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差別)과 무차별(無差別)

2009.04.20 23:34

현성 Views:6985

얼마 전(2008년)에 90평생 불교를 믿어온 신자가 양로원에 가 있게 되었다. 그 보살 슬하에 딸이 셋이 있었는데 기독교를 믿는 두 딸이 자기 어머니에게 기독교를 믿어야 천국에 가고 불교를 믿으면 지옥에 간다고 어머니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가 죽을 임시에 영세를 받게 되고 장례식을 기독교식으로 했다.

딸 셋중 맏딸은 두 동생에게 어머니가 건강하실 때 너희들 보고 불교를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고 했느냐? 너희들이 원하는 기독교를 못 믿게 한 적이 있느냐? 너희들이 좋으면 좋다고 하시지 않았느냐? 너희들은 왜 어머니가 평생을 믿어온 불교를 죽음에 임해 개종을 시키려고 하느냐고 극구 개종을 반대 했지만 가정불화만 심해 질 뿐 소용이 없었다고 한다.

 

금년에 또 다른 불교신자가 수술을 받았는데 아들과 딸이 기독교를 믿어야 회복이 빠르다고 목사님을 모시고 와 세례를 받게 했다. 환자인 아버지는 아들딸이 기독교를 믿어야 회복이 빠르다고 하니 아들딸의 뜻에 응했으나, 병세가 오히려 악화되게 되었는데, 그 때는 두딸이 임종기도를 받아야 천국에 간다고 목사님을 모시고 와 임종기도를 했다고 한다.

이 때 환자의 부인이고 아들딸의 어머니 되시는 보살이 천국이 어디에 있느냐? 너희들이 가봤느냐? 쓸 대 없는 짓 그만하라고 해도 나이든 탓으로 자기의 아들딸이지만 당할 수가 없었고, 환자는 77세를 일기로 지난 3월 23일 유명을 달리 하게 되어, 기독교 의식을 따라 장례를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돌아가신 분의 부인이신 보살에게는 그동안에 아들딸들과 종교 갈등으로 있었던 일들이 너무나 가슴 아팠다고 한다. 저희들이 기독교를 믿고 싶으면 저희들이나 믿을 일이지 왜 부모가 믿어온 신앙을 70이 넘어 병들어 쇠약해 졌다고 그대로 두지 않으려고 하니 답답할 뿐이다. 천국은 무슨 놈의 천국이 어디에 있다고 그 야단인지 너무나 괴로워 천국이고 지옥이고 모든 것이 다 싫어졌다고 하셨다.

 

이러한 일들은 차별과 무차별의 도리를 모르는 무지에서 비롯된다. 불교를 믿는 사람들이 이 종교를 믿든 저 종교를 믿든 좋은 일을 하기만 하면 좋다고 하는 것은 기독교와 불교는 믿는 대상이 달라 종교는 차별이 있지만 좋은 일을 하기 위한 종교의 목적으로 볼 때 차별이 없다(無差別)고 보는 것이므로 남의 종교를 비하(卑下)하거나 폄하(貶下)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기독교는 원천적으로 다른 종교에 비해 우월성이 있음을 믿고 주장하고 과감하게 다른 종교를 폄하하고 강압적으로 개종시키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믿는 대상의 차별성(差別性)을 주장할 뿐만 아니라 실천면에서도 철저하게 차별성을 주장하므로, 어느 때 어디에서나 호전적(好戰的)인 종교가 될 수밖에 없다.

차별성만 있고 무차별성이 없는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종교적인 착각을 일으키고 그 착각에서 또 다른 착각으로 유전(流轉)하여 가는 결과 부활하신 예수님의 본래의 가르침에서 지나치게 멀어지게 되어도 멀어지게 된 사실을 인식하지도 못하고, 또 인식했다고 하더라도 되돌릴 수 없는 어려움이 있다. 왜냐하면 차별성을 만회할 수 있는 무차별성이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같은 교회에 나가는 기독교 신자 10명이서 같은 교재로 같은 목사의 가르침을 받아 성경(Bible) 공부를 했다고 가정할 때, 그 10사람이 이해한 성경은 교재로 한 성경과 같을 수 없고, 또 그 목사의 성경 이해와 같을 수 없으며, 그리고 10사람 각자가 이해한 성경도 같을 수 없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이지만 목사의 이해와 합하면 11가지 다른 성경의 이해가 나온 것이다.

어떻게 하여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는가? 그것은 10사람 각자에게 과거로부터 기억하여 누적된 정보가 있는데, 그 각자가 이미 가지고 있는 정보가 그 성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또 성경의 이해를 지배하기 때문에 각자가 목사님이 가르친 성경과 같을 수 없고, 각자마다 이해한 성경도 다르기 마련이다. 이와 같이 각자에게 기억되어 지는 정보가 쌓여가는 과정이 다르게 반복됨에 따라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를 비하하는 기독교신자들은 그들이 알고 있는 기독교가 참기독교라고 착각하고 기독교인답지 않는 행동을 과감히 할 수 있게 되어 불교를 믿는 사람들 중 의지가 약해진 나이 드신 자기의 부모님들을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무차별(無差別)적 신행생활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일체 사물과 마음의 작용에는 차별과 무차별이 공존하고 있다. 바다의 파도의 크기로 보면 차별이 있지만 물이라는 면에서 보면 무차별이다. 파도가 물인 것을 모르고 파도만 보는 사람은 파도를 다 이해 했다고 할 수 없다. 크고 작은 산의 아름다움만 보면 산마다 차별이 있지만 모든 산은 흙으로 되어 있다는 면에서는 무차별이다.

흙으로 된 무차별을 이해하지 못하고 산의 차별만 볼 수 있는 사람은 참되게 산을 이해했다고 볼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사람의 모양과 색깔로 보면 사람마다 차별이 있지만 인간의 존엄성의 입장에서 보면 무차별이다. 그러나 우리들의 일상생활에서는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학식이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 잘 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 등으로 차별화하는 것이 보편화 되어 있다.

 

이러한 모든 차별적인 생각은 모두 과거로부터 쌓인 기억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한 사건을 놓고 보험 하는 사람의 시각, 당사자의 시각, 변호사의 시각, 의사의 시각, 그리고 사람마다의 시각이 다른 것은 그들에게 쌓인 기억의 정보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다. 이들에게 쌓인 기억의 정보가 계속 쌓여 가고 있는 한 어떠한 사건의 실상도 있는 그대로 파악될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이 가진 모든 선입견, 고정관념, 욕심 등을 모두 놓아 버리는 것이 그 사건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파악할 수 있는 기본이라고 보는 것이 불교에서 강조하는 무차별(無差別)을 위한 수행이다.

차별적인 식견을 가지고 사리(事理)를 보되, 그 차별 속에서 무차별적인 의식을, 그리고 무차별적 의식 속에서 차별을 보지 않으면 참다운 중도(中道)를 잃게 되고, 중도를 잃은 견해(見解)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고 보는 이치이다.

그리고 불교와 기독교의 교주는 다르지만 그 교주들이 추구하는 실체는 일체 차별적인 기억에서 오는 의식을 여읜 무차별의 세계이지만 그 실체를 부르는 이름이 종교마다 다를 뿐이라고 생각한다.

 

대한불교조계종 시카고 불타사 주지 현성 합장

불기 2553(2009)년 4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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