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 수 행 법 - 4. 문제의 근원(根源)

2007.02.24 0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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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문제의 근원(根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고(苦)의 진리는 끝까지 검색하여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그가 정각을 얻은 날 밤에 그는 고통이 어떻게 시작하고 어떻게 이것을 소멸할 수 있는가를 깨닫기 전에는 결코 일어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그는 앉았습니다.

1) 고(苦)의 정의

분명히 부처님은 고통이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무리 싫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어머니의 자궁 안에 있었던 것을 의식은 기억하지 못합니다만 보편적인 경험은 우리가 그로부터 나와서 웁니다. 생(生)은 큰 상처입니다.

일단 삶이 시작되면 병으로 인한 고통과 늙음으로 인한 고통을 누구나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심한 병에 걸려 있다고 하더라도 아무리 힘이 빠지고 늙어 빠졌다고 하더라도 아무도 죽고자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너무나 비참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산 동물은 누구나 이 모든 고통을 직면하게 됩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 가는 동안에 그 외 다른 고통도 만나게 됩니다. 여러 가지 종류의 육체적 정신적인 고통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불쾌한 일들과 관계를 맺게 되고 유쾌한 일과는 헤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하고 우리가 원하지 않는 것을 갖게 됩니다. 이 모든 사정은 다 고통입니다.

이 모든 고통의 경우는 이 고통을 깊이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누구나 이미 분명한 것입니다. 그러나 미래의 부처님께서는 지식적인 제한된 설명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의 자신 안에서 고통의 참된 본질을 경험하기 위하여 계속 검색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는 “오온에 집착하는 것이 고통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매우 깊은 수준에서 고통은 엄청난 집착입니다. 이 집착은 우리들이 우리들의 육체와 마음을 향해 개발한 것입니다. 마음은 식(識), 수(受), 상(想), 행(行)의 작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주체성에 강하게 집착합니다. 주체성이란 그들의 육체적 정신적인 존재의 주체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실재하는 것은 다만 진화과정밖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실재하지 않는 자신에게 집착하거나 항상 변하는 어떤 것에 집착하는 것은 고통입니다.

2) 집착(執着)

몇가지 종류의 집착이 있습니다.

첫째는 감각기관의 만족을 추구하는 습관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어떤 중독자가 약을 먹습니다. 그 약이 자신의 안에서 만들어 내는 즐거운 감각을 경험하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그는 그 약을 먹으면 그의 중독이 더 심해지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와 똑 같이 우리는 갈망의 조건에 중독되어 있습니다. 한 욕망을 만족하자마자 다른 욕망이 일어납니다. 목적물은 이차적인 것이지만 문제는 갈망의 상태를 계속하여 유지하려는 욕망을 추구하는데 있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 갈망이 우리들이 더 오래 지속되기를 원하는 기분 좋은 감상을 우리들 안에서 계속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갈망은 습관이 되고 그 습관은 우리들의 힘으로 깰 수 없는 중독이 됩니다. 한 중독자가 그가 선택한 약에 대하여 점차 여유를 개발하게 되면 오히려 약물에 취하기 위하여 더 높은 dose를 필요로 합니다. 우리들의 갈망은 그들을 만족하려고 더 열심히 추구하면 할수록 꾸준하게 더 강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길에서는 우리는 결코 갈망을 끝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갈망을 하는 한 우리는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둘째로 큰 집착은 “나”, 이기(ego), 우리들이 우리들 자신에게 갖는 image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들 각자에게는 “나”가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쇠줄밥(iron filing)에 둘러싸인 자석과 같이 행동합니다. 자석은 자동적으로 자신을 중심으로 쇠줄밥을 정리합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이 세상을 우리가 좋아 하는 대로 하고자 하지만 잘 되지 않습니다. 좋아 하는 것을 끌려고 하고 싫어하는 것을 버리려고 하지만 뜻대로 정리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도 이 세상에 홀로 살고 있지 않습니다. 한 “나”는 다른 “나”와 충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각자가 이루고자 추구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자장(磁場)에 의하여 방해를 받습니다. 그래서 우리들 자신이 끌려 다닐 수도 있고 배척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 결과는 오직 불행과 고통입니다.

