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탄 열차

2010.05.31 23:57

현성 Views:7105

내가 탄 열차는 고장이 자주난다. 추운 겨울에 고장이 나면 여간 힘들지 않다. 그래도 아직 못 고칠 고장은 아니다. 생각해보면, 고장이 나면 쉬고 가니 좋고, 고장이 없으면 쉴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달리니 좋다. 그러니 고장이 나도 좋은 것이요, 고장이 안 나도 좋은 것이 아닌가.

내가 탄 열차에는 꽃을 선물하는 사람들이 많다. 아름다워서 좋고 향기로워서 좋다. 꽃은 항상 새로운 삶의 힘과 열정을 일으키게 하니 좋고, 생명의 신비함을 보여주니 좋다.

어떻게 그렇게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정확하게 알고 행동할까? 그러니 꽃에도 잡초에도 의식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이 꽃들도 봄이면 움을 터고 꽃을 피우며 좋아하고, 여름이면 사랑하는 연을 만나니 좋아할 수밖에 없고, 가을이면 열매를 맺으며 좋아하지 않을까, 겨울이 되면 좋으나 싫으나 사치스러운 것이나 짐 되는 것은 모두 정리하고 다가오는 봄을 위해 충전하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계절 따라 변할 수 있는 생명에게서 무궁한 신비를 느낀다. 열차 안 밭에 심은 목단 꽃이 금년 봄에도 아름답게 피고 그 향기는 열차 안을 은밀히 정화한다. 작년에 핀 목단 꽃과 그 향기, 금년에 핀 꽃과 향기 같을까 다를까 화두를 던져본다.

 

이 열차에 탄 나는 누구인가고 생각해 본다. 아무런 바람도, 희망도, 자랑할 만한 일도 없는 나. 오직 지금 할 일을 찾아 할뿐인 나. 옳다 그르다는 것마저 가릴 수 있는 재주가 없는 나는 마치 내가 탄 열차가 언제 고장 날지 모르는 것과 같고, 아름답고 추한 것, 좋고 나쁜 것을 보는 시각이 마치 내가 탄 열차가 고장이 나면 쉬어가게 해서 좋고, 고장 없이 달리면 새로운 세계를 더 보여주니 좋다고 보는 것과 같다. 그러하니 아름다운 것은 보기 좋아 좋고 추한 것은 추한대로 쓸모가 있어 좋다.

시(是)와 비(非)를 가릴 재주도 없고, 미(美)와 추(醜), 호(好)와 불호(不好)를 가릴 능력도 없는 나지만 게으름은 어리석음의 원인이 되어, 일체 괴로움의 원인이 되고, 만병(萬病)의 원인이 되며, 남을 원망하고 남과 원수가 되는 악연(惡緣)을 맺는 원인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은 아는 나이다.

게으름을 부지런함과 비교해 봐도 게으름을 비호(庇護)할 수 있는 재주도 없다. 그러나 아무리 게으른 사람도 부지런할 수 있고, 부지런한 사람도 더 부지런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안다. 게으름이 악연의 원인이기에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기 직전에 남기신 유언 중에, “모든 법(法)은 변하고 변하는 것이니 너희들은 부지런히 도(道)를 닦는 일에 정진하라.” 하셨다. 만병에 명약은 부지런함이다. 부지런한 사람은 어두움을 밝힐 수 있고, 밝은 사람은 모든 병에서 자유로워지게 된다.

내가 탄 열차는 부지런한 사람들이 모여 도를 닦는 도량이다.

 

내가 탄 열차는 믿음이 있고 사랑이 넘치는 인간의 지고(至高)한 능력으로 만들어진 열차이다. 믿음과 사랑이 있으니 지고한 능력과 신뢰(信賴)가 일어나고, 지고한 능력과 신뢰가 있으니 이 열차를 탄 사람들은 이루지 못할 바가 없고, 이루지 못할 바가 없으니 누구나 번뇌를 여의고 편안함을 얻게 된다.

믿음과 사랑은 이기심을 비울 때 얻어지는 산물이다. 요즈음 세상 사람들은 이기심이 있어야 돈을 잘 벌 수 있고, 돈을 많이 벌어야 잘 살 수 있다는 집착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집착은 세상을 혼탁하게 하고 지역적인 분쟁과 가진 자와 없는 자와의 대립을 일으키게 한다. 대립은 불화(不和)를, 불화는 원한을 낳게 한다.

그러나 내가 탄 열차를 탄 사람들은 일체 이기심이 비워지게 된다. 이기심이 비워지는 곳에 공(空)의 도리가 들어나게 되고, 공의 도리가 들어나는 곳에 진공묘유(眞空妙有)가 나타나게 된다. 이 묘유(妙有)가 바로 믿음과 사랑을 바탕으로 하는 곳에 지고(至高)한 능력이 일어나는 법과 같다. 믿음과 사랑을 바탕으로 하는 지고한 능력은 이기심으로 쟁탈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이기심을 비움으로서 얻어지는 순수(純粹)함에 지고(至高)한 능력이 있다. 순수한 곳에 믿음과 사랑이 있고, 믿음과 사랑은 남을 위해 크나큰 도를 깨치게 한다. 그 도는 곧 지혜이고, 지혜는 지고한 능력이다. 지고한 능력은 바로 자비심을 베풀 수 있는 능력이다.

내가 탄 열차를 타는 사람들은 어떠한 사람이라도 이기심이 차츰 약해지고 비워져 남을 위해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을 피우게 되어 극락(極樂) 정토(淨土)를 만들어 간다.

 

왜냐, 내가 탄 열차는 저승행 열차이기 때문이다. 이 저승행 열차를 탄 사람들 중에는 아직 자기가 저승행 열차를 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도 있지만, 열차가 하루를 달렸으면 하루 간만큼 저승에 가까워졌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사실을 인식하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이기심이 옳지 않음을 깨닫게 되어 이기심을 비우게 되고 이웃을 도움에서 얻어지는 기쁨을 나누는 희열(喜悅)을 맛보게 된다.

내가 탄 열차는 저승으로 가는 열차이기에, 이 열차를 탄 사람들은 이웃과 더불어 찰나가 귀한 시간이고 감사한 시간이며 아름다운 시간이라, 부지런히 서로 도움에서 얻어지는 기쁨을 나눌 수밖에 없는 찰나임을 깨닫게 한다. 그러하니 저승은 나쁜 사람들을 지옥으로 데려가니 무서운 곳이지만, 사람들로 하여금 이 생애에서 이기심을 비우게 하고, 이 찰나가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순간인가를 깨닫게 해주는 좋은 곳이다.

살아 있는 순간마다 감사한 마음으로 당신의 참마음을 행복하게 해주고, 당신의 참마음이 행복할 때, 나의 참마음도 행복해지는 부처님의 세계를 이룩하게 하는 저승행 열차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시카고 불타사 주지 현성 합장

2010. 5.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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