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유』 읽은 고 김수환 추기경 님
                   “이 책이 아무리 무소유 말해도 이 책만큼은 소유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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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法頂) 스님은 유서를 두 번 남겼다. 첫 유서도, 마지막 유서도 가슴을 때린다. 첫 유서는 1971년에 썼다. 39년 전이니 법정 스님이 39세 때였다. 유서의 제목은 ‘미리 쓰는 유서’. 거기서 법정 스님은 자신의 장례식 풍경을 이렇게 그렸다. “장례식이나 제사 같은 것은 아예 소용없는 일. 요즘은 중들이 세상 사람들보다 한 술 더 떠 거창한 장례를 치르고 있다. 그토록 번거롭고 부질없는 검은 의식이 만약 내 이름으로 행해진다면 나를 위로하기는커녕 몹시 화나게 할 것이다.”

‘미리 쓴 유서’처럼 법정 스님의 삶도 간결했다. 1932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 목포에서 자란 스님은 목포상고와 전남대 상과대학 3학년을 수료했다. 스무 살 즈음에 한국전쟁을 겪었다. 동족상잔의 비극 속에서 그는 인간과 존재라는 물음과 직면했다. 학창 시절, 밤을 새우며 그걸 묻고 또 물었다. 그리고 스물네 살 때, 싸락눈이 내리던 어느 날 집을 나왔다. 그저 “자유인이 되고 싶다”는 심정이었다.

서울로 간 그는 안국동 선학원에서 조계종 초대 종정을 지냈던 효봉 스님을 만났다. 그리고 출가의 결심을 밝혔다. 그 길로 출가자의 삶, 수행자의 삶을 살았다. 부도만 남아 있던 전남 송광사 불일암 터에 토굴을 짓고 홀로 살면서 독서와 수행에 매진했다. 거기서 쓴 에세이집 『무소유』(76년 출간)는 밀리언셀러가 됐다. 요즘도 ‘불교=무소유’의 등식을 떠올리는 건 순전히 법정 스님의 공이다. 법정 스님은 이웃 종교에도 열려 있었다. 친분이 무척 두터웠던 김수환 추기경은 『무소유』를 읽고서 “이 책이 아무리 무소유를 말해도, 이 책만큼은 소유하고 싶다”고 말할 정도였다. 공교롭게도 김 추기경의 선종 1년여 만에 법정 스님도 입적했다.

『무소유』를 통해 법정 스님은 불교계의 가장 대중적인 아이콘이 됐다. 당시만 해도 출가한 스님이 세상을 향해 수필집을 낸다는 건 과감한 도전이었다. ‘다분히 세속적인 활동’으로 치부하는 절집의 눈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 그런 맥락에서 법정 스님은 ‘선구자’였다. 스님의 에세이집과 법문집은 출간될 때마다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다. 수행자의 구도심, 불교적 메시지, 수필가의 감수성, 현대적 언어가 맞물리면서 세상 사람들에게 가장 대중적인 불교 서적으로 다가갔던 것이다.

스님은 서울 성북동의 음식점 대연각을 고 백석 시인의 연인이었던 김영한씨로부터 시주 받아 97년에 길상사를 열었다. 그래도 강원도 모처의 오두막으로 훌쩍 떠났다.- 인연을  강조하심
(현성스님 법문 3/21)

북한산 자락이 끝나는 성북동 기슭에 자리한 길상사는 한 때 우리나라
 제일의 요정 대원각이 있었던 곳이다.

60년대 말 삼청각, 청운각, 대원각이 최고급 요정이었다.

술과 음기(陰氣)를 팔던 자리가 부처님을 섬기는 절로 변한 것이 인연이라고나 할까.

불가에서 가장 성스럽게 치는 연꽃은 가장 더러운 진흙에서 피듯이 이 절은
 대원각 요정의 주인이었던

김영한(불명 吉祥花)이 죽기 전 법정스님에게 기증하여 절로 탈바꿈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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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한(1915~1999), 기명(技名)은 진향(眞香)이고 필명은 자야(子夜)이다.

그녀는 시인 백석을 지독히 사랑했던 기녀이며 백석 또한 그녀를 위해서
 많은 연애시를 썼다.

백석이 북으로 떠난 후 38선 때문에 그와 생이별한 그녀는 백석을 잊기 위해
 혼자서 대원각을 열었다.

우리나라 제일의 요정을 일구어 낸 여걸이었지만 백석이 죽도록 보고 싶으면 그녀는 줄 담배를 피워 댔다.

그 담배 연기가 이 가련한 여인을 그냥 두겠는가, 기어이 그녀를 폐암으로
 몰아넣었다.

죽음이 임박해지자 김영한은 자신이 운영하던 요정은 절에, 자신이 만지던
 2억원의 현금은

백석 문학상 기금으로 내 놓는다.

 

그리고 '내사랑 백석'(1995년 문학동네)과 '내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은 이름
'(창작과 비평)을 출간 했다.