우리는 “나”에 대한 집착에 국한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나”를 “내것”에까지 연장합니다. “내것”이란 나에게 속하는 모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큰 집착을 일으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나와 관련이 있고 “나”라고 하는 image를 유지하도록 밀어주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집착은 우리가 “내것”이라고 하는 것이 영원할 수만 있고 또 “나”가 영원히 그들을 즐기고 살수만 있다면 어떠한 문제의 원인도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조만간 “나”는 “내것”으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서로 갈라지는 때는 반드시 오게 되어 있습니다. 갈라지는 때가 오면 “내것”에 대한 집착이 크면 클수록 고통도 그만큼 크게 되어 있습니다.

셋째 집착은 우리들의 견해와 믿음에까지 연장됩니다. 그 견해와 믿음의 내용이 무엇이든지간에, 그 견해와 믿음이 옳고 그러든 간에 우리가 그들에 집착하면 그들은 우리를 불행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견해와 전통은 가장 훌륭한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이 비판을 받는 것을 언제 들어도 기분이 대단히 나쁩니다. 만약 우리들의 견해를 설명하여도 상대가 받아 들이지 않으면 또 기분이 상합니다. 우리는 사람은 각자 자신이 믿는 것이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떤 견해가 옳은 가를 놓고 논쟁하는 것은 쓸모없는 짓입니다. 어떠한 선입견도 뒤로 미루어 두고 실재를 보려고 하는 것이 더욱 이롭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견해에 대한 집착은 우리들이 그렇게 하고자 하는 것을 방해하여 그렇게 하지 못하게 막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계속하여 불행합니다.

넷째 종교적인 양식과 의식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교의 외적인 표현을 그 내적인 의미보다 훨씬 더 강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러한 의식을 행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참된 종교인이 될 수 없다고 합니다. 우리는 핵심이 없다면 종교의 형식적인 면은 빈 조개껍질과 같다는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만일 마음이 성남, 고민, 나쁜 마음으로 가득 차 있다면 기도문을 암송하는 경건함이나 의식을 집전하는 경건함은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진실하게 종교적이 되기 위하여는 종교적인 태도를 발전시켜야 합니다. 종교적인 태도란 청정한 마음과 모든 중생을 대하는 자비심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종교의 외적인 형식에 대한 집착은 형식을 서술한 정신보다 글을 더 중요시 하게 합니다. 이리하여 종교의 핵심을 잃어버리고 비참하게 됩니다.

우리들의 모든 고통은 그들이 무엇이든지 간에 위 네 가지 집착 중에 하나 혹은 여러 가지와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집착과 고통은 항상 함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3) 조건 지어진 생멸

무엇이 집착을 일으킵니까? 어떻게 이것이 일어납니까? 미래 부처님께서 그 자신의 성품을 분석하여 본 결과 집착은 좋아 하고 싫어하는 순간적인 반응 때문에 일어나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이 반응은 처음에는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는 마음이지만 순간순간 반복되는 사이에 그 반응이 강화되어서 강력한 힘으로 끌거나 물리치는 힘으로 발전되어 집니다. 이것이 집착으로 발전하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집착은 단순히 반복되는 빠른 반응의 발전된 형태입니다. 이것이 고통의 직접적인 원인입니다.

무엇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원인입니까? 미래 부처님께서 더욱 깊이 관찰하신 결과 반응(reaction)은 감상(sensation) 때문에 일어나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어떤 물건을 보고 기분 좋은 감상을 느끼면 그것을 좋아하기 시작하고 기분 나쁜 감상을 느끼면 그것을 싫어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이러한 감상은 무엇이 원인이 되어 일어납니까? 미래 부처님께서는 그 자신의 내면세계를 더욱 깊이 검사한 결과 감상은 접수(reception)하는 작용이 있기 때문이고 접수는 접촉하는 작용이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눈이 물건과 접촉하고, 귀가 소리와 접촉하고, 코가 냄새와 접촉하고, 혀가 맛과 접촉하고, 몸이 어떤 구체적인 것과 접촉하고, 마음이 어떤 생각, 감정, idea, 상상, 기억 등과 접촉한다. 우리는 세계를 이 다섯 게의 육체적인 감각기관과 마음을 통해서 경험합니다. 어떤 대상이나 현상이 이 여섯 기관과 접촉할 때 마다 그들은 감각 기관에 접수(reception)되어서 접수된 data에 의하여 기분 좋고 나쁘다는 감상(sensation)을 일으킵니다.

