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와 불교

2009.03.09 15:08

현성 Views:7040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누구나 평화를 갈망하지만 평화는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돈, 사랑, 명예에 걸리고, 건강과 죽음에 걸리며, 미래의 불확실성 등에 걸리기 때문이다. 이들은 모두 사람들이 ‘자기 생각과 관념’에 스스로 집착함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누구나 자기의 생각이라는 잣대로 좋고 나쁘고, 옳고 그르고, 길고 짧고, 사랑스럽고 추하다고 분별하고 비판하지만 정작 자기가 사용하는 자기의 잣대의 눈금이나 저울의 추가 얼마나 정확한지를 아는 사람은 없다. 이러한 사람들의 비판은 공평성과 보편성이 따르지 않아 사람들은 오히려 불협화음에 시달리게 된다.

부처님께서는 평화를 위해 각자가 가지고 있는 잣대와 저울을 버리고 일체 생각과 관념, 편견(偏見)과 편애(偏愛)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하셨다. 즉 해탈해야 한다. 해탈을 하면 모든 걸림과 일체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되는데, 걸림 중에서 가장 큰 걸림은 죽음의 걸림이고, 두려움 중에서 가장 큰 두려움도 역시 죽음이다. 죽음의 걸림이나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으면 일체 걸림이나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고 하셨다.

 

부처님께서 사라쌍수 나무 아래서 열반하시어 관속에 모시고 화장(火葬)할 준비를 마치고 가섭존자가 오시기를 대중이 기다리고 있었다. 가섭존자가 부처님 열반소식을 듣고 7일이 걸려 그 자리에 도착하여, 부처님이 계신 관을 세 번 돌고 난 다음 부처님 발쪽에 서서 합장하고 부처님께 예를 올리니 부처님의 두 발이 관 밖으로 나왔다고 한다.

이는 비록 몸이 죽었다고 하여도 영(靈)이 살아 있어 가섭존자가 그 자리에 와 있음을 아신다는 응답이라고 해석한다. 이러한 응답은 죽고 사는 문제로 일어나는 걸림이나 두려움에서 완전히 해탈한 사람의 영(靈)은 푸른 하늘과 같이 맑고 밝아 모든 것을 다 보시고 알고 계심을 보이신 것이고, 가장 지고(至高)한 평화를 얻었음을 보이신 것이니 이를 불교에서 극락 혹은 열반이라고 한다.

 

우리들의 일상생활에서 걸리는 문제는 주로 돈, 명예, 사랑의 문제에서 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돈, 명예, 사랑 등은 나쁜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이고 우리들의 삶을 다양하게, 재미있고 흥미롭게, 희망과 꿈을 가지고 의욕적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동력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이익에 집착하게 되면 정신문화의 정서에서 멀어져, 사회에는 육체와 돈만 있고 사람이 없게 되니 윤리와 도덕관이 무너지고 빈부의 차가 극심하게 되어 국가와 사회는 불안해 지고, 투쟁의 장으로 변하게 되므로 이를 사전에 예방하기 위해 부정(不正)한 마음으로 그들을 탐(貪)하지 말라는 뜻을 불교에서는 강조한다.

 

어떠한 것이 부정(不正)한 탐욕인가?

부처님께서 다자탑(多子塔)앞에서 설법을 하실 때, 그 탑 앞에 수많은 대중이 모여 앉아 있어 늦게 도착한 가섭존자가 뒷자리에 서 있는 것을 부처님께서 보시고 가섭존자에게 손짓을 해 앞으로 오게 해서 자기 자리를 반(半)으로 나누어 가섭존자가 앉게 하고 설법을 계속하셨다. 이를 다자탑에서 분반좌(分半座)라 하여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부처님께서 법(法)을 전하신 세 가지 법 중 하나로 유명하다.

이는 영(靈)이 있는 모든 생명체에는 불성(佛性)이 평등하게 갖추어져 있으나 현실에서 각자가 가지고 있는 업(業)에 따라 차별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가섭존자같이 그 업을 다 소멸한 사람은 ‘누구나 나와 똑 같은 성인(聖人)’이 될 수 있는 법이니 불성을 가진 일체 중생을 평등하게 공경해야 함을 말로서가 아니라 행동으로 보이신 것이다.

이 평등사상은 ‘나와 남과의 상호(相互)관계는 항상 평등’하게 이루어져야 함을 설하고 있다. 인류 역사상 국가와 국가 간의 불평등조약, 인종차별, 남녀차별, 지방색 차별, 종교차별, 빈부(貧富)차별, 노소(老小)차별, 자연을 무시하는 행위 등 수많은 차별적 행위가 가정의 행복, 사회화합, 세계평화에 가장 큰 장애 요인이 되어 왔던 것이다.

이러한 평등사상은 반드시 개인의 자유가 밑받침이 되어야 함을 불교에서는 설하고 있다.

 

부처님께서 영축산에서 설법하실 때 부처님께서 갑자기 연꽃 한 송이를 들어 올렸다. 이를 본 가섭존자가 빙그레 웃었다. 이를 염화미소(拈花微笑)라고 하는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는 부처님의 자유로운 의사가 연꽃으로 표현된 것이고, 그 뜻을 가섭존자가 자연스럽게 이해하였음을 나타낸 것이다. 이는 표현의 자유를 갖는 능자(能者)와 그에 감응(感應)하는 자유를 가진 소자(所者)의 마음이 합일(合一)된 모습을 보인 것이다. 이 역시 일체 걸림이 없어진 두 분의 마음이 저 푸른 하늘과 같이 맑고 밝아 그 뜻이 서로 걸림 없이 소통될 수 있는 자유이다.

자유를 잃은 사람에게는 지혜와 주인 의식이 없다. 지혜가 없는 사람은 자기의 고통을 소멸할 수 없고, 남에게 유익한 일을 하지 못한다. 자유가 없는 사람에게서 주인의식을 기대할 수 없고, 주인의식이 없는 사람은 책임감, 자주(自主), 자조(自助), 자립(自立) 정신이 없다. 이러한 이유로 불교에서는 평화를 위해 개인의 자유를 필수로 꼽고 있다. 참다운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사람은 자업자득(自業自得)의 이치를 알아 책임감이 투철하고, 수처작주(隨處作主)라 하여 어느 때 어느 곳에 있더라도 항상 주인의식을 갖는 사람이 된다. 이것이 바로 현대 민주주의의 근본이 되는 사상이다.

 

자유인(自由人)은 상대방의 입장에서 말을 들을 줄 알고, 전체에 미치는 영향을 감안하여 자기 입장을 정리할 줄 안다. 그리고 이 시간 이 자리에 주어진 모든 것에 감사하고, 삶에 즐거움과 보람을 느낄 줄 알며, 전체를 위해 무궁한 발전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게 되어 스스로는 행복하고, 그의 가정은 화목하며 사회를 평화롭게 할 수 있는 주인이 된다.

불교를 믿는 불자님들은 이 위대한 불교의 자유, 평등, 평화의 삼대사상을 투철하게 인식하고 매일 생활을 그와 같이 하시리라 믿는 바다.

 

대한불교 조계종 시카고 불타사 주지 현성

2009년 3월 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