만족스러움이 조금도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들은 지나간 세월에 불만이 있었음을 기억할 뿐만 아니라 불만이 다시 일어날 것을 예상합니다. 결국 우리들은 죽음의 고통을 직면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경험하는 불만족스러운 일들로 인한 영향은 우리들 자신에게만 국한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이웃들에게도 계속해서 그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행한 사람의 주위 환경은 항상 자극적이고 흥분하는 분위기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환경에 들어가는 사람은 누구나 흥분하여 져서 불행함을 느낍니다. 이러한 이유로 한 사람 한 사람의 긴장이 합해져서 사회적인 긴장으로 심화되어 갑니다.

이 불만스러운 일들이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우리들이 원하지 않는 일들은 계속 일어나고, 우리들이 원하는 일들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마치 우리들의 인생이 어떻게 왜 시작하여 어떻게 왜 끝나는지 알지 못하는 것과 같이, 이러한 불행한 일들이 어떻게 왜 일어나는지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25세기 전에 북 인도에 살았던 어떤 청년이 인간이 받는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여 보려고 결심하였습니다. 그 연구가 수년의 해가 거듭되는 동안 문제 해결을 위한 여러 가지 방법을 시험하여 보았습니다. 그는 더디어 자신의 성품을 사실 그대로 통찰할 수 있는 방법과 자신에게 어떠한 고통도 없는 진실한 자유를 경험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는 해탈 중에서도 가장 높은 관문을 통과하여 모든 불행한 고통과 갈등을 해소하였습니다. 그는 그가 걸어 온 것과 똑 같은 방법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해탈하는 방법을 보여주고, 또 그들이 해탈하도록 도와주는 일로 그의 나머지 생애를 바쳤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Gotama Siddhattha 고타마 싣닫타입니다. 우리들에게 부처님이라고 알려지신 분이고 깨달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은 인간이지 인간 이상의 그 무엇이라고 주장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모든 위대한 선생들이 설화의 주인공이 되는 것처럼 그도 설화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과거 생에서 여하한 불가사의한 이야기와 기적적인 능력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모든 이야기들은 단 한 번도 그가 신이라고 주장하거나 신이 되기 위한 영험을 받았다고 주장하지 않는 점에서 일치합니다. 그가 가졌던 어떠한 특성도 인간의 탁월한 성품이 완벽하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사람이라도 그가 한 바와 같이 하면 그가 성취한 것은 무엇이나 그들이 성취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있다고 합니다.  

부처님은 어떠한 종교나 철학이나 신앙의 제도를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의 가르침을 Dhamma 담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다르마’라고 불어왔습니다. 여기에서 담마라고 하는 것은 ‘법(法)’을 의미하고 ‘법’이란 자연 법칙을 의미합니다. 부처님은 교리나 한가한 추리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반대로 그는 보편적인 문제에 대하여 일반적이고 실용적인 해결법을 제시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전에와 같이 지금 나는 고통과 그 고통을 제거하는 법에 관하여 가르치고 있다.

그는 고통에서 자유로워지는 길로 가는 것 외 여하한 것도 논의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주로 가르친 것은 그가 발명한 것도 아니요 어떤 신의 영험으로 그에게 알려진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다만 그 자신의 노력에 의하여 발견하는데 성공한 단순한 진리요 사실입니다. 그 이전에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였고 그 이후에 많은 사람들이 그러할 것이기 때문에 그는 그 진리에 대한 독점권을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가르침에 대하여 어떠한 특권도 그는 세우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 당시 사람들이 그에게 가졌던 믿음 때문도 아니요, 그가 가르친 것이 분명한 논리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는 이와 정반대로, 누구나 자기가 경험한 것 이상의 것에 대하여 의심하고 시험하고자 하는 것은 타당한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말씀 하였습니다:

