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성지 순례기(3)

2007.02.25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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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성지 순례기(3) - (현성스님, 2005.3.13.)


1월 17일 아침 식사 후 버스 편으로 산치로 이동하여 기원전 300년 전에 아쇼카대왕이 세운 불교 조형미술의 원형(元型)이라고 할 수 있는 산치 대탑을 참배하였다. 산치 대탑에 얽혀 있는 전설이 있다.

아쇼카가 왕자시절에 하도 말을 듣지 않고 장난이 심하여 왕가에서 쫓겨나 이 도시 저 도시로 돌아다니다가 한 여인을 알게 되어 재미있게 살고 있었다.

그 때 왕가에서는 이웃 나라와의 전쟁에 패하여 왕이 고민하고 있을 때 한 대신이 왕에게 혹시 아쇼카 왕자를 장군으로 임명하여 군사를 일으켜 전쟁에 임하게 하면 어떻겠느냐고 건의하였다. 왕도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어 아쇼카를 찾아오게 하였다.

왕의 칙명을 받은 아쇼카는 그 때 아쇼카의 여인이 임신했을 때라 정표를 하나 주며 급한 일이 있으면 이것을 가지고 나를 찾아오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그 후 그 여인은 아들을 낳았다.


아쇼카 왕자는 왕명을 받아 장군으로서 군사를 일으켜 그 이웃 나라와 다시 싸워 그 나라를 완전히 항복받았다. 왕은 대단히 기뻐하면서 다시 왕자에게 또 다른 이웃을 정복할 것을 명하였고, 왕자는 왕명을 받들어 싸워 그 이웃도 정복하였다. 이 두 전쟁에서 왕은 아쇼카 왕자가 왕이 될 수 있는 자격이 충분히 있다고 확신하여 왕위를 아쇼카에게 계승시켜 주었다. 왕위에 오른 아쇼카왕은 계속 이웃 나라들을 정복하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아쇼카왕의 여인은 자기가 낳은 아들이지만 이 아들은 왕자의 몸이라 더 이상 자기가 기를 수 없다는 생각에 아들에게 아버지가 준 정표를 가지고 아쇼카왕을 찾아가게 하였다.

아쇼카왕은 대단히 기뻐하며 그 여인을 왕궁으로 모시고 오게 하였으나 그 여인은 (서민이 아니면 천민이었는지 모르지만) 병을 빙자하며 한사코 왕궁에 가는 것을 거절하고 편지 한 장을 보냈다.

내용인즉 “나는 부처님을 의지하면서 살고 싶고 또 이 곳에 부처님을 의지하여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으니 이 곳에 부처님의 사리탑 하나를 조성하여 주시면 더 이상 대왕에게 바랄 것이 없습니다.”였다. 이를 읽은 대왕은 그 당시 최고 건축가와 조각가들로 하여금 부처님의 사리를 구하여 그 여인이 살고 있는 곳에 부처님의 사리 대탑을 세우게 하였다.

그리고 그 대탑의 사방에 문을 세우고 그 문에 부처님의 상을 조각한 대문을 조성하게 하였다. 이것이 불교 조형미술의 원형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아쇼카왕이 이 탑을 세운 후 이 탑에 수많은 사람들이 와서 참배하는 것을 보고 아쇼카왕은 전쟁보다 탑을 조성하여 백성들의 신앙의 욕구를 만족시켜주는데 정성을 모으게 되었다.

아쇼카대왕은 인도 전국을 통일하고 가는 곳마다 사리탑을 세워 8만4천 개의 탑을 조성하여 불법을 전하여 백성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되었다. 당시 인도에 사성(四姓) 계급이 성하던 시대에 서민과 왕자와의 사이에 얽힌 애절한 사랑의 표현인 동시 그 사랑의 힘의 신비성과 위대성을 보여주는 대왕의 성업(聖業)이다.

산치대탑 참배 후 우리 일행은 특급열차편으로 아그라에 도착하여 호텔에 투숙하였다.


1월18일 화요일 아침 식사 후 세계 5대 불가사의 건축물인 타즈마할(Taj Mahal)과 15, 6, 7세기 인도를 지배한 무굴왕조의 도성인 아그라성을 관람하였다.

1612년에 무굴제국(Mughal Emperor)의 대왕 샤자한(Shah Jahan)은 세 번 째 왕비로 19세의 뭄타즈마할(Mumtaz Mahal)을 맞이하였다. 그 후 19년간 왕비로서 뿐만 아니라 왕의 정치고문으로 훌륭한 참모역할을 하였으며 전쟁터에까지 가서 왕을 보필한 명실상부한 왕의 반려자가 되었다.