기자가 물었을대, 시루로 천억을 내 놓았는데 후회되지 않냐고, 무슨 후회?
 라고 반문했다나봐,

그 사람이 언제 제일 생각나냐고? 그랬더니 사랑하는 사람 생각나는 데
 어디 때가 있나!

그랬대요 기자가 다시 물었대요, 그 사람이 어디가 그리 좋으세요
 '천억이 그 사람의 詩 한 줄만도 못해,

 다시 태어나면 나도 시를 쓸거야' 라고 - 이생진 詩 '그 사람을 사랑한 이유'에서 -

삶이 무어냐고 묻고 싶거든 길상사를 찾아 가면 수목 우거진 언덕 한켠에
김영한의 비석 하나가

외롭게 서 있다.그 김여사 자야는 길상사가 문을 연지 2년만인 1999년 83세에
훌훌 서방 정토

세계로 떠난 여인이요, 백석을 위해 전생의 삶을 보낸 멋쟁이 여인이다.

 

그의 유해는 유언대로 눈이 하얗게 쌓인 길상사에 뿌려졌다.

김영한은 가난한 탓에 약한 신랑에게 몸 팔려간 15살에 우물가에서
 빨래하는 사이에 남편이

우물에 빠져 죽는 불운을 맞는다. 남편을 잃고 시어머니의 고된 시집살이
 끝에 눈물을 머금고

집을 나온 그녀는 기생의 길을 갈 수 밖에 없 었다.

가무와 궁중무를 배워 서울의 권번가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삼천리'문학에 수필을

발표할 정도로 시와 글, 글씨, 그림에도 재능이 뛰어난 미모의 기생이었다.

흥사단에서 만난 스승 신윤국의 도움으로 동경 유학까지 떠나게 되지만
 스승이 투옥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해서 함흥 감옥으로 찾아 갔으나 만나지 못하고
 대신 함흥 영생여고보 교사들

회식 장소에 나갔다가 영어 교사로 근무하고 있던 백석과 1936년
 운명적으로 만난다.

 

 함흥에서는 그가 교사의 신분으로 남의 이목도 있고 했기에,
 백석이 김영한의 하숙으로 와서

함께 지내다 돌아가는것이 고작이었다. 김영한이 서울로 돌아가자
 백석은 아예 그녀 때문에

학교에 사표를 내고 서울로 올라와서 조선일보에 근무한다.
그리고 청진동에서 살림을 차리고

서울과 함흥을 오가며 3년간의 동거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나 백석의 부모는 기생과 동거하는 아들을 못 마땅하게 생각했고
 강제로 다른 여자와

결혼을 시켰으나 신혼 첫날밤부터 도망치기를 여러차례,
부모에 대한 효심과여인에 대한 사랑

사이에서 백석은 괴로워 갈등하다가 이를 벗어나기 위해 만주로 도피하자고
 제의한다.

그러나 그녀는 백석의 장래를 걱정하여 함흥에 남아 있기를 간절히 바랬지만
백석은 혼자 떠난다.

그때 백석을 따라 만주로 가지 않았던 실책으로 그를 비운(悲運)에 빠뜨렸다고
김영한은 늘

후회하며 살았다. 그 당시 백석의 심경을 나타샤를 인용해 노래한 詩가
 대표적 연애시인

'나와 나타샤와 당나귀'다. 백석(본명 백기행 1912~1955)은 오산고보를
 졸업하고 도쿄로 건너가

영문학을 공부하고 1930년 조선일보에 시를 투고하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잘생긴 얼굴과 젠틀한 성품, 게다가 청산유수의 말솜씨로 미인들의
 마음을 사로 잡았던

댄디보이(Dand boy)였다. 그러나 백석(白石)은 많은 여인들중
 자야(子夜)만을
 사랑하였으며 백석의

아름다운시(詩)는 시인과 기생의 정염(情炎)을 넘어서 깊고 넓은 그리고

애틋한 사랑의 실체를

느끼게 한다. 해방이 되자 백석은 만주에서 함흥으로 돌아왔지만
김영한은 이미 서울로 떠나버렸고

다시 그녀를 찾아 서울로 가려 할 때는 38선이 그어져 그들의 사랑은
 이승에서 잇지 못하고 만나지

못하게 된다. 분단이 만들어 낸 또 하나의서글픈 사랑의 기록이다.

 

그 후 백석이 북한 체제에서 어떻게 살아갔는지는 알려진 바 없지만 90년대
 중반까지 살았 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재북작가인 탓에 그의 시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불교적인 영향을

받은 큰 시인이었다. 같은 하늘 아래서 영영 만날 수 없는 사랑,
 이별의 아픔을 이겨내기 위함일까.

