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언덕으로 가기 위해 먼저 지혜의 공덕을 닦자


바라밀은 도피안(到彼岸)이라고 번역하며 저 언덕에 이르렀다는 의미가 됩니다. 저 언덕에 이르렀다고 하는 것은 다 끝마쳐서 편안한 곳에 이르렀다. 고통바다에서 벗어나 극락의 부처님세계에 이르렀다는 뜻이 됩니다.


우리들의 일상생활에서 어떤 사람이 오늘 보다 더 낳은 생활을 위하여 어떤 목표를 세워 놓고 그 목표에 닿기 위하여 노력한다면 그것도 바라밀이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월수입이 2천불인 사람이 월수입 2천5백불을 목표로 세워 놓고 꾸준히 노력 한다거나, 가정생활에서 불화와 충돌이 많을 때 가정생활을 원만하고 화목하게 바꾸고자 하는 목표를 세워 놓고 꾸준하게 노력하는 것은 모두 바라밀 행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바라밀이 되기 위해서는 지혜의 공덕이 아니고서는 성취될 수 없습니다. 지혜 공덕이 바라밀의 선행 요건이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이라고 표현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 언덕으로 가기 위해서는 먼저 지혜의 공덕을 닦아야 합니다. 그 지혜의 공덕을 닦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들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요소들을 청정하게 하는 길을 닦아야 합니다. 마음을 청정하게 닦는다고 하는 것은 마음의 때를 씻어버린다는 뜻입니다. 때를 씻으면 청정해 지니까요. 이 때를 우리는 업장(業障)이라고 표현하고 때를 씻는 것을 업장소멸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업장소멸을 위해서는 두 가지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업장이 이미 지어진 것과 업장이 앞으로 지어질 것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과거에 지은 업을 소멸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업에 대한 간절한 참회와 그 이상의 보시행이 필요합니다. 깊은 참회를 통해 다시 지을 업을 사전에 방지하고 보시행을 통해 참회해야할 대상과 하나가 되어 가는 길을 열게 됩니다. 너와 내가 현상적으로는 다르지만 실상적으로는 다르지 않다는 이치를 체험하게 되는 길로 접근하게 되는 것입니다.

보시를 행하지 않고 마음으로만 참회하는 것으로는 너와 내가 하나가 되는 길로 가기는 어렵습니다. 하나가 되지 않고는 현상즉실상의 이치를 달관할 수 없습니다. 보시행은 현상적으로 다른 두 개체를 실상적으로 하나임을 인식하게 하고 그와 같은 인식을 바탕으로 하여 조화를 이루고 상호간에서 자비행이 솟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보시행은 각각 다른 두 개체가 각자의 마음의 근원으로 돌아가게 하는 좋은 방편입니다. 마음의 근원의 입장에서는 두 강물이 하나로 합쳐졌을 때, 두 강물 개체의 특징을 더 이상 찾아 볼 수 없는 것과 같이, 너와 나의 현상적인 특징은 실상의 세계에서는 더 이상 찾아 볼 수 없는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되는 실상이 지속적으로 유지되기 위해서는 앞으로 지을 업을 짓지 않도록 사전에 방지하는 것입니다. 업이라는 것은 때를 의미하므로 앞으로 내 몸에 때가 끼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항상 내 몸을 청결하게 유지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 몸을 청결하게 유지하는 방법이 계율을 지키는 지계입니다. 불살생 불투도 불사음 불음주 불망어를 철저하게 지킬 뿐만 아니라 살생 대신에 방생, 도둑질 대신에 보시, 사음 대신에 사랑, 음주 대신에 건강식, 망어 대신에 애어(愛語)를 함으로서 자신의 마음을 청결하게 유지할 뿐만 아니라 너와 내가 하나되는 공덕을 쌓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계율을 잘 지키고 선행(善行)의 공덕을 쌓아 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리들은 우리들의 마음을 절제하고 통제하는 기능이 자유자재하여야 합니다. 탐욕이 일어나거나 성냄이 일어날 때 이들을 절제하고 통제하는 능력이 자재 하여야만 새로운 업을 짓지 않게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들의 마음을 절제할 수 있는 능력을 불가(佛家)에서 인욕바라밀이라고 하였습니다. 참는다는 생각 없이 절제하고 양보한다는 생각 없이 통제되는 마음을 인욕바라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무조건 참아서 마음에 스트레스가 쌓이게 하는 것은 인욕이지 인욕바라밀은 아닙니다. 참았어도 참았다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아 마음에 즐거움이 있을지언정 스트레스는 없는 것이 인욕바라밀입니다.


보시 지계 인욕을 바르게 행하여 너와 내가 하나 되는 삼매에 이르기 위해서는 정진(精進)이 필요한 것입니다. 오직 일념으로 목표를 향해 달리는 마음과 행동입니다. 요즈음 세상에서는 출가승을 비롯하여 재가자에 이르기까지 정진(精進)이 나태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정진이 나태하여 지거나 퇴락하게 되면 보시 지계 인욕도 나태하여 지거나 퇴락하여 질 수밖에 없습니다. 바라밀을 성취하는 수행자나 재가자가 없는 것은 열반을 증득하는 행자가 없다는 말이 되며 열반을 증득하는 행자가 없는 것은 깨달음을 성취하는 행자가 없다는 말이 됩니다. 말세 현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혜는 많은 돈을 벌게 할 수도 있고 지혜는 한없는 행복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지혜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정진이 선행조건입니다. 사업을 부지런히 하는 것은 어리석은 자의 사업입니다. 불교 신자의 사업은 지혜로워야 하고 부지런함은 사업을 성공시키기 위한 지혜를 쌓기 위함이 되어야 합니다. 일단 지혜가 쌓아지면 어떠한 금전적인 자본보다 값진 자본이 될 수 있고 영원히 내 손에서 떠나지 않는 자본이 될 수 있습니다. 불교 신자들은 이와 같이 값진 바라밀을 성취하기 위하여 정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일단 바라밀을 성취하게 되면 인간의 삶이 어느 곳에나 적용이 가능한 바라밀이 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중생도 구제할 수 있는 바라밀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돈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돈을 벌게 할 수 있어야하고 빵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빵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금강경 강의 중에서>