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 수 행 법 - 3. 인과(因果)

2007.02.24 03:46

bultasa Views:7082

3. 인과(因果)

실재 세계는 누구나 항상 행복하게 사는 동화의 세계와 조금도 닮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삶이란 불완전하고 미숙하고 불만족스럽다는 진리를 피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고통이 있는 진리입니다.
이러한 실재를 안다고 하더라도 우리들이 알아야 할 중요한 것은 고통이란 원인이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있다면 그 원인을 제거하여 고통을 소멸할 수 있는 것인지. 우리에게 고통을 일어키는 사건들의 원인이 단순히 불규칙하게 일어나 우리들이 통제 하거나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무기력(無氣力)합니다. 무기력하다면 차라리 고통에서 빠져 나갈 방법을 찾겠다는 의도를 포기하는 것이 낳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들의 고통이 전지전능한 존재의 임의대로 그리고 예측할 수 없는 어떤 방법에 의하여 지배된다면 이 존재의 비위를 맞추어 우리들에게 더 이상 고통을 가하지 않게 하는 방법을 찾아야만 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들의 고통은 우연한 결과로 생긴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으신 것입니다. 고통에는 그 원인이 그 뒤에 있고, 모든 현상에는 반드시 그 원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인과법칙(因果法則) - 업(業) - 은 모든 존재에 가장 보편적이고 가장 근본적으로 해당되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고통의 원인도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경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1) 업(業 Kamma)

Pali어 Kamma는 Sanskrit어 Karma입니다. 일반적으로 업을 “운명”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운명은 우리들이 통제할 수 있는 능력 밖에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하느님의 뜻에 의하여 이미 결정지어 졌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Kamma를 운명의 정반대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Kamma의 문자의 뜻은 action 행위입니다. 우리들 자신의 행은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에 대한 원인입니다. “모든 존재는 그들의 행위를 소유하고, 그들의 행위를 상속받고, 그들의 행위에서부터 시작하고, 그들의 행위에 구속됩니다. 그리고 그들의 행위는 그들의 피난처가 됩니다. 그들의 행위는 모든 것의 기초가 되고 숭고한 것과 같이 그들의 생활도 그렇게 됩니다.”

우리들의 생애에서 우리들이 만나게 되는 모든 것은 우리들 자신의 행동의 결과입니다. 그 결과 우리들이 우리들의 행동의 주인이 되면 우리들 각자는 우리의 운명의 주인이 됩니다. 우리들 각자는 우리들에게 고통을 일어키는 모든 행동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 각자는 우리들의 행동에서 그 고통을 끝낼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있습니다.

You are your own master,
You make your own future.

있는 그대로라면, 우리들 각자는 운전을 조금도 배운 적이 없는 사람이 운전대를 잡고 바쁜 highway에서 속도를 내며 달리는 눈 가린 사람과 같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불행한 일 없이 목적지에 도달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는 그가 자동차를 운전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만 사실은 자동차가 그 사람을 운전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가 사고 없이 목적지에 도달하기를 원한다면 그는 그의 눈가리개를 제거하여야 하고, 자동차 운전하는 법을 배워야 하며, 하루 속히 위험부담 없이 운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들은 우리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들이 진실로 가고 싶은 곳으로 우리들을 인도할 수 있는 행위를 시행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2)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

업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그 세 가지는 몸으로 짓는 신(身), 입으로 짓는 구(口), 마음으로 짓는 의(意)입니다. 우리는 보통 육체적인 행위에 가장 큰 중요성을 부여하고, 그 다음으로 입으로 짓는 업, 그리고 뜻으로 짓는 업에는 별로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을 주먹으로 때리는 것은 말로 그를 욕하는 것보다 더 중한 행위를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행위는 그 사람에게 표현하지 않은 나쁜 뜻보다는 훨씬 심각한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견해는 인간이 만든 국가법에 의하여 고려하면 당연한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자연법, dhamma에 의하면 마음의 행위가 가장 중요합니다. 신업(身業)이나 구업(口業)은 그것을 행한 의지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집니다.

외과 의사가 해부용 칼을 사용하여 그의 환자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긴급하게 수술을 하였지만 그 결과는 성공적이지 못하고 오히려 그 환자는 죽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어떤 살인자가 어떤 사람을 칼로 찔러 죽였습니다. 육체적으로 보면 이 두 가지 행동은 같은 결과를 가져 왔다는 점에서 대단히 유사합니다. 그러나 정신적으로 보면 그들은 극대극의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외과의사의 행은 비(悲)에서 나온 것이고 살인자의 행은 증오에서 나온 것입니다. 따라서 각자가 얻는 결과는 그들의 마음의 행위에 따라 완전히 다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말을 하는 경우에 있어서도 그 의지가 가장 중요합니다. 한 사람이 그의 동요와 말다툼을 하는 중 화가 나서 욕설을 하고 그를 바보라고 부릅니다. 같은 사람이 그의 아들이 흙탕물에서 노는 것을 보고 병이라도 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마음에서 그의 아들을 바보라고 부릅니다. 이 두 가지 경우에 똑 같은 “바보”라는 말이 쓰였습니다만 실은 정반대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하여 쓰여 진 것입니다. 말을 하는 우리들의 의지가 어디에 있었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정하여 지는 것입니다.