그녀는 오로지 재산 모으는데 전념을하게 된다. 그러나 돈을 모을수록
허전함은 더하고 모진

세월마져 백석에 대한 사랑을 사그러들게 하지는 못했다.
생전에 김영한은 백석의 생일인 7월 1일이

되면 하루 동안은 일체의 음식을 전혀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한다.

 

자야는 백석이 진정으로 사랑했던 단 하나의 여인이었고,
그녀 또한 백석에 대한 그 사랑을 평생

올곧게 간직했던 여인이었다. >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내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디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女僧(여승)] 백석 여승은 함장하고 절을 한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佛經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늬 산 깊은 금덤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어린 딸아이를 따리며 가을밤 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山꿩도 설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山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 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이 詩는 기구한 삶을 살다 여승이 된 한 여인을 두고 쓴 것이나
웬지 김영한과의 사랑을 예언적으로 쓴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사람으로 태어나 만고풍상을 겪으며 인생을 살아가면서 한사람에게 지워지지
않은 이름으로 모든이에게 기억되는 사랑으로 살아간다는건 참으로 행복한일
 일것이다.,,,

누군가와 함께 있어야 삶이 빛나듯이 두 사람의 사랑과 인생,
그리고 문학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면서 많은 것을 느끼게 합니다



 길상사에선 회주 자격으로 봄·가을 정기법회 때만 법문을 했다. 법정 스님의 법문은 늘 사회적 이슈와 마음의 향기를 동시에 겨누는 ‘쌍권총’이었다. 글쟁이답게 A4지에 빼곡하게 미리 준비한 법문 원고를 읽을 때면 길상사의 법당과 뜰도 늘 1000여 명의 대중으로 빼곡했다. 법문에서 스님은 “아쉬운 듯 모자라게 살아라” “더울 때 내가 더위가 되는 게 순리다”라는 그윽한 얘기부터 “주지 자리를 놓고 다투는 작태는 출가정신의 부재에서 비롯된다. 가사 입은 도둑들이나 벌이는 짓”이라고 불교계 내부의 폐단을 통렬하게 지적하기도 했다.

법정 스님은 지난해 봄 이후 병이 깊어져 길상사 정기 법회에 나오지 못했다. 폐암으로 몇 차례 수술도 받고, 제주도에서 요양도 했다. 두 달 전에는 서울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에 입원했다. 5일 오후 병실에 누워 있는 법정 스님을 직접 만났다. 법정 스님은 주위 사람들과 말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앙상하게 마른 몸에 산소마스크를 댄 호흡은 꽤 힘겨워 보였다. 병실 탁자에는 가수 노영심씨가 노란 종이에 적어 놓은 짧은 메모가 있었다. ‘문병객은 차분하게 오가고, 법정 스님을 위해 기도해 달라’는 부탁성 글이었다.

최근 법정 스님은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그건 39년 전의 ‘미리 쓰는 유서’를 잊지 않은 유서였다. 법정 스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신신당부했다. “내 장례식을 하지 마라. 관(棺)도 짜지 마라. 평소 입던 무명옷을 입혀라.” 스님의 유언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내가 살던 강원도 오두막에 대나무로 만든 평상이 있다. 그 위에 내 몸을 올리고 다비해라. 그리고 재는 평소 가꾸던 오두막 뜰의 꽃밭에다 뿌려라.”

스승의 무심한 유언에 제자와 신도들의 마음은 섭섭할 수도 있는 법이다. 행여 스승의 유언을 어기고 출가 본사인 송광사로 가서 대대적인 장례의식이라도 거행할까 봐 법정 스님은 변호사까지 불러 재차 당부했다고 한다.

지난해 여름, 강원도 오두막에서 병마와 싸우던 법정 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때로는 한밤중 소나기가 잠든 숲을 깨우며 지나가는 소리에 나도 잠결에서 깬다. 숲을 적시는 밤비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있는가? 그것은 한밤중 적막의 극치다!” 많은 이에게 법정 스님의 ‘맑고 향기로운 법문’은 ‘잠든 숲을 적시는 밤비 소리’였다. 이제 그 ‘밤비 소리’가 자연으로 돌아간다. 산 넘고 물 건너 강원도 오두막의 꽃밭으로 돌아간다. 덜렁 세상에 남은 것은 ‘밤비 소리’를 그리워하는 우리들 가슴의 메마른 숲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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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스님이 걸어온 길

▶ 1932년 전남 해남 출생, 목포상고·전남대 상과대학

▶ 54년 효봉 스님의 제자로 출가

▶ 군사 정권 시절 함석헌·장준하 등과 민주화 운동에 참여

▶ 한글대장경 역경위원, 불교신문 주필, 송광사 수련원장 역임

▶ 70년대 후반 송광사 불일암에 주석

▶ 76년 수필집 『무소유』 출간

▶ 92년 강원도 오두막으로 떠남

▶ 97~2009년 서울 길상사를 열며 회주로 봄·가을 정기 법회

▶ 2009년 폐암 재발 후 요양

▶ 2010년 3월 11일 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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