그러나 1631년 6월 17일 14번째 애기를 분만하던 중 39세로 이 세상을 마감하였다. 그 때 왕은 버한퍼(Burhanpur)를 공략하는 전쟁 중이었으나 돌아와 그의 왕비의 죽음을 보고 슬퍼하였다.

그는 그들의 사랑이 불멸하는 사랑으로 영원이 남아 있게 하기 위해 왕궁(무덤)을 조성할 것을 결심하고 착공한지 22년만에 완공하였다. 그러나 이 왕은 왕궁은 완성하였으나 왕자의 난을 만나 왕위를 찬탈 당하고 감옥에 갇혀 지낸지 8년 만에 죽었다. 그러나 왕이 감옥에서 타즈마할 왕궁을 볼 수 있게 배려하여 주고 죽은 후에 왕비의 묘 옆에 안장하였다 한다.

이 건물은 세계적인 건축 조각 미술 그리고 사랑의 표현으로 세계 5대 불가사의한 건축이 되어 유명하다.


아그라 성은 무굴제국의 왕실이 있었던 곳이다. 그 장엄하고 웅장한 규모에 감탄하였다. 우리 일행은 버스 편으로 아그라를 출발하여 기차정거장에 와서 침대열차편으로 8시간 걸려 바라나시에 19일 아침7시 경에 도착하여 호텔에 투숙하였다.

침대차에 누워있으니 앞의 두 여인 생각이 났다.

한 여인은 아쇼카의 야인시절 같이 산 여인으로 왕이 다시 왕자를 찾는 행운을 아쇼카에게 안겨주었고, 아쇼카의 아들을 낳아 아쇼카대왕이 대군을 지휘하며 이웃 나라들을 정복할 때 아버지의 손발이 되게 하여 주었으며, 무력으로 나라를 정복하고 사람을 죽이는 전쟁보다 부처님의 사리탑을 세워 부처님 법을 전함으로서 전 인도를 통일하여 만백성이 존경하는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되게 하였다. 그러면서도 자기 스스로에게는 서민인 자기의 분수를 알아 왕비의 자리를 마다하고 자기와 같은 사람들과 함께 부처님께 기도하는 것으로 여생을 보냈다.

또 한 여인인 뭄타즈마할은 19세 꽃다운 나이에 왕비가 되어 왕의 사랑을 독차지하여 나라를 좌지우지하였으나 단명하여 39세에 죽었다. 죽은 왕비는 산 왕을 22년간이나 타즈마할 궁(무덤)을 건축하는데 전력하게 하여 사랑을 받고, 전 세계에서 5대 불가사의한 궁전 건축을 완공하게 하고 난 후, 왕자의 난(조선시대 방원의 난과 같은)에 의해 왕위를 찬탈당하고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타즈마할 궁을 바라보는 것으로 8년간의 여생을 마치고 그 여인의 무덤 옆에 묻혔다.


정말 남녀관계의 일은 묘(妙) 자(字) 그대로 묘하고 묘하다. 아쇼카의 여인과 같이 남자에게 항상 은은한 사랑과 행운을 전하여주는 사랑을 좋아하는 남자와 여자도 있겠지만 샤자한 왕과 뭄타즈마할 사이와 같이 말기가 불행하더라도 짧으나 한 없이 깊은 미로 속에서 화끈한 사랑을 해보고 죽고 싶은 남자와 여자도 있을 것이다.

한 없이 엮어가도 끝이 보이지 않고 닮은꼴이 하나도 없는 것이 남녀의 묘한 사랑이 아닌가? 남녀의 만남에 좋은 연도 있고 나쁜 연도 있으니 어떠한 인연이 좋은 연이 될 수 있는 인연일까?


사진첨부

37, 40, 42: 산치 대탑과 정문
41: 산치 대탑
33: 4문 중 한 문
35, 36, 38, 39 : 사방 문의 조형미술
43: 우리 일행과 타즈마할
44: 타즈마할 전경
46: 우리 일행과 아그라 왕궁에서 바라보이는 타즈마할 궁. 우리 일행이 앉아 있는 자리가 당시 왕의 자리이고 그 앞이 대신들이 앉는 자리였다고 한다. 모두 인도 무굴왕조의 왕이 된 기분으로 이 자리에 앉았다.
45: 우리 일행과 당시 타즈마할 궁 관리인의 숙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