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一)」은 부부(夫婦)사이에도 통하는 정의


불교에서는 이「일(一)」은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우주의 진리이며 이 진리는 어떠한 유일신(唯一神)에 의하여 창조된 것이 아니며, 부처님은 오직 이 진리를 깨달았을 뿐이며 이 진리는 부처님 오시기 전에도 있었고 불멸후에도 항상 여여하게 존재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진리를 깨달으신 부처님과 부처님께서 설하신 이 진리의 법과 이 법을 배워 남을 위하여 설하는 그의 제자를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라고 하여 삼위일체(三位一體)로 삼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위대한 진리를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신격화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부처님은 우주의 진리를 깨닫기 전에는 그 스스로 범부였음을 자처하고 그와 같이 수행하면 우주의 진리를 깨달아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여 49년간 부처님은 그의 제자들을 깨우치게 하기 위하여 전념하였습니다. 그리고 『금강경』에서도 1,250아라한이 등장합니다. 아라한이라고 하면 모두 이 진리를 깨달으신 분들입니다.


이 「일(一)」은 부부(夫婦)사이에도 통하는 정의(定義)입니다. 우리는 옛날부터 남자는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믿었고 여자는 땅에서 나왔다고 믿어왔습니다. 앞에서 「일(一)」에서 천지가 나왔고 천지(天地)가 나뉘기 전으로 돌아가는 것은 「일(一)」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이 부부의 사랑을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부사이에서 이 귀중한 「일(一)」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부(夫婦)가 항상 말로는 부부일체라고 하면서도 막상 생활을 하다보면 부부일체라기 보다 편의에 따라 일체이기는 하지만 참다운 의미에서 일체가 아닌 부부개체(夫婦個體)인 부부가 많습니다. 부부가 편의주의에 빠지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관계로 전향하여 가는 것입니다. 한국 커뮤니티(community)에서도 이혼율이 증가하고 있는 사실은 이를 입증하여 주고 있습니다.

불교는 그 생활자체가 불교의 수행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생활 따로 있고 불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생활불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몰라도 부부사이에서는 서로가 가지고 있는 인색한 마음을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부사이에서 인색한 마음을 오히려 버리지 못하는 경우들이 흔히 있습니다. 인색한 마음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가족보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은 가족을 편의주의에 편승하여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불교적인 입장에서는 부부라는 두 개체가 각각 완전히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상대방에 대한 인색한 마음을 버리도록 수행하며 살아가면서 두 사람이 모두 이를 성공적으로 버릴 때 부부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벽은 무너지고 완전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천지가 나뉘기 전의 하나로 돌아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사람이 인색함을 완전히 버릴 때 자기의 성품을 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바로 이 「일(一)」을 본다는 의미이고, 곧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하는 것입니다. 부부가 두 사람 사이에 놓여 있는 벽을 무너뜨리기 위하여 함께 수행하여 모든 벽이 무너진다면 이것이 곧 견성하는 자리인 것입니다. 그러니 이 「일(一)」이라는 자리가 얼마나 중요하고 귀중한 자리입니까.


2004.4.11
대한불교 조계종 불타사 주지 현성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