그러면 왜 접촉이 처음에 일어납니까? 미래 부처님께서는 여섯 게의 감각기관이 있기 때문인 것을 알았습니다. 여섯 게의 감각기관 중 5게는 육체적인 감각기관이고 1게는 마음인데 이들이 있는 한 접촉은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현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현상이란 물건 소리 냄새 맛 접촉 물 여러 가지 생각과 감정 등입니다. 우리들의 접수기관이 작용하는 한 접촉은 불가피한 것입니다.

그러면 왜 여섯 게의 감각 기관이 있습니까? 그들은 몸과 마음의 흐름의 본질적인 부분인 것입니다. 몸과 마음의 흐름은 왜 있습니까? 무엇이 이들이 일어나는 원인입니까? 미래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과정이 일어나는 것은 의식(conscious -ness)이 있기 때문이라고 깨달았습니다. 의식은 인식작용입니다. 인식은  세계를 인식하는 자와 인식 당하는 자로 갈라놓습니다. 인식하는 자를 주체 혹은 “나”, 인식 당하는 자를 객체 혹은 “남”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분리로부터 주체성을 가진 “나”를 “생”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합니다. 매 순간 의식은 일어나서 특정한 정신적 육체적인 형태를 가집니다. 그리고 다음 순간에 의식은 다시 약간 다른 형태를 취합니다. 이와 같이 한 사람이 존재하는 동안에 의식은 흐르고 변합니다. 마지막 죽음에 임하여서도 의식은 그기에 멈추지 않습니다. 아무런 간격 없이 다음 순간에 의식은 새로운 형태를 취합니다. 한 존재에서부터 다음 존재로, 한 생에서 다음 생에로, 의식의 흐름은 계속됩니다.

그러면 무엇이 의식의 흐름의 원인입니까? 미래 부처님께서는 반작용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마음은 항상 반응합니다. 모든 반응은 의식의 흐름을 자극하여서 의식은 다음 순간에 계속합니다. 반응이 강하면 강할수록 더 큰 자극을 반응은 일으킵니다. 한 순간의 약간의 반응은 의식의 흐름을 단지 한 순간 지속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순간적인 좋아하고 싫어하는 반응이 탐내거나 증오하는 것으로 강화되면 반응은 힘을 얻어 많은 초나 많은 분이나 많은 시간 동안 의식의 흐름을 지속하게 합니다. 그리고 만약 탐내고 증오하는 반응이 더욱더 강력하게 되면 반응은 의식의 흐름을 며칠이고 몇 달 어쩌면 몇 년 동안 지속하게 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일생동안 어떤 특정한 반응을 계속 반복하고 강화합니다. 그렇게 강화되는 반응은 힘을 얻어 충분히 의식의 흐름을 한 순간에서 다음 순간, 하루에서 다음 날, 한 해에서 다음 해 뿐만이 아니라 한 생애에서 다음 생까지 지속하게 합니다.

무엇이 반응의 원인입니까? 미래 여래께서 가장 깊은 실재의 수준을 관찰하신 후 그는 반응은 무지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라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반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우리가 반응하는 것에 대한 참된 본질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존재의 무상과 무아의 본질에 대하여 무지하고, 존재에 집착하는 것이 고통 외 아무 것도 가져오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하여 무지하다. 우리들의 참된 본질을 알지 못하고 우리는 맹목적으로 반응합니다. 우리가 반응하였다는 사실을 알지도 못하고 우리들의 맹목적인 반응을 고집하여 밀고 나가 반응이 강화되게 합니다. 이리하여 우리는 무지하여 반응의 습관에 수감되게 됩니다.    