네가 들은 것을 단순하게 믿지 말고, 과거 세대로부터 물려받았다고 단순하게 믿지 말며, 일반적인 상식이라고 하여 단순하게 믿지도 말고, 경전에서 하신 말씀이라고 순수하게 믿지도 말아라. 어떠한 것도 단순히 감하거나 추리해서 진리라고 받거나, 외모를 고려해서 진실하다고 받아드리거나, 어떤 견해에 대하여 부분적으로 알면서 진리라고 받아 드리거나, 그럴듯하다고 하여 진실로 받거나, 당신의 선생이 그렇다고 하여 진리로 받아서는 안 된다. 그러나 네 자신이 직접, “이 원칙은 순수하지 못하고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있고 현자들에 의하여 힐난을 받을 것이다. 그 원칙을 택하여 집행할 경우 사람들에게 해를 주고 고통을 안겨 줄 것이 다”라는 것을 안다면 그 원칙을 포기하여야만 한다. 그리고 네 자신이 직접 “그 원칙은 순수한 것이고 비난받을 것이 없고 현자들에 의하여 칭찬받을 것이다. 그 원칙을 채택하여  집행할 경우 많은 사람들에게 복지와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다”라고 안다면 그 원칙을 택하여 실천하여야 할 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높은 권위는 스스로 진리를 체험하는데 있습니다. 이 세상의 어떠한 것도 믿음 하나만으로 받아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그것이 논리적으로 합당하고 실용적이고 이로운 점이 있는지 반드시 검토하여 보아야 합니다. 어떠한 가르침이 우리들의 이성으로도 검토하지 않았다면 그것을 지성적으로 진리라고 받아들이기에 충분하겠습니까. 만약 우리가 진리로부터 이롭게 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그 진리를 직접 경험하여야 합니다. 그 때만이 우리는 그것이 참다운 진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언제나 그가 가르치는 것은 직접적인 지식으로 체험한 것임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러한 지식을 개발하여 그들 자신이 권위자가 되도록 다음과 같이 격려하였습니다:

여러분 각자는 하나의 섬을 만더러 자신의 피난처로 만드십시오. 다른 피난처는 없습니다. 진리를 당신의 섬으로 만더러 그 진리를 당신의 피난처로 만드십시오. 다른 피난처는 없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인생에서 오직 참다운 피난처, 그 위에 오직 단단하게 딛고 설수 있는 기반, 가장 합당한 지도와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권위는 오직 자신에 의하여 경험하고 검정된 진리, 담마, 자연 법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가르침에서 부처님은 항상 진리를 직접 체험하는 것을 가장 소중한 것으로 취급하였습니다. 그가 경험한 것을 그는 가장 상세하게 설명하여 다른 사람들이 그 지침을 가지고 그들 스스로 진리를 깨닫도록 하였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내가 하는 가르침은 밖 앗 쪽과 안 쪽이 각각 다른 형태나 어떤 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 것도 선생의 주먹에 감추어 진 것이 없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에게는 그의 비법(秘法)을 전할 선택된 몇 사람이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연법을 아주 쉽고 단순하게 그리고 널리 알려서 되도록이면 많은 사람들이 해택을 얻을 수 있게 하고자 하였습니다.

부처님은 어떠한 종파를 이룩하고자 하지도 않았고, 자기 성품에 맞는 사람들만으로 그의 활동 중심으로 삼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항상 그가 가르치는 사람의 성품은 가르침에 비교하여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하는 생각을 유지하였습니다. 그의 목적은 그들에게 그들이 해탈할 수 있는 어떤 방법을 보여주는데 있었지 맹목적으로 그에게 헌신하게 하는데 있지 않았습니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 중에 지나치게 그를 흔모하고 존경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부처님은 어느 날 그에게 말씀 하시기를,

나의 이 몸을 보고 당신은 무엇을 얻습니까? 이 몸은 머지않아 곧 섞을 것입니다. 담마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는 것이요, 나를 보는 사람은 담마를 봅니다.      