말과 행동 혹은 그들의 외형적인 결과는 단순히 마음의 행동의 결과입니다. 그 결과는 그 상대에게 표현한 의지의 성질에 따라 정확하게 판결됩니다. 참된 kamma는 마음의 행동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미래에 결과를 가져다 줄 원인이 됩니다. 이 진리를 이해하시고 부처님께서 다음과 같이 공포하셨습니다.

마음은 모든 현상보다 앞서는 법
마음이 가장 큰 문제이다. 모든 것을 마음이 만들었기 때문이다.
만일 부정한 마음으로 말을 하거나 행동을 하면,
고통이 따른다, 마치
구루마는 구루마를 끄는 짐승의 발자국을 따라가는 것과 같다.

만약 청정한 마음으로 말을 하거나 행동하면,
행복이 그를 따른다. 마치
그를 결코 떠나지 않는 그림자와 같이

3) 고통의 원인

어떤 마음의 작용이 우리들의 운명을 결정합니까? 만일 마음이 수상행식만으로 구성되어 있다면, 어느 것이 일어나서 고통이 되는 것입니까? 이들 각자는 고통이 되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의 관련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 중 식수상 셋은 주로 수동적인 역할을 합니다. 식(識 consciousness)은 단순히 경험하는 data를 입수하고, 수(受 perception)는 data를 category에 넣고, 상(想 sensation)은 앞서 일어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음을 signal한다. 이 세가지 단계는 단지 들어오는 정보를 소화하는 잡업을 합니다. 그러나 마음이 반작용을 시작하면 수동적인 마음은 끌든지 반발하든지 좋아하든지 싫어하든지 하는 쪽으로 양보합니다. 이 반작용은 새로운 연쇄반응이 일어나게 합니다. 연쇄반응의 시작에 반작용, sankhara가 있습니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다음 말씀을 한 이유입니다.

어떠한 고통이 일어나는 것은
반작용을 그의 원인으로 하고 있다.
만일 모든 반작용을 끝낼 수 있다면  
더 이상 고통은 없을 것이다.

참된 Kamma, 모든 고통의 참된 원인은 마음의 반작용에 있습니다. 하나의 좋아하고 싫어하는 빠른 속도의 반작용은 그렇게 강하지 않아 심한 결과를 주지는 않을 것입니다만 이들은 쌓이는 결과를 가질 수 있습니다. 반작용은 한 순간 다음 순간 반복됩니다. 이 반작용이 반복할 때마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강화되어서 탐욕이나 증오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부처님께서 그의 첫 법문에서 tanha라고 불렀습니다. 문자 뜻은 “thirst 갈애”입니다. 실재가 아닌 것에 대한 만족 시킬 수 없는 그리움을 갖는 심적인 습관입니다. 이것은 있는 것을 가지고 불만족에 상응할 수도 불만족을 고칠 수도 없다는 뜻입니다. 갈망이 더 강해지고 불만이 커질수록 우리들의 생각과 말과 행동에 더욱 깊은 영향을 미칩니다. 그리고 그들은 더 심한 고통을 일으키는 원인이 됩니다.

어떤 반작용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잠겨 있는 물의 수면에 선을 그리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물 위에 선을 그리자마자 선이 지워져 버리는 것과 같다는 뜻입니다. 어떤 반작용은 모래사장에 그려진 선과 같다고 했습니다. 선이 오전에 그려졌으면 저녁 때 쯤에는 없어집니다. 조수에 씻겨나가기도 하고 바람에 지워지기도 합니다. 어떤 반작용은 끌과 망치로 바위에 깊이 새겨진 선과 같다고 했습니다. 이들도 바위가 침식함에 따라 지워집니다만 그들이 지워지기에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우리들의 매일 생활 중에서 마음은 계속하여 반작용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하루가 끝날 때 쯤 우리가 그들을 생각하려 해도 그 날에 깊은 인상을 준 한 두 가지 외는 전혀 생각나지 않습니다. 한 달이 끝날 때 쯤 그 달 중에  있었던 반작용을 기억하려고 해도 그 달 중에 가장 깊은 인상을 준 한 두 가지만 회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1년이 지나 그 해에 있었던 반작용을 기억하려고 하여도 그 해에 가장 깊은 인상을 심어 준 한 두 가지 반작용 외에 다른 것은 회상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골이 깊은 반작용은 대단히 위험합니다. 이러한 반작용은 무한한 고통으로 끌고 갑니다.

그러한 고통을 만날 때, 첫 단계 해야 할 일은 그것의 실재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철학적인 개념에서도 아니고 믿음의 한 구절에서도 아닙니다. 다만 우리들의 생활상에서 우리들 각자에게 미치는 존재의 실상입니다. 이것을 받아들이고 고통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왜 우리가 고통을 받는지를 이해하면 우리는 운전 당하는 것을 정지하고 우리가 운전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 자신의 본성을 직접 깨달을 수 있는 법을 배우고 우리들 자신을 모든 고통에서 빠져 나오게 하는 길에 굳게 세울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