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성지 순례기(2)

2007.02.25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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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성지 순례기(2) - (현성스님, 2005.3.2.)


1월16일 일요일 오전8시에 오랑가바드에서 버스편으로 호텔을 출발하여 아잔타(Ajanta) 석굴사원으로 출발하였다. 가는 도중에 간단한 점심을 먹고 운행시간 7시간 정도 걸려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아잔타에는 30개의 석굴로 구성되어 있는 불교 최대(最大) 최고(最古)의 인조 석굴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석굴사원이다. 서기 기원전(BC)300년에서 기원후(AD)100년 사이에  완공한 석굴도 있고 기원후460-500년 사이에 완공한 두 그룹이 있다. 바카타카(Vakataka)왕조에 하리세나(Harisena)태자가 AD460년경에 왕위에 오른 후 그 나라에서 가장 훌륭한 건축가와 미술가들을 파견하여 석굴 불사에 전념하게 하였다. 그 때 석굴 26, 17, 18, 19, 2번이 완성되었다고 서기1800년대에 월터 스핑크(Mr. Walter Spink)라는 유명한 영국 역사학자가 주장하였다.


스핑크(Mr. Spink)보다 천년전 현장법사의 인도 기행문에 이 동굴에 대한 기록이 있다고 한다. 현장법사는 중국 당나라 스님으로 서기650년경 15년간 인도에서 불교를 공부하고 난후 당나라로 돌아와 유명한 현장법사가 되었다.


이 동굴들은 하리세나 왕이 5세기말에 죽은 후 이 석굴에 사는 사람이 없어지기 시작하여 풀과 나무 먼지 등으로 가려져 시간이 흐름에 따라 석굴을 알아 볼 수 없게 되었다.


1819년에 영국군 장교 존스미스(John Smith)가 호랑이 사냥을 나갔다가 어느 굴로 달아난 호랑이를 좇아가 그 굴에서 호랑이를 찾다가 불상이 모셔져 있는 동굴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것이 영국학계에 알려지자 많은 영국 역사학자 미술가 등이 방문하여 이를 연구한 학자들에 의해서 그 동굴은 기원전 200년경에 조성된 것으로 알려지게 되고 30개의 동굴 모두 찾아내게 되었다. 영국 학자들에 의하여 많은 연구가 있었고 1951년에 이르러서야 인도 정부에 의하여 국보로 지정되고, 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한다.


영국학자들에 의하여 아잔타라는 그 동내 이름은 현세가 아닌 ‘내세부처’라는 뜻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러면 내세에 미륵부처님이 오실 땅이라고 해석된다.


기원전300년에 인도사람들은 돌산을 파고 들어가 동굴을 만들었는데 50피트 정도의 넓이에, 70피트 깊이, 20피트 높이 정도가 한 동굴이다. 이러한 동굴이 30개나 있다. 중앙 가장 깊은 곳에 불상을 모셨는데 돔 형식으로 된 천장에 닿을 정도로 불상이 크다. 불상은 가부좌, 의자좌상, 입상 등이 있고 돔형식의 천장은 갈비뼈와 같은 형식으로 조각되어 있고 문도 말발굽 형으로 약간 긴 홍시 같이 생겼다. 천주교회에서 정문과 창문에 많이 쓰는 형식이다.


벽 쪽으로는 돌로 깎은 기둥이 천장을 받치고 있고 기둥과 기둥 사이는 200명 정도 앉을 수 있는 법당이 있다. 벽에는 한 사람이 서서 다닐 수 있는 넓이와 높이의 문이 있고 그 문 안에서 혼자 충분히 자고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이 많이 있었다. 이것은 스님들이 기거하며 공부하는 방으로 사용된 듯 했다.


어떤 동굴에는 천장을 평평하게 하여 여러 가지 벽화가 천장과 벽에 그려져 있었다. 지금은 벽화들이 많이 퇴색되었으나 1800년대에 영국 사람들이 찍은 사진은 식별할 수 있는 정도인데 이들이 책으로 나와 있다.


벽화는 주로 부처님의 전생담, 그리고 현세 등이 주제가 되어있다. 기원전에 이미 단청색을 사용하였다는 것이나, 지상도 아닌 석굴 건축술, 돌을 조각하는 조각술, 미술 등이 지금도 놀라울 정도로 발달하였음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기원전 200년에서 기원후 600년, 800년간에 꽃 피웠던 찬란한 인도불교문화, 당대에 인도에서 가장 유명한 건축가, 조각가, 미술가들이 여기에 다 모여 그들의 기예(技藝)를 마음껏 아낌없이 표현한 작품들이 아닌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모여 부처님께 기도하고 법을 배우고 깨침을 얻기 위해 수행하였기에 30개나 되는 걸작의 석굴들을 조성하였을까. 그렇게도 융성하고 번화하던 석굴도 세월의 원에 따라 변화하여 모든 사람들이 흩어지고 자랑하던 동굴사원이 잡초와 나무 먼지 등에 가려져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사라져 버렸다. 그 후 1000년이란 기간 동안 밤과 낮이 바뀌면서 세월은 무심(無心)할 수만은 없었던 모양이다.

석굴사원을 조성한 건축가, 조각가, 미술가들의 혼이 호랑이로 화현하였던지 관세음보살이 호랑이로 화현하여 사냥꾼 영국군 장교 존스미스를 1819년에 부처님을 모신 이 석굴로 인도하여 그 당시 영국과 유럽에 유명하다고하는 건축가, 조각가, 미술가들이 모두 이곳에 몰려와서 감탄하여 연구의 대상으로 삼고 그 결과를 발표하기도 하여 후에 아잔타의 30개 석굴이 불교 최대(最大) 최고(最古)의 인조 석굴로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석굴사원이 되었다. 지금은 인도 내국인은 물론 세계 각국에서 오는 관광객들, 그리고 건축, 조각, 미술, 실내장식 등을 공부하는 많은 학생들이 이를 보고 연구하여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고자하는 모습들이 보인다. 이 가운데는 물론 한국에서와 몇 달씩 머물고 있는 젊은 학생들도 있었다.


우리 일행은 아잔타 석굴사원 순례후 버스편으로 부사발에 와서, 부사발에서 열차를 타고 가며 밤을 세고 새벽3시경에 보팔에 도착하여 호텔에 투숙하였다.


<사진설명>

동굴 안 가장 깊은 중앙에 조각된 불상,
동굴 좌측 벽 입구에서 시작하여 벽 끝까지 조각된 부처님 열반상
동굴 전경
돌산과 동굴들의 외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