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헌신하는 것은 그 사람이 아무리 성스럽다고 하더라도 자신을 해탈하게 하는데 충분하지 않습니다. 직접적으로 사실을 경험하지 않고는 해탈도 구원도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진리는 가장 높은 지위에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존경은 진리를 가르치는 사람에게 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가장 좋은 존경의 표현 방법은 스스로 그 진리를 깨닫도록 노력함에 있습니다. 부처님의 임종이 가까워짐에, 어떤 사람이 부처님에게 지나치게 화려한 영광을 베풀었습니다. 부처님은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하였습니다.

이것은 깨달은 사람에게 맞는 영광을 표하는 방법이 아니다. 존경을 표하는 것도, 경모하는 것도, 숭배하는 것도, 공경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 들 중에 나를 따르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이 첫 발에서부터 마지막 목표까지 담마의 길을 확고부동하게 걸어가고, 바른 길로 가는 담마를 실천하는 것이 깨달은 사람에게 가장 높은 존경심으로 그를 영광되게 하고, 존경하고, 경모하고, 숭배하고, 공경하는 것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수행법은 모든 사람들이 누구나 따를 수 있는 길입니다. 그는 이 길을 팔정도(八正道)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서로 연관이 있는 여덟 가지 수행 부분을 뜻합니다. 이것을 고귀한 길이라고 하는 것은 누구나 이 길을 가는 사람은 고귀한 마음을 가진 성스러운 사람이 되고 모든 고통에서 자유로워지기 때문입니다.

팔정도는 현실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길입니다. 즉 진리를 깨닫는 길입니다. 우리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는 우리들이 우리들의 사정을 사실 그대로 볼 수 있어야합니다. 우리는 표면에서 분명한 사실을 인식하고, 그리고 또 그 표면에 나타나는 것을 내면으로 관통하여 미묘한 진리를 감지하고, 그리고 난 후 궁극적인 진리를 깨닫고, 그리고 최종적으로 모든 고통에서 해방되는 진리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 해탈의 진리를 열반, 천당, 혹은 어떠한 이름을 붙이더라도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기의 내면을 살펴보고 자신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모든 생활은 우리들이 밖으로 바라보도록 습관화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언제나 무엇이 밖에서 일어나고 있는 가, 다른 사람들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에 대하여 관심이 솔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우리들 자신을 검사하여 보고자 하거나, 우리들 자신의 정신적 육체적 구조나, 우리들 자신의 행동이나, 우리들 자신의 현실에 대하여 검사하여 보고자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일은 드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을 알지 못하는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무지가 얼마나 해로운 가를 깨닫지 못하고, 우리들이 알지 못하는 세력, 우리들 자신 내에 존재하는 세력의 노예로 얼마나 오랫동안 남아 있었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진리를 인식하기 위하여 는 먼저 내적인 어두움을 몰아내야 합니다. 모든 존재의 본질을 알기 위하여 는 우리들 자신의 본성을 관철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이 보여 주신 길은 내관(內觀)하는 길이요 자성(自省)하는 길입니다. 그는,

이 여섯 자 길이의 몸에 감각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이 우주에 그 근원, 그 멸한 상태, 그 멸하는 것으로 이끄는 길을 알았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전 우주와 자연의 법칙에 의하여 우주가 작용하는 것을 자기 자신의 내에서 경험되어 져야 합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의 내에서만이 경험될 수 있습니다.

이 길은 또한 정화하는 길입니다. 우리는 우리들 자신에 대한 진리를 한가한 지식의 호기심에서가 아니라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검사합니다. 자신을 성찰함에 의하여 처음으로 조건 지어진 반작용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정신적인 통찰력을 덮어버리는 선입견, 우리들로부터 사실을 감추고 고통을 낳게 하는 편견들이 조건지어진 반장용입니다.