이것이 어떻게 고통의 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하는가를  설명한 것입니다:

만일 무지가 일어나면 반응(行)이 일어나고;
반응이 일어나면 의식이 일어나고;
의식이 일어나면, 마음과 물질(名色)이 일어나고;
마음과 물질이 일어나면, 여섯 감각(六入)이 일어나고;
여섯 감각이 일어나면, 접촉이 일어나고;
접촉이 일어나면, 접수(受)가 일어나고;
접수가 일어나면, 감상(想)이 일어나고;
감상이 일어나면, 탐욕과 증오(愛)가 일어나고;
탐욕과 증오가 일어나면, 집착(取)이 일어나고;
집착이 일어나면, 일우어지는 과정(有)이 일어나고;
일우어지는 과정이 일어나면, 생이 일어나고;
생이 일어나면 노사가 일어납니다. 이것을 모두 합하여 괴롭고 슬프고 육체적 정신적 고통이고 재난입니다.

이 인과의 쇠사설을 조건 지어진 生이라고 합니다. 이 인과의 쇠사설에 의하여 우리는 우리들의 현재의 존재의 상태로 성장하고 미래의 고통에 직면하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결국 진리는 그에게 명백하여 졌습니다: 고통은 우리들의 참된 본성의 실재에 대한 무지와 “나”라고 이름 붙여진 현상에 대한 무지에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다음의 고통의 원인은 sankhara, 반응을 일으키는 마음의 습관입니다. 무지에 의하여 눈이 가려져서 우리는 탐욕과 증오의 반응을 일으킵니다. 이 반응은 집착을 증장하고 집착은 여러 가지 불행으로 이어가게 합니다. 반응하는 습관이 kamma(業)입니다. 이 업이 우리들의 미래를 다듬는 자입니다. 그리고 이 반응은 오직 우리들의 참된 본질에 대한 무지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무지 탐욕 증오는 우리들의 생애에서 모든 고통을 자라게 하는 세 게의 뿌리입니다.

4) 고통에서 나오는 길

고통과 고통의 원인을 안 미래 부처님은 다음 질문에 직면하였습니다. 어떻게 고통을 끝맺을 수 있을까? 업의 법칙, 인과법을 기억함에 의하여,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남으로부터 저것이 일어난다. 만약 이것이 존재하지 않으면 저것이 존재하지 않고, 이것이 그침으로부터 저것이 끝인다.” 원인 없이는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만약 원인을 제거하면 결과는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고통이 일어나는 과정을 돼 돌릴 수 있습니다:

만일 무지를 제거하여 완전히 멈추면, 반응(行)이 끝나고;
반응이 끝나면, 의식이 끝나고;
의식이 끝나면, 명색이 끝나고;
명색이 끝나면, 여섯 가지 감각(六入)이 끝나고;
여섯 가지 감각이 끝나면, 접촉이 끝나고;
접촉이 끝나면 감상(sensation)이 끝나고;
감상이 끝나면 탐욕과 증오(愛)가 끝나고;
탐욕과 증오가 끝나면, 집착(取)이 끝나고;
집착이 끝나면, 이루어지는 과정(有)이 끝나고;
이루어지는 과정이 끝나며, 生이 끝나고;
생이 끝나면, 老死와 더불어 괴로움, 슬픔, 정신과 육체의고통과 고민이 끝납니다.
이와 같이 모든 고통의 덩어리는 끝납니다.

만약 우리가 무지를 끝낼 수 있으면, 모든 고통을 불러오는 눈 먼 반응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 고통은 없을 것입니다. 만일 더 이상 고통이 없다면 우리는 참된 평화와 참된 행복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통의 바퀴는 해탈의 바퀴로 바뀔 것입니다.

이것이 고타마 싯닫타 태자가 정각을 성취하기 위하여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다른 사람들이 하도록 그가 가르친 것입니다. 그는 말하기를,

당신의 자신에 의하여 나쁜 짓을 저질므로 써
당신은 당신 자신에게 때를 묻게 한다.
당신 스스로 나쁜 짓을 하지 않으므로 써
당신은 당신 자신을 정화한다.

우리는 우리들의 고통이 일어나게 한 원인인 반작용에 대한 책임을 각자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책임을 순수하게 받아 들이므로 써,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고통을 소멸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5) 상속하는 존재의 흐름

조건 지어진 생의 바퀴에 의하여 재생(再生) 혹은 samsara하는 과정을 부처님께서 설명하셨습니다. 부처님 당시 인도에서는 이 개념이 사실이라고 보편적으로 받아졌습니다. 오늘 날 이 개념은 많은 사람들에게 생소하거나, 아마 받아들일 수 없는 교리인지도 모릅니다. 이 개념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기 전에 스스로 무엇이 옳은지 그런지 이해하여야 할 것입니다.

Samsara는 존재의 윤회입니다. 과거에서 미래의 생으로 계속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동은 우리를 생 다음에 생으로 가지 않을 수 없게 하는 힘입니다. 각 생애는 낮든 높든 우리들이 행한 행동이 천하고 고귀한 것과 같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이 생애에서 행한 행동에 대하여 다음 생애에서 상을 받거나 벌을 받는다고 하는 것을 가르치는 많은 종교들로부터 그 개념은 본질적인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가장 고귀한 존재에서까지도 고통은 찾을 수 있다고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행운이 있는 재생을 위하여 노력할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어떠한 재생도 전적으로 행운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오히려 모든 고통으로부터 해탈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통의 윤회에서부터 자유로워 질 때, 우리는 아무 것도 섞인 것이 없는 행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 행복은 이 세상의 어떠한 즐거움보다도 행복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바로 이 생애에서 그러한 행복을 경험할 수 있는 길을 가르치셨습니다.

Samsara는 반복되는 육체적 형상을 취하여 고정된 주체를 유지하는 영혼이나 자신의 윤회와 같이 널리 알려진 idea는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것은 정확하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생애에서 다음 생애로 전달되는 불변의 주체는 없다고 부처님은 주장하셨습니다. “그것은 마치 암소로부터 우유가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우유에서 응유(curd)가 나오고; 응유에서 빠다(butter)가 나오고; fresh butter에서 clarified butter; clarified butter에서 creamy skimmings가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우유가 있을 때, 이것을 curds 혹은 fresh butter, 혹은  clarified butter, 혹은 skimmings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언제나 지금 존재하는 형태를 참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과거와 미래의 것은 참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고정된 자신이 다음 생으로 윤회한다는 원리를 인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과거와 미래의 존재가 없다고 하는 것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에 우리들의 행동이 존재가 일어나는 과정에 자극을 주는 한, 단지 일어나는 과정이 한 존재에서 다른 존재로 계속한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현재 이외에 다른 존재를 믿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조건 지어진 생의 바퀴는 그와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들 자신의 눈이 가려진 맹목적인 반응을 하는 무지한 매 순간에 우리는 여기에서 지금 경험하는 고통을 만듭니다. 만약 우리가 무지를 제거하고 맹목적인 반응을 멈추면, 우리는 그 결과로서 일어나는 평화를 여기에서 지금 경험할 수 있습니다. 천당과 지옥은 지금 여기에 존재합니다. 이것을 이 생애에서 이 몸에서 경험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혹시 어떤 사람이 다른 세상이 없고 좋은 행동에 대한 미래의 보상도 없고 나쁜 짓을 한 사람에게 벌을 주는 일도 없다고 믿더라도, 바로 이 생애에서 그 사람은 자신을 모든 증오, 나쁜 마음, 근심 등으로부터 자신을 자유롭게 유지하므로 써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과거와 미래의 존재에 대하여 믿든 믿지 않든 간에 우리는 여전히 현재 생애의 문제에 직면합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우리들 자신의 눈 먼 반응에 의하여 생긴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문제들을 지금 해결하는 것입니다. 반응의 습관을 멈춤에 의하여 우리들의 고통을 끝나게 하는 방향으로 단계 단계 걸어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해탈의 행복을 지금 경험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