그 동안 계속 저장되어 온 내적인 긴장이 우리를 흥분하게 하고 고통스럽게 한다는 것을 우리는 인식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내적인 긴장을 제거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점차적으로 우리는 긴장이 스스로 녹아 버리는 방법을 알게 됩니다. 그리하여 우리들의 마음이 정화되고 평화롭고 행복한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게 하는 방법은 계속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요구되는 과정입니다. 갑작스럽게 관통해 버리는 수도 있지만 그것은 계속적인 노력의 결과입니다. 작업의 단계를 건너뛰려고 하지말고 순차적으로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매 단계를 적용할 때마다 그 효과는 그와 동시에 옵니다. 장래에 즐길 수 있는 이득이 일어나게 하기 위하여 이 길을 닦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단순히 추측에 의하여 알려진 천당에 가기 위하여 이 과정을 밟는 것도 아닙니다. 수행해서 얻어 지는 이익은 반드시 구체적이어서 확실하고, 생기 있는 활동성이 있고, 수행하는 개인 자신에게 적용 될 수 있으며, 그 이익은 지금 여기에서 체험되어 집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어떠한 부처님의 가르침도 실천되어 져야 합니다. 단순히 부처님을 믿고만 있거나 그 길을 단지 지식적인 이해에 끝인다면 그의 가르침은 우리를 고통으로부터 자유롭도록 도울 수는 없습니다. 믿음과 지식적인 이해는 단지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에 옮기도록 고무시켜 줄때 그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다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제로 실천할 때 그에 상응하는 구체적인 결과를 우리에게 안겨 주고 우리들의 인생을 더 행복하게 만들어 줍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많은 경전을 독송하는 사람이 있습니다만 만약 그가 그들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사람은 그의 병을 고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마치 목장에서 일하는 목동이 남의 소만 헤아리고 있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진리를 추구하는 인생의 보람을 즐길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경전을 몇 구절만 독송할 수 있지만 담마의 인생을 살고 수행의 길을  처음부터 목표에 이르기까지 차례대로 꾸준하게 끊어짐이 없이 걸어간다면 그는 진리를 탐구하는 인생의 보답을 즐길 것입니다.

라고 하셨습니다. 그 길은 반드시 따라야 합니다. 그 가르침은 반드시 집행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의미 없는 과정이 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하여 어떤 사람이 반드시 불교신자가 되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명칭은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고통은 아무 것도 차별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같습니다. 그러므로 치유법도 유용하기 위하여 는 반드시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적용되어야 할 것입니다. 어떠한 수행 방법도 보편적인 생활을 떠나 한적한 곳에서 수행하는 사람들만을 위하여 저장될 수 없습니다. 물론 어떠한 사람이든 전적으로 자기 자신을 헌신하여 어떻게 수행하는 것인지 그 법을 배우기 위하여 필요한 일정한 기간을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였다면, 그 사람은 반드시 일상생활에 그 가르침을 적용하여야 합니다. 부처님의 길을 따르기 위하여 가정과 세속의 책임을 포기한 사람들은 더욱 집중적으로 그 가르침을 더욱 깊이 흡수하고 더욱 빠르게 진보할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반대로 세속 생활에 관련된 사람들은 많은 책임에서 오는 요구를 들어주기 위하여 요술을 부려야 하기 때문에 단지 제한된 시간만 수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집이 없는 사람이든 집을 지켜야 하는 사람이든 누구나 반드시 담마를 적용하여야 합니다.  

오직 적용된 담마만이 결과를 가져 올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고통에서부터 평화로 가는 진실한 길이라면, 우리가 수행을 진행 해 감에 따라, 우리들은 우리들의 일상생활에서 더 행복하고 더 조화롭고 더욱 평화로운 자신으로 되어 가야 할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들의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도 더욱 평화롭고 조화롭게 되어 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사회에 긴장을 증가시키는 대신 우리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행복과 복지를 증장시키는 적극적인 공헌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길을 따르기 위하여 우리는 반드시 담마의 삶, 진실한 삶, 깨끗한 삶을 살아야합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집행하는 합당한 방법입니다.

담마를 바르게 행하는 것만이 “나를 찾는 길”이 되고 생활의 예술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